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헛발질(1) >
“자네 지금 나를 바보로 아나? 오해하지 말라고?”
차명진 회장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뜩이나 덩치도 큰 사람이 인상까지 쓰니 아마도 다른 사람이라면 무서워서 움찔거렸을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송은채 회장조차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회장님 예전에는 방송과 신문만 통제하면 회장님께서 원하던 여론을 조성하실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온갖 동영상 사이트와 SNS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지금 회장님이 얼마나 곤란하신 상황인지 검찰 기자 기업인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식사를 날라주었던 호텔 직원들
까지도 알고 수군거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마치 떨어진 종이 하나 주워주는 것처럼 쉽사리 도와달라고 하시면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차명진 회장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 처음에는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젊은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일 정도였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그렇다고 성질대로 한 대 후려 팰 수도 없고 시원하게 욕을 퍼부을 수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영훈은 일부러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태생적으로 다혈질인 데다가 오만한 성격을 타고 났는데 만약 연희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저 성격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연희가 저만큼 성격이 나빠지지 않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렸을 때 동생의 일 때문에 집안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그녀의 성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도와줬다고 할까?
차명진 회장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그를 왕자처럼 키워줬을 테니 타고난 성격이 더 악화됐을 게 분명했다·
그를 일부러 무시하는 이유는 저런 오만한 성격의 사람은 약해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더 자신감이 생기고 더 강하게 나오기 때문이었다·
“허··· 송 회장님 사위 되는 사람 성격이 저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제 딸이 워낙 성격이 드세서 만나는 남자도 꼭 자기 같은 사람을 만났나 봐요· 불편하셨다면 미안해요· 하여간에 차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아들었어요·”
“·······”
“제가 임가(家)에 시집와서 명동에 자리 잡을 때 한번 도와주고 지금까지 돈 이야기 한번 꺼낸 적 없는 아이가 제 동생이었어요· 남들은 재벌가에 시집가서 흥청망청 돈 쓴다고 열 올릴 때 그 아이는 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기만의 세상을 꾸려갔었죠· 행여 나한테 피해 줄까
봐 명절 빼놓고는 연락 한번 하지 않던 녀석인데 조치연이라는 사람과는 그토록 가까운 사이였을 줄 몰랐네요·”
다시 분위기가 정상적(?)으로 가려고 하자 차명진 회장은 흥분한 마음을 억지로 다시 가라앉혔다·
그런데 그녀의 이어진 말에 그는 다시 한번 인상을 구겼다·
“그 녀석이 차 회장님한테 피해를 끼쳤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동생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동생이 조치연과 가까운 사이였고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난 동생의 판단을 믿어요·”
“방금 말씀하신 말은 저와 적이 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회장님은 참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적 아니면 아군· 지금까지는 가진 힘이 있기 때문에 편하셨겠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그런 생각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 거예요· 아 이건 충고는 아니에요· 그러니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
송은채 회장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했더니 피곤해지네요· 전 커피 한잔 하고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머지 이야기는 최영훈 상무와 하시면 될 것 같군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진짜로 방을 나가 버렸다·
이 황당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차명진 회장은 다시금 들리는 영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방금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저희 회장님은 조치연과 관련된 동생분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세영그룹과 척을 진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도 않으시고요·”
차명진 회장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영훈을 노려보았다·
그가 그러건 말건 영훈은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장부의 내용이 생각보다 많이 심각하더군요·”
차 회장은 크게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뉴스에 나온 장부의 내용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장부의 내용 전부를 아는 건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건 전부 조치연이 꾸며낸 이야기네·”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관심 없습니다· 우리 돈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남의 기업 경영진의 비리 여부는 상관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세영그룹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꾼다고 했을 때 국민들의 적대감이 우리를 향할 겁니다·”
“HS그룹이 우릴 도와준다고 국민들이 알 거라고 생각하나?”
“왜요? 송병창 사장님이 지금 조치연을 도와주고 있지만 만약 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일이 뒤집혔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해당 뉴스를 보도했던 KSC에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송 사장님과 HS그룹이 엮여 나올 게 뻔한데요?”
“억지를 부리고 있군·”
“억지는 제가 아니라 회장님이 부리고 계십니다· 게다가 어지간한 비리 장부도 아니고 정치인에 법조인까지 들어가 있다면서요?”
차명진 회장은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믿나?”
“제가 믿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국민들이 믿는지가 중요한 거겠죠· 그러니 지금 우리 회장님께서는 세영의 일에 나서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 이해하시죠·”
마치 송은채 회장과 자신은 생각이 다르다는 말투다·
지금까지 버릇없이 굴었던 건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걸 보면서 그 뻔뻔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럼 이야기 끝났군·”
영훈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이렇게 끝내도 되긴 하는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봅시다·”
“봅시다? 이거····”
“화내려고 여기에 오신 거 아니지 않습니까? 맞죠? 그럼 솔직하게 까놓고 대화해보죠· 우리 회장님에게 그저 송병창 사장이 조치연 사건에 손을 떼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오신 게 아니라 조치연을 엿 먹여 달라고 오신 거 아닙니까?”
“·······”
“그럴 것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편하게 나오셨으면 일이 쉽게 진행될 텐데 이리저리 빙빙 돌리시니까 대화가 서로 겉도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이 묘했다·
“뭐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쌍욕을 퍼부어도 모자랐는데 갑자기 내용이 기묘하게 변하자 차 회장의 어조도 변했다·
“송병창 사장님이 조치연이라는 사채업자 밑에서 오래도록 공부하고 배웠다고 합니다· 마치 선생님과 제자와 같은 관계라고 한다던데 그런 관계를 끊어놓으려고 하시면 그냥 말로만 해서 될까요?”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말에 차 회장은 도대체 저놈의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르고 뺨 때린다더니 말로 후려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 앞에서 긴장 하나 하지 않고 마치 보험을 팔러 온 영업사원처럼 거침없이 이야기를 해대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제가 듣기로 세영그룹은 방송이나 신문이 가장 유명하지만 진짜 돈 되는 건 부동산 사업이라고 하더군요·”
“하··· 그래서?”
“송병창 사장님이 요즘 조치연에게서 주차장 부지를 샀다고 합니다· 멀쩡한 땅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차장으로만 쓰고 있으니까 아까운 거겠죠· 조치연과 송병창 사장님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보이지만 결국 서로 간에 이익이 되는 관계인 거죠· 그럼 그 사이에
차 회장님이 들어가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음··· 세영이 종로에 오래된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설마 사직동 건물을 말하는 거냐?”
“아 사직동· 맞네요·”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세영그룹에 대해서 조사할 때 가지고 있는 부동산 내역을 뽑아온 게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알짜배기 건물이 바로 사직동에 있는 오래된 빌딩이었다·
현재 가치도 가치지만 이후 리모델링을 하거나 아예 재건축을 해서 높게 올리면 가치가 몇 배는 뛸 만한 건물이 그것이었다·
“하하하! 이거 진짜 미친놈이로구나? 너 그게 얼만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모릅니다·”
“몰라?”
“네 몰라요· 그런데 하나 또 궁금해지네요· 회장님의 몸값은 얼마나 합니까?”
차명진 회장은 젊은 놈의 배짱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자신 앞에서 저따위 협박을 하는 놈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빤히 바라보는 젊은 놈의 죽통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너 감당할 수 있는 말 하는 거냐?”
“아직도 20세기에서 사십니까?”
“·······”
“자 그럼 이해되셨다고 믿고 우리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조금 전에 한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였나?”
“송병창 사장 이야기였죠· 송 사장님이 사직동의 그 건물 정도 아니면 스승처럼 따랐던 사람을 배신할 것 같으십니까?”
차 회장은 이제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직동 그 허름한 건물 땅값이 얼만지 알아? 그거 5백억이 넘어·”
“그 정도면 되겠네요·”
“허··· 그래 어디 더 해봐·”
영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현진관광이 HS그룹의 식구가 돼서 HS관광이 되었습니다· 서울을 비롯해 국내외 5성급 호텔 상당수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조금 아쉬운 게 하나 있습니다· 휴양지 곳곳에 위치한 리조트가 없다는 거죠· 아무래도 호텔과 리조트는 쓰임새가 다르니까요·”
차명진 회장은 뒷목이 당기는지 고개를 뒤로 한참을 젖혔다가 물었다·
“너 지금 한경리조트 달라고 그러는 거냐?”
“국내 최고급 리조트 체인이 바로 한경리조트더군요· 예전부터 상당히 잘 만든 리조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미친놈··· 내가 그걸 송병창이도 아니고 널 왜 줘야 하는데?”
“옛날과 달리 요즘 세상은 만든 사람보다 유통하는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남겨야 좋은 기업이라는 소리를 듣더라고요· 회장님께서 중간에 이야기를 잘 해줘야 동생분이 말을 잘 듣지 않겠습니까·”
마치 굉장히 탐난다는 듯 말했지만 영훈은 리조트에는 그다지 관심 없었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뺏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탐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정도는 해줘야 조치연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것 같았고 추가로 이런 몹쓸 집안에게 약간의 벌이라도 내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리조트를 얻게 된다고 해도 HS그룹이 가질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송병창 사장이 가지게 되지 않을까?
아마 송병창 사장이 이 생각을 알게 되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게 분명했다·
“그 대가가 한경리조트다? 너 어디 모자란 거 아니냐?”
“하하하! 그렇게 보이실 수도 있겠네요· 사람의 관점이 다 다른 거니까 서로의 계산이 다르다고 한들 이해해야겠죠· 그럼 잘 알겠습니다· 지금처럼 언제나 저희 호텔 잘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허····”
차명진 회장은 조금의 밀고 당기기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영훈을 보며 차마 잡지도 못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영훈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의 차 회장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이런 개새끼가····”
홀로 남겨진 차명진 회장은 차마 물건을 부수지는 못하고 혼자서 소리를 지르다 문을 열고 밖을 향해 외쳤다·
“야 이 새끼야!”
“네 회장님!”
송지용 실장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후다닥 들어왔다·
“너 당장 저 최영훈 상무라는 놈 파악해서 알아오고 사직동에 있는 형석이한테 이야기해서 사직동 건물 넘길 거라고 말해·”
“예? 아니 그럼 형석 군이 굉장히 싫어하실····”
“지금 형석이 기분 걱정하게 생겼어? 이 새끼가 정신 못 차리고····”
“죄송합니다·”
차명진 회장은 씩씩거리며 그를 지나쳐 나가버렸다·
송지용 실장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정리한 다음 얼른 차 회장의 뒤를 따랐다·
< 헛발질(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