< 명예의 대가(2) >
다음날 영훈은 출근 도장만 찍고 성북동으로 향했다·
어제 김상철과 헤어지고 굳이 조치연에게 연락해서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건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대략 짐작이 가기도 했고 자세한 이야기는 전화로 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치연은 영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날씨가 참 좋더라고요·”
“뭐 마실 텐가?”
“그냥 물 주십시오·”
“아직 일하는 사람이 안 왔으니 자네가 냉장고에서 물 한잔 따라오게·”
“시킬 거면 뭐하러 물어보셨습니까?”
“예의상 물어봤네· 난 괜찮다고 할 줄 알았지·”
영훈이 물 한 컵을 따라오자 그가 말했다·
“옛날에는 날씨가 좋으면 괜히 기분이 들떠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가 싫었는데 지금은 날씨가 좋으면 괜히 심술이 나·”
“어르신 마음이 흐리기 때문일 겁니다·”
“안다· 내가 내 마음 모를까· 그래도 네놈을 만나고 나서 날씨가 좋다고 심통이 나는 건 줄었다·”
“부담을 팍팍 주시네요·”
“부담 가져야지· 그 정도 부담도 없이 어찌 이 일을 맡아?”
“어제는 왜 안 나오셨습니까?”
조치연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클클클··· 이놈아 내가 그 검사놈하고 너의 선 자리를 봐주는 것도 아닌데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 그리고 내가 나와서 사람 한 명 만나달라고 하면 그 검사놈이 얼씨구 하면서 나올 것 같으냐? 세상에 미스코리아보다 콧대가 높은 놈들이 바로 대한민국 검사 놈들이다·”
“어젯밤에는 저도 조금 당황했습니다·”
“다짜고짜 장부부터 내놓으라고 하지?”
“예·”
“안 잡혀갔으면 됐지·”
“진짜 잡혀갔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영장도 없이 어찌 잡아가? 게다가 일반인도 아니고 HS그룹 실세 중의 실세인 너를 잡아가면 당장 검찰총장실에 전화부터 빗발칠 거다· 네 장모가 그 정도 힘은 있어·”
“아··· 장모님 본가가 예전에 정치권과 연관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연관이 없으면 어때? 지금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바로 네 장모가 가진 권력이다·”
“권력을 가져보니 좋긴 하네요·”
“그러니 다들 못 가져서 안달 아니냐?”
영훈은 물로 목을 축인 다음 본론을 꺼냈다·
“적당한 사람 잘 구하셨습니다·”
조치연은 무릎을 딱 때렸다·
“하하하! 내가 될 줄 알았다·”
“그 사람을 보고 나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적당한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조치연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박자를 타듯 손가락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말이다 네놈이 말한 대로 세영에 원한을 가진 검사들을 찾으려고 했단 말이지? 그런데 세영이 어떤 놈들이냐? 그놈들이 대한민국의 독보적인 권력기관과 척을 질 리가 없지· 세상에 단 한 명도 세영과 척은 진 놈들이 없다는구나· 그런데····”
“그런데요?”
“그런데 여기서 묘한 놈이 걸려들었다· 세영 기자 놈들 말에 의하면 가짜뉴스나 뭔가 문제가 있는 기사가 나가면 검찰 놈들 중에 꼭 그 검사 하나만 봐주지 않는다는 거야· 그렇다고 대놓고 크게 뭐 하나 파고들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날벌레처럼 성가신 존재였나 보더라고· 흐흐··· 그런
데 난 그놈이 딱 너에게 맞는 놈일 줄 알았다· 네가 날 만나러 온 게 운명이었듯 검찰에 딱 하나 세영을 거슬리게 하는 놈 운명일 거라 믿었다·”
“그렇네요· 운명이었네요·”
참으로 공교롭긴 했다·
필요한 타이밍에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나 주는 것·
그가 운명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런데 넌 그놈 어디를 보고 확실한 놈이라고 생각했냐?”
“대범하지 못하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이냐? 그냥 세영에 악연이 있는 사람을 찾은 게 아니야?”
“단순히 예전에 나쁜 인연이 있었다고 그 감정을 오래도록 가지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거나 타협을 하고는 하죠· 어르신같이 피붙이의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일이 아니라면요·”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 게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 아주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호··· 더 해봐라·”
“제가 어렸을 적에 컴퓨터로 하는 게임을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게임을 할 때 가장 저를 힘들게 하는 적은 무력이 강한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죽여도 죽여도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언제고 뒤통수를 노리는 놈들이 가장 힘듭니다· 그놈들은 대화가 안 통하고 한두 번 상대에게 당해줘도 쉽게 분을 풀지 않습니다· 부활하면 죽이고 부활하면 죽이고를 몇십 번 반복한 끝에야 돌아가는 미친놈들이 간혹 있죠·”
“허허··· 그거 특이한 놈들이구나·”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전 악연을 계속 마음에 품어두고 두고두고 복수할 기회만 노리는 사람· 타고나기를 겉으로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꾹 참고 있다가 기회가 오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리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잔혹하게 복수하는 독하고 교활한 사람이 있어요·”
“그게 그놈이다?”
“네· 이런 사람들만이 조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하게 물어뜯으려고 달려들 겁니다·”
조치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사진으로 봤을 때는 그래 보이지는 않던데? 인물이 많이 떨어지기는 해도····”
“자존심 하나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감님 말처럼 인물이 많이 떨어지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많은 놀림을 받고 자라 아마도 상처를 많이 입었을 겁니다· 세상 예쁜 여자들은 전부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랑만 만난다고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을 테고요·”
“그 상처가 그를 독하게 만들었다 그 말이냐?”
“타고난 기질에 주변의 환경이 뒷받침되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조치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궁금한 게 생겼다는 듯 물었다·
“그놈과 세영그룹과 뭐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지는 알아봤어?”
“네· 음··· 예전에 자기와 사랑했던 여자가 세영그룹 회장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허··· 이거 세영 회장인 차명준이가 제대로 걸렸구나·”
“그런데 이게····”
“왜?”
“모든 걸 다 본인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듭니다· 서로 사랑을 했다는 것이 아닐 가능성도 크고····”
“그건 무슨 소리냐?”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아닐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그 원한 때문에 어떤 방해가 있어도 수사를 밀고 나갈 거라는 말이지?”
영훈은 다시 물로 갈증을 해결하고는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가능하긴 한데 워낙 명예욕이 강한 인물이라서 당근 하나 제시했습니다·”
“어떤 당근?”
“이 수사를 진행하면 옷 벗을 각오해야 하니 옷 벗고 나오면 다음 총선에서 원하는 당에 비례대표로 넣어주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그거 먹지 않을 수 없는 당근이구나· 명예 하면 정치인이 제일이지·”
“아마 어제 저를 만난 후 이번 수사로 이름을 날리고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꿈을 꿨을 겁니다·”
“아니다· 아예 잠도 못 잤을걸? 이룰 수 있는 상상이니 잠이 올 리가 있을까 하하하!”
조치연은 한동안 웃어 젖히다가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말했다·
“오늘 중으로 검찰에 찾아갈 예정이다·”
“직접 가져다주시게요?”
“그럼? 내가 그걸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어?”
“혹시 모르니까 복사본 챙겨 두세요· 사진이랑 동영상까지 찍어놓고요·”
“알겠다· 고생했다· 그런데 상은 네가 아니라 병창이 그놈이 받게 될 테니 영 찝찝하구나·”
“누가 받으면 어떻습니까? 혹시 압니까? 세영그룹이 쪼개지면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게 될지·”
“클클클··· 세영이 부서지면서 흘린 부스러기라면 상으로 충분하긴 할 게야·”
“그럼 전 할 일 마쳤으니 가겠습니다·”
“고생했다·”
영훈이 가고 난 뒤 조치연은 갈치조림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송병창 사장을 불렀다·
그리고 지하실 한쪽 구석에 처박힌 오래된 난로 안을 들춰 검은색의 두툼한 서책을 꺼내 들고 위로 올라왔다·
헝겊으로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고 장부의 내용을 다시 검토했을 때 송병창 사장이 찾아왔다·
“뭘 그렇게 소중히 싸십니까?”
조치연이 선물을 포장할 때 주로 쓰는 비단으로 장부를 싸는 걸 보고 그가 물었다·
“지금 바로 검찰로 갈 거니까 차 준비해라·”
“검찰이요?”
“그래·”
“검찰은 갑자기 왜 갑니까?”
“알려줄까?”
조치연이 싱긋 미소 짓자 송병창 사장이 얼른 양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괜히 알아서 명 재촉하느니 모르고 있으렵니다·”
“그렇지? 요즘 아주 은행장 소리 들으면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을 텐데 괜히 몰라야 될 걸 알아서 초 치고 싶은 건 아닐 게야·”
“그럼요 그럼요· 시동 걸어놓을 테니까 내려오세요· 그거 제가 안 들어드려도 되죠?”
“그럼·”
이보다 더 무겁다고 해도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는 물건이다·
조치연이 꽁꽁 싸맨 장부를 품에 꼬옥 안고 내려와 송 사장의 차에 타니 그가 운전석에서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내 걱정하지 마라· 넌 주차장 부지 가지고 싶다고 했지?”
“예? 아유 그럼요·”
“내가 애들한테 말해 놨다· 그렇다고 싸게 팔지는 않을 거야· 공시지가보다 높게 받으라고 했으니까 네가 말 잘해서 가져가든지·”
“감사합니다!”
“얼른 출발해!”
“예! 갑니다!”
*
세영그룹 차명준 회장 집무실·
골프채를 들고 퍼팅연습을 하던 차명준 회장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송지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회장님!”
“넌 그 나이를 먹고도 예의를 모르냐? 응?”
“죄송합니다·”
차명준은 골프채로 그의 배를 툭툭 밀었다·
“그만큼 가르쳤으면 좀 배워 인마· 들어올 때는 노크 새끼야·”
“죄송합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송지용의 표정이 마음에 드는지 골프채를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지며 물었다·
“뭔데?”
“조치연 그 늙다리가 검찰에 나타났습니다·”
“뭐? 검찰이 불렀어?”
“제가 알아봤을 때 조치연에 대한 소환조사는 없었던 것으로····”
“그럼 지가 지 발로 찾아갔다는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차명진은 구둣발로 송지용의 조인트를 까며 소리쳤다·
“같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말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자기 발로 찾아간 게 확실합니다·”
“씨이발··· 맨몸으로 갔어?”
“가슴에 뭘 품고 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미친 새끼가····”
차 회장은 벌떡 일어나 송지용의 뺨을 후려쳤다·
짝!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180이 넘는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송지용이 휘청거렸다가 겨우 몸의 중심을 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차 회장은 그래도 화가 안 가라앉는지 연거푸 그의 뺨을 때렸다·
그의 양 볼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올 때쯤 차 회장이 손목의 단추를 풀며 물었다·
“너 이 새끼··· 제대로 안 지켜 보고 뭐했어?”
“조치연이 집 주변에 사설 경호원들을 배치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움직일 때면 항상 자기 차가 아닌 다른 차가 와서 그를 픽업해가는 방식으로 움직여서····”
“그럼 뒤따라갔어야 할 게 아니야!”
“뒤를 밟을 때마다 계속 어딘선가 나타난 차들이 길을 가로막아서····”
짝!
차명진 회장은 그의 변명을 다 들어주지도 않고 다시 뺨을 후려갈겼다·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그가 말했다·
“찾아간 검사가 누구야?”
“동부지검 김상철 검사입니다·”
“나가 이 새끼야· 나가서 반성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송지용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차 회장은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저 차명진입니다· 요즘 어떻습니까?”
[저야 뭐 항상 똑같지요· 정신없습니다·]
“맞아요· 정신없지요· 다른 건 아니고 동부지검에 김상철 검사라고 있지요?”
[김상철 검사요?]
“총장님께서 검사 하나하나 기억하기는 어려우실 텐데 하여튼 김상철 검사라는 양반이 아유 참····”
[뭔데 그러십니까?]
“말도 안 되는 모략에 걸려드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검사면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건데 어디서 조작된 증거를 가지고··· 하여튼 우리 총장님께서 신경 좀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내가 한번 알아보고 단단히 주의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차명진 회장은 전화를 끊고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영감탱이가··· 이래서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김상철이라는 새끼는 어떤 등신이야? 감히····”
차명진 회장은 화는 났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상황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검찰총장에게 다이렉트로 전화를 넣었으니 일개 검사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 명예의 대가(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