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가미(2) >
봉성수 의원이 나가고 룸 안에는 영훈과 천보윤 의원만 남았다·
둘은 술을 새로 시키고 몇 잔 마신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래 봉성수 의원님과 많이 가까운 사이셨습니까?”
“오래전에 그가 해고노동자 시위를 할 때 조금 도와준 적이 있어· 솔직히 정의감에 넘쳐서 도와줬다기보단 선거에서 이기려고 했던 건데 그래도 당시 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됐었지· 그래서 그가 정치인이 된 다음에도 가끔 만나기는 해·”
“그렇군요·”
“국토부 차관이 봉 의원 불알친구야· 어렸을 때 정의감이 남달라서 어려운 친구들을 많이 도와줬는데 당시에 도움을 많이 받았었나 봐·”
“그래서 힘을 쓸 수 있는 거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애초부터 그의 관상을 보자마자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봉성수 의원은 눈썹이 길고 진하며 광대가 좋아 주변에 사람이 많을 상이다·
“그런데 도수연이를 곤란에 빠뜨리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이까? 아직 현역이야· 현역 국회의원 곤란하게 해봤자 뉴스가 나올 때만 반짝이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되고 말지· 이번 건도 마찬가지야· 명확한 증거는 있을 수가 없고 도수연 이름만 더 거론돼서 오히려 다음 총선에 더
유리하게 될 수도 있어·”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동의는 하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 태도에 천보윤 의원이 물었다·
“안주머니에 뭐가 들었나? 혼자만 알지 말고 좀 꺼내 봐·”
영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뉴스 보셨죠?”
“무슨 뉴스?”
“재벌이 정치인과 공무원에게 장기간 후원해왔던 내역이 담긴 장부가 검찰에 날아들었다는 뉴스요·”
“당연히 알지· 그것 때문에 난리잖아·”
모를 리가 없다·
장부에 혹시나 같은 당 의원의 이름이 올라가 있을까 봐 검찰과 친한 여당 중진의원들이 전화통을 붙잡고 내내 연락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천보윤 의원 역시 검찰에서 어떻게 수사팀을 꾸리고 어떤 방향으로 수사를 해나갈지 촉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도수연 의원은 다음 총선에 나오지 못할 겁니다·”
도수연 의원은 작년부터 구설수를 조심해야 할 운에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고 감옥에 가는 관재수가 들어와 있는 건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크게 망신을 당할 운에 들어와 있었기에 극도로 조심해야 했는데 하필 조심해야 할 시기에 너무 무리하게 움직였다·
“왜? 혹시 그 장부에 도수연이 이름이 들어가 있나?”
“그건 아니지만 아마 무척 곤란해질 겁니다·”
“자세히는 이야기해줄 수 없고?”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그냥 이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천보윤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도수연이는 이번 사태로 인해 나가리가 될 거라는 이야긴데 그렇다면 여당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안 그래도 행자부장관에 대한 공격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여론도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장부로 화제가 옮겨가면서 당내 분위기도 차츰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도수연까지 자빠지게 되면 다음 대선의 향방은 눈에 그릴 듯 선명해지는 상황이었다·
“고맙군· 자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그런데 이왕 일을 만들 거면 바이오 산업벨트를 하남으로 가지고 가는 게 어때?”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한 건 그냥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땅값이야 오르면 좋기는 한데 크게 관심 없습니다·”
“그럼 지금 자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 순위는 뭔가?”
“우리가 키우고 있는 명품브랜드의 추가 성장이나 HS건설의 추가 수주? 아니면 카타르 LNG선 수주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글로벌하군·”
“국내에만 있어서는 발전이 더디니까요·”
“좋은 마음가짐이네· 그런데 과연 봉성수 의원이 우리의 회유를 받아들일까?”
“아마 그럴 겁니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오래 전부터 그를 봐왔던 나도 그를 잘 모르겠는데 말이야·”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믿고 헤어진 거 아니었습니까?”
“난 그를 신뢰하지 않아· 처음부터 신뢰한 적이 없었지· 그가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 것도 정치를 하고 싶은 욕심이 바탕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선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네· 그래서 그를 신뢰하지 않아·”
“맞습니다· 잘 보셨네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명분이 바탕이 됐을 때 언제든 자신의 입장을 바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평판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가능하다면 철새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정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상당히 큰 매력을 느낄 겁니다·”
“그렇다면 좋겠군· 그나저나 고맙네· 역시 자네와 같이하니까 여러모로 일이 쉽군·”
“도수연이 정리되면 이제 대선이 남게 됩니다·”
“그렇지·”
“준비된 한 방이 있으십니까?”
천보윤 의원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도와주는 것이지만 사주에 큰 그릇이라고 나와 있다고는 해도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대통령이 될 그릇이지만 사람을 잘못 만나 못 되는 경우도 있고 운 나쁘게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물론 웬만한 점쟁이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지간한 운명은 꿰뚫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은 무게감이 달랐다·
“처음 자네를 만날 때는 나도 군산시장처럼 대단한 프로젝트를 하나 해보면 어떨까 했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집에 있는 마누라가 사고 친 걸 보고 이혼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어떤 대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보다 주변에 흘린 과오를 수습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네·”
“좋은 생각이네요·”
대통령이 될 사람과 아닐 사람의 차이가 대단히 클까?
영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될 사람은 앞으로 넘어져도 돈을 줍고 안 될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굳이 뭘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흐름이 따라올 사람이기에 영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도수연 건만 잘 처리되면 조금 버거운 일들이 모두 처리될 것 같았다·
*
꼭꼭 숨어있었던 김상철 검사가 동부지검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잘 먹고 지냈는지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로 등장했을 때 검사실에서 뻗치고 있던 특수부 검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장부는 어디 있습니까?”
“장부요? 무슨 장부 말하는 겁니까?”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말하세요· 증거가 될 장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제야 김상철 검사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거요? 글쎄요 어디에 뒀더라? 지금 생각이 안 나는데 생각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저 들어가야 하니까 비켜주세요·”
“허··· 나 이거 참····”
한참 아래 기수지만 얼굴도 마주친 적 없는 사이였기에 그들도 감히 함부로 하지는 못하고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다·
김상철 검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검사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당연히 부를 거라 예상했던 김상철 검사는 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특수부 검사들 한 명 한 명에게 고생한다며 안에서 식사라도 하고 있으라는 식으로 인사하고는 검사장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검사장실에는 박노훈 검사장과 이한율 부장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앉지· 몸은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박노훈 검사장은 뻔뻔하게 들어와 앉은 김상철 검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김상철 검사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전해 들은 게 있으니 본래 어떻게 행동하고 다녔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보면 과거 그의 모습과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근래 그를 변화하게 한 무엇이 있다는 것·
그것이 장부일지 장부를 움직이게 만든 또 다른 무엇일지 박노훈 검사장은 그게 궁금했다·
“쉬면서 뉴스 봤나?”
“네 봤습니다·”
“자네가 흘린 거야?”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박노훈 검사장의 시선이 이한율 부장검사에게 돌아갔다·
“그럼 기자들 만나서 우리 조직 망신시킨 게 당신이라는 거잖아? 머리는 잘 썼는데 어쩌려고 그래? 내가 총장님 막아주기를 바라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한율 부장검사는 순순히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한 것보다 생각이 궁금해서 그러지· 바보도 아니고 무슨 대책이 있을 거 아니야? 설마 아무 대책도 없이 판을 벌였으려고· 누구야?”
“네?”
“누가 뒤에서 봐주는 거야? 여당이야?”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그 장부에 여당 야당 가릴 거 없이 들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정치인이 뒤에서 봐주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 나이 먹고 정의감이 치솟아 올라 그랬다는 건 아니지? 검찰조직은 하나로 움직여야 해· 총장님의 뜻이 바로 조직의 뜻인 거 내가 설명해줘야 해?”
이한율 부장검사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장부에 법조인도 들어가 있습니다·”
“뭐라고?”
놀라는 박노훈 검사장에게 김상철 검사가 말을 보탰다·
“장부에 이름을 올라가 있는 현직 판사가 세 명에 현직 검사가 다섯입니다·”
“접어·”
“검사장님····”
“접어! 미친것들 아니야? 어쩌려고? 전국적으로 검찰 개망신 시키려고? 그거 수사 가능할 것 같아? 수사 허가 안 내줘· 그리고 너····”
박노훈 검사장이 김상철 검사를 검지로 가리키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걸 알면 미리 이야기를 해야지· 어디서 장부를 숨기고 나타나? 특수부에서 같은 검찰이라고 가만히 놔둬서 그렇지 어디 네 뒤 털어봐? 과잉수사로 옷 벗어 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이한율 부장검사가 말했다·
“이 수사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뭐라고?”
“신동호 고검장님께 김상철 검사가 가진 장부 사본을 드렸습니다· 총장님이 김상철 검사 양손을 묶으면 고검장님께서 움직일 겁니다·”
숨어 지내는 동안 김상철 검사는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흥분하던 박노훈 검사장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이거··· 반역인 거 알지?”
“솔직히 검사장님도 비서울대 출신이지 않습니까· 검사장님 승진 여기서 끝일 거라고 저에게도 종종 말씀하셨죠· 하지만 이번 기회에 검찰 내부의 적폐세력을 걷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너··· 이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가능합니다· 이미 언론에서 우리와 발을 맞추고 있고 여당도 호의적입니다·”
“여당 의원이 포함돼 있다는데 뭐가 호의적이야?”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호의적인 건 맞습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서울대 출신 적폐세력을 거둬낼 수 있다면 조직을 위해서라도 더 좋은 일일 것이고 평검사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김상철 검사는 이한율 부장검사의 말에 속으로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서울대 출신이라고 대단한 적폐세력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다고 불법을 자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 검찰의 권력을 그들이 쥐고 있을 뿐이었다·
저들이 가진 인사권으로 그들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는 모습이 꼴불견인 데다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어 적폐세력이라는 표현까지 썼지만 어차피 상철이 봤을 때는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여기에 판사까지 얽혀 있다며? 만약 영장 안 나오면? 좋아· 뭐 어떻게 구속이나 압수수색 영장이 나와서 했다고 치자고· 이후에 판결에서 죽 쓰면?”
“죽 쓸 수가 없습니다·”
“확신해?”
“증거가 너무 명백합니다· 사건에 연루된 판사가 아니면 영장 무조건 나옵니다·”
박노훈 검사장은 고심했다·
이 수사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순간 검찰총장과 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비서울대 출신이 검찰 내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은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박노훈 검사장은 전화를 들었다·
“박노훈입니다· 특수부 애들 철수시켜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우리 애들이 수사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박노훈 검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에 김상철 검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에 전화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통보했으니 이제 기자들에 둘러싸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 올가미(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