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예의 대가(4) >
“칼이 나한테 돌아올 거라고? 확실한 거야?”
“확실하긴요 그냥 내 느낌인데·”
“네 느낌만큼 확실한 게 세상에 어딨어!”
영훈이 빽 소리지른 형준에게 힐난하듯 말했다·
“소리 좀 낮추세요· 회사로 돌아간 이세명 사장님 다시 불러올 겁니까?”
“아니··· 미안한데 어쨌든 그냥 네 느낌이 그렇다는 거잖아? 느낌이 딱 그래?”
“눈에 자비가 없잖아요·”
눈에 자비가 없다는 말은 그저 둘러댄 말이 아니었다·
세모꼴로 각이 진 눈을 보면 그의 마음 또한 각이 졌을 것임이 자명했다·
하지만 오직 그것 때문에 형준에게 경고하는 건 아니었다·
이세명 사장은 말년에 관재수와 이별수가 아주 나쁘게 들어 있는 건 물론이고 자칫 잘못하면 횡액을 당할 수가 있는 극히 좋지 않은 운세였다·
그는 이번 검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고 이혼하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걸 깨닫는 즉시 남이나 다름없는 형준을 그냥 놔둘 리 만무했고 애초에 그는 인정이 많지 않고 잔인해 그 많은 그룹의 재산을 둘로 나눌 생각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눈에 자비가 없다고? 되게 순하기로 유명했는데? 작은어머니한테 꼼짝 못 하고 살았고 이번에도 작은어머니 눈치 본다고 우리 아버지 뒤통수 치셨어·”
“호랑이와 늑대가 같이 산다고 치면 늑대는 기죽어 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늑대가 온순한 건 아니죠·”
형준은 눈을 껌뻑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확 이해가 되네· 그럼 작은아버지가 늑대라는 거지?”
“말했듯이 눈에 자비가 없는 사람 같습니다· 형제를 배신한 상황에서 같은 피도 안 섞인 상무님에게 그룹의 절반을 통 크게 떼어 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정당당한 게임은 포기하라는 거네?”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 잠깐만· 난 술 좀 해야겠다·”
형준은 못 참겠다는 듯 술을 시켰다·
점원이 가져다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운 그는 단번에 들이키며 말했다·
“크음··· 그러니까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쳐라?”
“그건 상무님께서 알아서 하세요·”
“왜 또 한 발 빼고 그래?”
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상무님 선택이니까요· 제 개인적인 의견을 전달했으니 거기에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형준 상무의 인생이다·
이 정도까지 해주는 것만 해도 선을 넘기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돈데 거기서 행동지침까지 확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존나게 냉정하네· 어쨌든 고맙다· 난 솔직히 그랬거든· 아무리 피가 안 섞였다고 해도 아버지는 날 버렸고 어머니는 날 괴롭히기만 하는 것 같고···· 작은아버지야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나와 손잡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난 일이 끝나면 가까워질 생각도 있었다·”
“감상적이시네요·”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가족이라는 건 다르잖아· 네가 소개해준 민희··· 이제는 민희만 남은 것 같아· 그래서 가짜 양자로 들어간다고 해도 진짜 아버지처럼 잘 해드리려고 했는데····”
영훈은 대답 없이 그저 회만 한 점씩 집어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괜스레 눈꼴 시린 형준이 투덜거렸다·
“맛있냐? 누구는 속이 말이 아니구만·”
“그럼 딱 잘라서 계열사 하나만 달라고 하세요· 그럼 작은아버지도 굳이 또 피를 흘려가며 싸우려 하지 않을 겁니다·”
“허··· 여기까지 와서 계열사 하나만 달라고? 그게 말이냐?”
“그럼 계속 고민하시든지요· 그게 다 상무님 욕심 때문에 생긴 고민 아닙니까?”
“내 잘못이다· 내가 입을 잘못 놀렸어· 그래 먹자·”
형준은 어차피 고민하고 걱정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인정하며 빠르게 젓가락을 놀렸다·
*
영훈과 형준이 식사하고 있던 일식집의 바로 맞은편에 공교롭게도 비슷한 고급 일식집이 또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이한율 부장검사가 안경을 쓴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와 회와 술을 내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불러주시고 요즘 너무 뜸하셨던 거 아닙니까?”
“사건이 있어야 정 기자를 부르지· 내가 뭐 연예인인가? 기자를 아무 때나 부르게·”
이한율 부장검사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주고받는 이는 정대수 기자로 공중파인 KSC의 선임기자다·
경력도 대단하고 정치부와 사회부를 넘나들며 마당발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이한율 검사와 꽤 자주 만났던 사이였다·
“그럼 오늘은 뭐 있는 겁니까? 부장검사님 되셔서 이제 기자 만나고 다닐 짬밥이 아니시지 않아요?”
“나도 그럴 줄 알았지·”
“오호라··· 이거 오늘 술맛이 아주 달달하겠습니다·”
“달달할 수도 있고 씁쓸할 수도 있지·”
“씁쓸할 수도 있어요? 왜 씁쓸합니까?”
“달달해야 목에 잘 넘어가거든· 씁쓸하면 입에서 뱉는 수가 있어·”
“제가 감당하지 못할 기사일 수도 있다는 말이세요? 검사님 안 본 사이에 많이 유해지셨네?”
약간 놀리듯이 하는 말에도 이한율 부장검사는 씁쓸한 얼굴로 입에 들어온 술을 오물거렸다·
무거운 분위기에 정대수 기자는 오늘 뭐가 있기는 하다는 확신을 얻었지만 그만큼 긴장이 되고 있었다·
과장 좀 많이 보태면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부장검사가 도대체 어떤 기삿거리를 가지고 왔길래 저렇게 무게를 잡을까?
예전 유명 정치인의 뇌물 사건을 터뜨릴 때도 이렇게 뜸을 들이지는 않았었다·
이한율 부장검사는 술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소문이 하나 돌아·”
“네?”
“소문이 하나 돌고 있다고·”
정대수 기자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부장검사님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네요· 어떤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일부러 이한율 부장검사와 선을 그어주며 안심시켰다·
“세영그룹에서 정치권과 공무원들을 상대로 장기간 후원을 해준 장부가 검찰에 입수됐다는 소문·”
정대수 기자는 너무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대어가 걸릴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커도 너무 컸다·
세영그룹이라니····
언론사끼리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어지간히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면 다른 언론사의 추문이나 불법은 기사로 쓰지 않는 것이다·
세영그룹이면 대한민국 대표 신문사 중 하나인데 그곳에서 정치인과 공무원에게 장기간 스폰을 해준 정황이 담긴 장부라면 대한민국이 뒤집힐 일이다·
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보도하게 될 언론사는 앞으로 세영그룹과 원수가 될 것이 확실했다·
정대수 기자는 왜 이한율 부장검사가 달달할 수도 있고 씁쓸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아따··· 엄청 쓰네요·”
“쓰지?”
“예 제가 어렸을 때도 한약을 잘 먹었는데 오늘 건 너무 써서 뱉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곤혹스럽습니다·”
“뱉을 거면 빨리 말해· 그래야 쓴 거 잘 먹는 사람에게 넘기지·”
“흐흐··· 그래도 입에 쓴 게 몸에는 좋다고 하죠? 보약 남 주는 꼴 보느니 내가 먹고 죽겠습니다·”
“잘 생각해·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조심해야 한다고·”
정대수 기자는 다시 침을 꼴깍 삼키고 술을 들이켰다·
얼큰한 기운이 가슴을 타고 오르자 그가 호탕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달달한 기사만 찾아다녔던 적 없습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경력도 쌓을 만큼 쌓았는데 이제 와서 편식하면 후배들한테 손가락질 당합니다·”
“그래? 진짜야?”
“네·”
“좋아· 그런데 이거 한 번에 다 못 풀어줘·”
정대수 기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표정이 홱 바뀌었다·
“예?”
“이게 소설로 치면 대하소설급이야· 한 번에 다 풀면 사람들도 이해 못 해· 챕터 하나씩 풀어가자·”
“장부가 나왔는데 하나씩 잡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장부에 나와 있으면 다 끝난 거 아니에요?”
“내가 왜 정 기자 불러내서 술 먹이는 줄 알아?”
“그거야····”
그제야 정대수 기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까지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가 기자들을 상대하면서 언론플레이 하는 거야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 건은 너무 돌다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재벌이 정치인에게 로비한 사례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장부를 근거로 수색영장 우르르 치고 들어가면····
“혹시 내부에서 수사를 못 하게 합니까?”
이한율 부장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잖아? 쓰다고·”
“덮으려고 하는 겁니까?”
“그래·”
정대수 기자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물었다·
“첫 챕터 제목은 뭡니까?”
“제목은 그대가 정해야지· 나야 이야기를 풀어줄 뿐이고· 말했듯이 세영그룹에서 오랫동안 정치인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후원해준 장부가 검찰로 날아들었어· 시계 명품 따위의 현금이 흐르지 않는 방식으로 후원한 것들이라 장부가 없으면 추적이 불가능해·”
“아주 흥미로운 소문이군요· 알겠습니다· 잘 만져보겠습니다·”
“시간이 없어· 오늘 저녁이 넘어가면 장부를 지킬 수 있을까 싶어·”
장부를 가지고 자취를 감춘 김상철 검사 때문에 증거를 인수하러 왔던 특수부 검사들이 지금까지 그의 검사실 안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
같은 검사실에서 속칭 뻗치기를 하고 있는 황당한 사안이라 여론을 움직여야 했다·
“첫 꼭지로 내보내겠습니다·”
“고마워·”
“제가 감사할 일이죠· 그럼 앞으로도 장편소설 이어 들으러 오겠습니다·”
정대수 기자는 술과 음식을 그대로 남겨놓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지금 상황에 한가하게 술과 음식을 먹을 여유는 없으니까·
이한율 부장검사는 홀로 음식과 술을 마시다 얼큰하게 취한 다음에야 택시를 타고 근처 사우나로 향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검찰청으로 돌아오면 재밌는 일들이 벌어질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
“아직도 못 찾았대?”
차명진 회장은 그날 이후 심기가 극도로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옆에서 보고하는 송지용 비서실장은 긴장감에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걸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네· 집에도 없고 아직 검찰로 복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수부 애들은?”
“일부는 김상철 검사실에서 뻗치고 있고 일부는 찾아보는 모양인데····”
“씨발· 같은 검사니까 핸드폰 위치추적도 못 하겠고 차량 조회도 못 하겠네· 그 영감탱이가 대단하긴 해· 그치?”
“예?”
“아니··· 김상철인가 뭔가 하는 그 또라이는 어떻게 알고 그걸 맡겼을까? 그나마 우리와 조금이라도 트러블이 있는 검사는 또 기가 막히게 찾아냈어·”
“·······”
송지용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못 하고 마른 침만 삼켰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전처럼 입안이 만신창이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차명진 회장은 그가 대답을 하든 안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누가 그 영감탱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나?”
“예?”
“조금 이상해서 그래· 그 또라이가 장부 내용을 안 봤을 리 없고 그렇다면 건들면 안 되는 물건인 걸 알았을 텐데 가지고 도망을 쳤다? 시간을 끈다는 건데··· 누굴 믿고? 돈만 많은 영감탱이?”
“조치연이 가진 현금은 대기업도 인정할 정도입니다· 이번 사건 이후에 상당한 부를 약속했을 수 있습니다·”
차명진은 코웃음을 쳤다·
“넌 새끼야 아직 멀었어· 검사들 돈 좋아하지 대놓고 티는 못 내지만· 그래도 돈에 자기 옷을 걸지는 않아· 너 같으면 돈과 권력을 바꾸겠냐?”
“저는····”
“바꿀 것 같지? 그러니까 넌 내 밑에 있는 거야·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인생 제 일 원칙 권력은 돈보다 우선한다· 똑똑한 놈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아· 뭐 백억 천억 단위로 던져주면 개처럼 구를 수도 있겠지만 조치연이 그 검사에게 백억을 던진다고?”
“그가 가진 돈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너 같으면 부장검사도 아니고 다 늙은 평검사한테 백억 던지겠냐? 이 빡대가리 새끼야?”
“죄송합니다·”
차명진 회장이 혀를 찰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민 차형석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버지! TV 틀어보세요!”
“응? 왜?”
형석은 대답대신 리모컨을 찾아 TV부터 켜고는 KSC로 돌렸다·
그리고····
[···그렇습니다· 세영그룹이 오래전부터 정치권과 공무원들에게 접근해 현금이 아닌 자동차나 명품 또는 그림과 같은 고가의 물건을 지속적으로 제공한 내역이 적힌 장부가 검찰로 투서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수사가 시작됐겠군요?]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연 검찰이 이 장부를 가지고 제대로 수사할 의지를 가지고 있냐는 것인데요· 놀랍게도 검찰은 처음 장부를 받았던 검사를 수사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럼 문제 아닌가요?]
[아직 정확한 소식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검찰이 과연 수사 의지를 가지고 있냐는 것은 수사팀을 어떻게 꾸리냐에 달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씨이발····”
차명진 회장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 명예의 대가(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