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가미(1) >
차형석은 아예 아버지의 옆에 앉아 뉴스를 끝까지 시청했다·
뉴스는 이후 몇 마디 의미 없는 대화로 첫 꼭지를 마무리했고 형석은 TV를 껐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직원 중에 하나가 배신한 거예요?”
차명진 회장은 아직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외할아버지 짓이다·”
형석은 입을 벌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색과 두려움이 깃든 눈동자가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버지····”
“넌 걱정할 거 없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아버지 외할아버지가 엄마··· 엄마 복수하려는 거죠?”
“흥! 복수가 가당키나 할 거라고 생각해? 감히 나에게?”
“방금 뉴스에서 그랬잖아요· 장부를 확보한 검사는 사라졌고 공중파에서 터뜨렸으니 이제 소규모 언론사에서 받아쓰기 시작할 거예요· 포털도 우리 눈치 안 볼 거라고요· 그럼··· 청와대에서 검찰을 압박할 텐데····”
“넌 나가 있어·”
“아버지····”
“얼른!”
차형석은 입술을 깨물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갔다·
차명진 회장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 지난 뒤에 눈을 뜨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차 회장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총장이 먼저 말했다·
[뉴스 보셨죠?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지금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셨기에 평검사 하나 관리 못해서 공중파 뉴스까지 나오게 만드십니까?”
[흐음··· 제 실책입니다·]
“수사를 해도 중수부장이 해야 할 것인데 고작 평검사가 저리 날뛰도록 그냥 두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맞는 거지요·]
“그럼 총장님만 믿겠습니다·”
차명진 회장은 전화를 끊고 송지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김상철인지 또라이인지나 찾아· 사람을 풀든 본가를 뒤지든 해서 은밀히 찾아· 그렇다고 무식하게 검사집에 덩치들 끌고 가는 병신짓거리 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봐·”
차명진 회장은 참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
차명진 회장이 뉴스를 보고 놀란 그 시각 도수연 의원 역시 그 뉴스를 보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긴장하고 화가나 주먹을 세게 쥔 나머지 손톱이 손바닥에 상처를 냈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뉴스에 나온 장부가 조치연에게서 나온 것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검찰총장에게 연락해야하나 생각했지만 이내 그것만으로는 이 사태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세영그룹 최 회장이 가만히 있을 사람도 아니고 이미 전화를 해도 골백번을 했을 텐데 자신이 보태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기다릴 수 없겠다 싶어 다시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보좌관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의원님·”
“왜?”
“선진문화당 봉성수 의원 보좌관이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시간 없다고 해·”
도수연 의원이 숨도 안 쉬고 바로 대답하며 얼른 나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보좌관은 머뭇거리다가 재차 말했다·
“바이오 산업벨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하시는데요?”
“바이오 산업벨트?”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진 걸 본 보좌관이 움찔했다·
“그냥 안 된다고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어디서 만나자고 해?”
“신사동 헤롯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신사동에 위치한 헤롯이라는 바는 고위 정치인이나 재벌 연예인 등 손님들의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주는 술집이었다·
회원가입을 해야만 입장이 가능하고 자산이나 명성이 일정 이상 되지 않으면 가입하고 싶어도 가입시켜주지 않는 곳이었다·
“알았어·”
도수연은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직 수사팀이 꾸려진 상황도 아니었고 총장이 바보도 아닌데 저걸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곧장 신사동으로 움직였다·
봉성수 의원이 던진 화두가 그녀의 엉덩이를 의자에 붙어있게 만들지 않았다·
신사동 도산공원 맞은편 술집들이 몰려 있는 곳에 위치한 5층짜리 작은 모텔 건물이 대한민국 최고급 술집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수연 의원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은 룸으로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미리 와 있던 봉성수 의원이 앉아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제 초선인 봉성수 의원은 노동자 출신으로 나이가 아직 마흔도 안 된 총각이었는데 초선임에도 여의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의석수가 열 석도 채 안 되는 소수정당인 선진문화당 소속으로 지역구에서 승리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당내 불협화음으로 이미 뉴스에 몇 번이나 나왔다·
도수연 의원이 불편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봉 의원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도수연 의원님에게 해가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만나자고 했겠습니까? 전 의원님 팬입니다·”
“팬이라니 낯 뜨겁네요·”
“진짜예요· 의원님처럼 당당하고 강한 여성 정치인· 전 강한 여자가 좋거든요·”
도수연 의원이 얼굴이 더 굳어졌다·
어쩐지 마지막 말이 성희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으면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왠지 봉성수 의원의 느끼한 얼굴에 저 말이 더해지니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읽었음인지 봉 의원이 멋쩍게 말을 이었다·
“제 진심인데 이상하게 느끼셨다면 미안합니다· 더 이야기하면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지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죠· 일단 한 잔····”
봉 의원이 술을 따라주자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마시고 술의 열기가 목을 타고 오를 때 봉 의원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이오 산업벨트··· 의원님께서 춘천으로 옮기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도수연 의원이 시치미를 떼자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에서 국토부 고위 공무원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저일 겁니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하여튼 그래요·”
도수연 의원은 봉 의원이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저 그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눈빛에 머쓱해진 봉성수 의원이 말을 이어갔다·
“바이오 산업벨트를 왜 춘천으로 옮기고 싶어하시는 지는 사실 전 그렇게 궁금하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걸 알아내서 의원님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요?”
“그래서 그냥 호기심만 가득한 상태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국토부의 기조가 변했어요·”
“어떻게요?”
그녀의 눈빛에 든 긴장감·
봉성수 의원은 내심 됐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다시 하남으로 턴하는 분위기라고 해요·”
“확실한 건가요?”
확실하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봉 의원의 수에 말려드는 거라는 걸 도 의원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건 그만큼 그녀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화옥신녀가 한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한 그녀는 다시는 가족을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비록 비이성적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바이오 산업벨트를 춘천으로 옮겨야만 했다·
“백 프로 백 프로 확실한 정보입니다·”
도수연 의원은 아무 말 없이 반쯤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봉 의원은 조용히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말했듯이 저만큼 국토부와 가까운 국회의원은 없거든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요?”
“당을 옮기고 싶습니다·”
도수연 의원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고작 초선인 정치인이 벌써부터 당을 옮길 생각부터 하다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되새겨 보니 본래 통일평화당으로 정치를 시작하려고 했다가 비례대표에서도 탈락하고 원하는 지역구 경선에서도 힘에 밀려 결국 선진문화당에 입당했던 그였으니까·
특히 다음 총선에서 통일평화당의 승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이번 기회에 당을 옮기는 것을 고려하지 못할 상황인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입당 선물로 지금 바이오 산업벨트를 춘천을 주겠다고 하는 것인데····
“괜찮네요·”
그녀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국토부 기조가 왜 바뀌었는지는 아세요?”
“여당 쪽에서 힘을 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녀가 눈을 빛냈다·
“여당에서요?”
“네 하남이 꼭 되어야 할 이유를 가진 국회의원이 있나 보죠· 하지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도수연은 오버스럽게 웃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건넨 선물이 너무 매력적이라 참기로 했다·
“그럼 그것도 알아봐 주세요· 누가 국토부에 손을 대려고 하는지·”
“거래인 건가요? 부탁인 건가요?”
“서울 은평구 어때요?”
“뭐가 말입니까?”
“다음 총선에 나갈 지역구 말이에요·”
봉성수 의원은 환하게 웃었다·
“제가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책임지겠습니다·”
“믿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쌩하니 나가버렸다·
웃으며 그녀가 나가는 걸 지켜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계속 술을 마셨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봉 의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사람은 바로 천보윤 의원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람이 들어왔는데 바로 최영훈 상무였다·
“기다리느라 힘들었네·”
“기다림이 길면 거기서 얻는 열매도 그만큼 달콤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달콤한가?”
봉성수 의원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눈웃음을 지었다·
“달콤하긴 합니다·”
천보윤 의원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도수연이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급해 보이기는 하더군요· 안 속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국토부 사정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 수 있는지 밝히라고 채근할 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알려달라면 못 알려줄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그만큼 여유가 없어 보이더군요·”
천 의원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 역시 도수연 의원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실수 한번 안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던 그녀가 이번 사안만큼은 그녀답지 않은 일처리를 하고 있었다·
“도수연이 뭘 해준다고 하던가?”
“제 지역구를 은평구로 찍어줬습니다·”
“은평구라··· 좋겠구만·”
“저도 사람이라 좋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환호할 정도는 아니에요· 저도 지역구에서 승리해서 따낸 국회의원입니다· 비례대표로 공짜로 올라온 게 아니거든요·”
“어부지리로 운 좋게 당선된 거 알잖아·”
“뭐 그건 인정합니다· 어부지리이긴 했어요· 하여튼 통일평화당 깃발 들고 은평구에 가면 당선확률 높아지기는 할 텐데··· 제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솔직히 그래· 많이 힘들었잖아· 이제 편하게 살아야지·”
아무래도 둘 사이에는 정치인 이전에 어떤 인연이 있어 보였다·
“그럼 바이오 산업벨트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진짜 춘천으로 넘어가게 만들어 주시려고요?”
“그럴 수야 있나·”
천보윤 의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영훈을 쳐다보았다·
도수연 의원이 오기 전에 만났었던 저 젊은 청년은 지금까지 인사할 때만 제외하고 별다른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봉성수 의원은 내심 그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영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도수연 의원은 이번 일로 인해 다음 총선에서 출마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건 인정· 그래서?”
“다음 총선에 꼭 나와서 당선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그야 당연히····”
“당을 옮기지 않으면 당선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봉 의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뜻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했다지만 가진 뜻만을 생각하고 한 길만 걷기에는 그는 머리가 너무 좋았다·
지금이라도 당을 옮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판단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래·”
“만약 당을 옮기지 않고 다음 총선에 당선되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봉성수 의원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어려운 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기업인들입니다· 그리고 전 꽤 능력 있는 기업인 소리를 듣고는 합니다·”
“허허··· 그래· 소문은 많이 들었어· 그럼 어떻게 해줄까? 보아하니 하남에 땅 좀 있나 본데 다시 하남으로 돌려줄까?”
“땅이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 전 바이오 산업벨트가 어디로 가든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땅값 올려서 돈 버는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거든요·”
“그럼?”
“도수연만 잡아주세요·”
< 올가미(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