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헛발질(3) >
을지로에 위치한 HS물산 사옥·
기존 현진물산 사옥을 그대로 이어간데다가 기존 현진물산이 다른 대기업에 비해 그리 큰 기업이 아니다보니 건물의 외관 자체는 그리 멋들어지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올해 초에도 사옥을 사야 한다느니 기존 사옥을 리모델링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이 나왔지만 아직 회사가 계속 성장세에 있기에 괜히 샴페인을 먼저 터뜨리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까봐 아직 사옥에 관한 결정은 미뤄진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HS물산 사옥에 도착한 차형석의 표정에는 은근히 안도하는 빛이 어려있었다·
로비에서 직원들의 안내를 받은 송지용 실장이 건물 내부를 휘휘 살펴보는 형석에게 다가와 말했다·
“올라가시죠·”
“돈 좀 벌었다더니 뒷구멍으로 술술 흘리는 거 아니야? 영 볼품이 없네·”
“맞습니다· 저희가 작년 신사동에 올린 에이스 타워에 비하면 이건 쌍팔년도 수준이죠·”
“원래도 쌍팔년도 이전에 지었을걸? 아닌가? 하여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저기···”
“왜?”
“최영훈 기조실장이 저도 같이 보자고 합니다·”
“아저씨도 같이 불렀다고?”
“네·”
“왜? 아저씨 최영훈이라는 인간하고 뭐 있어?”
송지용은 바로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대화 한번 해본 적 없고 회장님이 전에 송은채 회장과 만날 때 스치듯이 지나가며 인사한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왜 아저씨까지 같이 보자고 해? 이거 날 무시하는 거 아니야?”
“네?”
“그렇잖아· 생각을 해보라고· 내가 어리니까 아저씨까지 같이 불러올려서 얘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면 뭐하러 아저씨까지 불러? 이건 날 무시하는 거지·”
“···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 홧김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어도 이 자리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됐어· 불렀으니까 올라가자고·”
차형석은 잠시 툴툴댔지만 안내 여직원이 입구를 통과시켜줄 때는 언제 기분 나빴냐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HS물산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에게 연락받고 6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희가 고개를 숙이며 안내한다·
흔히 볼 수 없는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형석은 느긋하게 뒤를 따르며 그녀의 몸매를 감상했다·
“여기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역시나 온화한 미소로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형석은 속으로 어디서 쇼를 하냐며 비웃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갑자기 무작정 찾아온다고 해서 미안합니다· 차형석이라고 합니다·”
“최영훈입니다·”
영훈은 그와 악수하고 송지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이분은··?”
“아 네· 송지용이라고 합니다·”
“비서실장이시라구요?”
“네·”
“반가워요· 그때 호텔에서 만나고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네요·그래서 인사라도 할까 해서 보자고 했습니다· 괜찮으시죠?”
“예 그럼요·”
“두 분 다 앉으시죠· 민희 씨 여기 차 좀 내주세요·”
민희가 차를 내올 때까지 영훈을 둘을 가만히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왜 자기와 만나자고 했는지 세영그룹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등등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그저 가만히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묘한 눈빛에 당황한 건 송지용 실장이었다·
이상하게도 영훈의 눈빛을 보면 괜히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형석은 기이한 정적에 어떻게 말을 꺼내야 자신에게 유리하게 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냥 입 닥치고 가만히 있었다면 몰라도 이렇게 직접 찾아온 이상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가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기에 어떡해서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영훈의 묘한 눈빛에 괜히 긴장만 더해갔다·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민희가 차를 내오자 영훈이 차를 가리키고 말했다·
“드세요· 우리 회사에 고승현 상무님이라고 계신데 스위스에 출장 갔다가 좋은 차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저한테 선물로 주셔서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마다 내드리고 있습니다·”
형석은 속으로 별 잡스러운 설명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영훈은 왜 왔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훈은 형석이 아닌 송지용의 얼굴을 빤히 보는 등 슬금슬금 형석의 속을 긁어댔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더 말려들 수 있다는 생각에 형석이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큼큼··· 다름 아니라 제가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전 너무 믿기지가 않아서···”
영훈은 그의 말이 길어지기도 전에 차단했다·
“아 사직동 건물 말이죠?”
“네·”
“그게 실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나 봐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럼 하지 마세요· 어차피 회장님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하시면서 다시 생각해본다고 하셨거든요· 전 사직동에 있는 그 건물 정도면 상당히 좋은 딜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다가 세영개발 실장님께서 이렇게 버선발로 달려나올 정도
로 놀라셨으면 굳이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려서 오히려 형석이 당황할 정도였다·
형석은 여기에 오는 내내 사직동 건물 대신 무엇을 주어야 이 거래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저 인간이 아예 딜을 엎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게 어떤 가치인데?
재건축만 하면 이후 천억은 우습게 넘어버릴 건물이 그 건물이다·
이걸 그냥 포기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
“네 제가 생각을 잘못 했네요· 회장님께 없던 일로 해달라고 말씀드려주세요·”
그제야 형석은 이 거래가 애초에 누구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다시금 자각했다·
사직동의 성원빌딩이 너무 아까워 절대 그냥 못 준다는 마음으로 온 건데 아버지를 감방에 보낼 각오까지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저기··· 그러지 말고 사직동 성원빌딩이 아니라 다른 걸 말씀하신다면 고려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아니요· 고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거북한 거래를 계속할 만큼 우리가 급한 상황도 아닌데 말이죠·”
은근히 미소를 띠면서 그렇게 말하니 형석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마 주변에서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단번에 눈치챌 거라 확신할 만큼 영훈의 표정은 노골적이었다·
당연히 형석은 분노하면서도 지금 상황을 다시금 돌아봤다·
침이 바짝 마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을 잘못했네요·”
“뭘 말입니까?”
“거래의 조건을 바꿔도 되는 줄 알았거든요·”
생각보다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더 놀리고 싶었는데 저렇게 잘못을 인정하니 놀릴 맛이 사라져 조금 아쉽긴 했다·
“맞아요· 이건 절대적으로 한쪽으로 기운 거래거든요· 뭐 그 빌딩이 실장님에게 아주 중요한 거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걸 지키기에는 조금 버거운 상황이 맞는 것 같습니다·”
“좋아요· 난 성원빌딩 대신 다른 걸 제시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시니 제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성원 빌딩 대신 준비한 재료라고 해봐야 백억은커녕 34십억 간신히 넘는 미술품으로 적당히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차마 그 생각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차형석 실장님에게는 이 거래를 취소하거나 진행시킬 권한이 없으십니다· 저와 차명진 회장님 간의 거래였거든요·”
“아··· 그럼 애초부터 제 말을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었단 말이죠?”
“귀담아 듣지 않을 거라는 것보다는 그냥 어떤 말을 하려나 궁금한 마음이었던 거죠· 꽤 흥미롭기는 했습니다·”
“하··· 이거 완전 날 가지고 놀았던 거군요? 재미있었습니까?”
영훈은 피식 웃다가 말했다·
“그것보다 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습니까?”
차형석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구요?”
“여기 송지용 실장님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어이가 없어도 정도가 있는 건데 지금 주인 불러다가 밖으로 쫓아내고 상놈이랑 대화하겠다는 말에 형석은 순간 욕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니···”
“송지용 실장이 있는 자리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간단히 용건만 말하고 내려보내려고 합니다· 싫으신가요?”
“아니···”
그럴 생각이면 진즉 말해줄 것이지···
사람 민망하게 만든다고 속으로 욕을 잔뜩 해주고 나서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금방 끝나죠?”
“네·”
“크흠···”
차형석이 잠시 회의실을 나가고 영훈과 송지용 실장 이렇게 둘만 남았다·
영훈은 자못 긴장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있는 송지용을 향해 물었다·
“살기 힘들죠?”
“네?”
“아니··· 한 성격하는 부자 뒤치다꺼리 하느라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아 네··· 그런데···?”
“그냥 고생하니까 인사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궁금한 게 하나 있기도 했고·”
“어떤 건데 그러십니까?”
“차명진 회장 밑에서 오래 일했으면 꽤 많이 배우셨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긴 합니다·”
“으음··· 차명진 회장님이 참 성격이 화통하시더라구요· 전 그날 회장님한테 한 대 얻어맞는 줄 알았다니까요?”
“···”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 전 그래요· 조금 더 말이 통하고 조금 더 인간적인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구요·”
“네? 그게 무슨 말인지···”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느닷없는 축객령에 송지용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나갔다·
거기서 더 자세히 물어보는 것도 이상했고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기다리던 차형석은 그에게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싶다가도 일단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다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영훈은 그가 자리에 앉은 후 입을 오물거리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사직동 성원빌딩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 방법이 있다구요?”
“네·”
“그 방법이 뭡니까?”
“말씀드릴 수는 있는데 실장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사실 난 선의로 말씀드리는 것인데도 오해를 하게 되면 무척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오해하지 않을 테니 말해보세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들어보니 차명진 회장님과 조치연과의 사이는 회복 불가능이라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보통 악연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형석은 조금 당황하는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뭐 그렇겠죠· 이제와서 그게 뭐 중요한가···”
“맞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회복이 불가능하고 그 악연의 골이 깊다는 게 중요할 뿐· 우리 쪽도 세영그룹만큼이나 검찰 내부 소식통이 밝습니다· 그리고 현재 검찰이 어떤 마음으로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마 차명진 회장님은 구속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지금 그거 막아달라고 성원빌딩을 준다 만다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걸 줘서 막는 게 과연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순간 형석이 움찔했다·
“뭐라구요?”
“이제 할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렇게 무작정 들이닥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영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석은 혼란스러워하다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영훈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알아들으셨잖아요 내가 한 말· 당신에게 진짜 그게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 잘 생각해보고 현명하게 행동하길 바랍니다· 그만 가보세요·”
영훈은 피식 웃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 헛발질(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