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가루(1) >
사직동의 성원빌딩으로 돌아오는 차 안·
본래 송지용에게 영훈과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형석은 어느새 그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지만 그는 최영훈 상무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던 성원빌딩 뿐만 아니라 아예 세영그룹 전체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떨려 손까지 떨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무섭기도 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고 자라면서 아버지의 그런 잔인함과 악독함을 배워왔다·
그렇기에 만약 아버지를 배신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닥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말초신경을 뒤흔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다 저 멀리 성원빌딩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저씨·”
“네?”
“아까 최영훈 상무랑 무슨 이야기했어요?”
송지용 실장은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제가 회장님을 모시는 걸 보면서 조금···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송은채 회장님 곁에서 일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 게 다였습니다·”
“뭐야? 그럼 우리 회사 나가는 거야?”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거절했습니다·”
“왜? 돈도 많이 준다고 했을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 저를 돌봐주신 은혜가 있는데 옮겨서야 되겠습니까·”
“뭘 은혜까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은혜가 맞긴 해· 우리 아버지가 건달이나 다름없는 아저씨를 비서실장으로 키워주면서 사람 만들어줬다던데?”
송지용 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저 돈 때문에 일하게 된 것을 누가 누구를 키워줬단 말인가?
어차피 건달생활 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더러운 짓 하고 다니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최영훈 상무를 만나기 전보다 더 짜증이 치미는 걸 느꼈다·
예전에도 이런 발언들을 들으면서 수시로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저 참으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는데 이상하게 마지막 최영훈 상무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럼요· 맞습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답변을 하면서도 핸들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중에 배신하는 거 아니야?”
송지용 실장은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농담이지·”
사실 배신이라는 말을 꺼낸 형석은 그 스스로가 말을 하면서도 괜히 찔렸다·
스스로가 아버지를 향한 배신을 생각하고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배신할 거 아니냐고 말을 꺼낸 거였는데 말을 꺼내고 나니 이상하게 배신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창밖으로 보이는 성원빌딩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예?”
“검찰이 아버지를 많이 곤란하게 해?”
“아무래도 증거가 된 장부가 많이 고약해서 대한민국 최고 법무법인과 손을 잡아도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검찰 내부에서도 이번 수사에 이빨을 꽉 물고 있다는 이야기도 계속 들리고 있구요· 그래서 회장님께서는 HS그룹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근원부터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HS물산 최영훈 상무가 아까 말헀던 것처럼 나서기 힘들다고 하잖아?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순간 송지용 실장은 차형석의 질문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냐니···
무조건 HS물산을 움직여 회장님이 구속되는 걸 막아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래서 방금 전에 HS물산 회의실에서도 성원빌딩을 다시 달라고 하러 갔다가 제대로 말도 못하고 면박만 당했던 그가 이제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니?
“글쎄요· 어떡해서든 HS물산의 최영훈 상무나 송은채 회장을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설득이 되면야 좋지· 그런데 설득 안 당하면 어쩌냐 이거야· 방금 나랑 최 상무 대화하는 거 못 들었어? 안 해주겠다잖아·”
“안에서 두 분끼리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무슨 말은? 송 회장이 마음 바꿨으니까 성원빌딩이고 나발이고 뭘 줘도 절대 안 먹힌다는 말이었지·”
“아 그렇습니까?”
송지용은 직감적으로 차형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는 몰랐다·
그저 둘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럼 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닙니다·”
“그나저나 별다른 아이디어는 없다는 거지?”
“예···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아저씨한테 뭘 바라겠어?”
형석은 송지용을 비웃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달거리는 그의 다리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흥분된 상태인지 알게 했다·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구속될 때까지 들키지 않고 적당히 넘길 수 있을까?
마침내 그는 결정했다·
성원 빌딩을 넘기겠다고·
그 대가로 아버지를 도와주지 말라고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
“형석이가 HS물산에 갔다고?”
차형석을 성원빌딩에 내려다주고 다시 돌아온 송지용은 바로 차명진 회장에게 보고했다·
차 회장은 아들이 HS물산에 직접 갔다니까 또 사고를 친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네 가서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와 성원빌딩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흥! 그 새끼도 그거 애비 생각은 못하고 건물 내준다니까 눈 돌아서 갔구만· 최영훈이가 뭐라고 해? 그놈 씨알도 안 먹힐 놈인데?”
한번 만나 봤지만 차명진 회장은 지금까지 그놈처럼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드는 놈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삼십 대 청년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조치연 정도 되는 오래된 연륜과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노련함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아직 성질만 있고 잔머리나 굴리는 아들 녀석이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진 않았던 거다·
역시나 송지용 실장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다른 수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송은채 회장이 성원빌딩을 거부하며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고 하는 바람에 도련님께서 화들짝 놀라 그대로 성원빌딩을 조건으로 거래를 계속 하자고 하셨습니다·”
“가서 망신만 당하고 왔구만· 이러니 내가 그룹을 맡길 수 있나· 똥인지 된장인지 아직도 몰라·”
“다른 일 때문이면 모르겠지만 하필 형석 군이 생일선물로 받았던 성원빌딩을 거래조건으로 하는 바람이 마음이 조급해져서 시야가 좁아졌던 게 아닐까 합니다·”
“억지로 편들어줄 거 없다·”
차명진 회장은 퍼팅연습을 끝내고 골프채를 던지듯 송지용에게 건내며 말했다·
“그런데 아들 놈 성질이 급하긴 해도 그 최영훈이라는 놈 그 놈 손 봐줘야 할 필요가 있어· 아 내가 알아오라고 한 건?”
송지용 실장은 수첩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작년 HS물산의 전신인 현진물산의 공채신입으로 입사했는데 이전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뭐? 작년에 공채신입으로 입사했다고? 그런데 지금 상무를 달고 있어? 송 회장 딸을 꼬셔서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자사 기자들이 작년에 HS쪽 관련 기사를 써보려고 했는데 HS그룹에서 극부 거부했다고 합니다· 사적인 이야기니까 쓰지 않았으면 한다고 해서 자사 신문사와 방송사에서도 더는 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단순히 여자를 잘 만났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 능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최영훈 기조실장의 능력에 관해서는 임직원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소문입니다· 대기업 직원들이 모인 익명 게시판에서도 그룹 내의 복지나 근무환경에 대한 불평불
만이 올라온 적은 있어도 최영훈 상무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들 혀를 내두른다고 합니다·”
차명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입사 1년차에 그런 능력을 보이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를 만나고 나니 어쩐지 그 설명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송은채 회장이 운이 좋네·”
“그래서 송 회장도 외부 행사에 나가면 사위 자랑이 대단하다는 소문입니다·”
“집안은?”
“알려진 게 없습니다· 학력도 그렇고 결혼식 때 부모님석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고아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한참을 고민하던 차명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고로 고아들은 말이야· 먹고 자고 사랑받는데 환장을 해· 셋 중 제대로 만족하면서 살아본 적이 없거든· 그 중에 우리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아마도 먹고 자는데 필요한 돈 아니겠습니까?”
“그래· 리조트가 크다고 하지만 회사가 가져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양양에 있는 리조트를 최영훈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아··· 한경리조트 전체가 아니라 한경리조트 양양만 개인에게 넘겨준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다 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하나 주는 것만으로도 속 쓰리지만···”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보통 이런 경우에 최영훈 상무같이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차 회장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렸다·
“흥··· 잘 알아둬라· 아무리 고아 출신이라고 해도 지금은 HS그룹 전체가 놈의 배경이야· 게다가 똑똑한 놈이고· 똑똑하고 배경이 든든한 놈은 무슨 수를 쓰든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 어떡해서든 놈을 구워 삶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오늘 아침에 입원했다고 하셔서 이틀만 내려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뭐? 어머니가? 에이 하필 이 상황에 진짜···”
“죄송합니다·”
“뭐 때문에 입원하셨는데?”
“머리를 잡고 쓰러지셨다고 해서 지금 검사중에 있다고 합니다·”
“시팔··· 개똥도 약에 쓰려고 하면 없다더니··· 너 갔다와서 배로 일해야 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나가봐·”
송지용은 고개를 숙이고 차 회장의 집무실을 나왔다·
*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아픈 허리와 무릎 때문에 한의원에 다니시긴 하지만 그 나이 대의 다른 어른들에 비해 정정하신 편이고 그제도 동네 주민들과 화투를 치셨다고 했다·
그 이틀 간 송지용은 서울 인근 모텔에 처박혀서 술만 마셨다·
근 20년을 모셔온 사람인데 아무리 개처럼 대했다고 하지만 배신하는 게 쉽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갔다·
그리고 최영훈 상무의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지금껏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험악한 얼굴과 커다란 덩치로 다들 무서워만 할 뿐 얼마나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사는 사람인지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최영훈 상무의 말이 그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모텔을 나왔다·
어두운 모텔에서 나와 뜨거운 햇볕을 받으니 마치 새로운 삶을 축하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택시를 잡고 종로로 향했다·
옛 피카디리 극장 앞에 내린 그는 그 뒤편으로 한참 걸어가 2층 짜리 오래된 건물 앞에 섰다·
1층엔 입정한지 최소 20년은 넘었을 것 같은 전파상과 악기상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는 악기상 옆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성큼성큼 이동했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철문엔 비밀번호와 지문인식까지 갖춰져 있었다·
삐비빅···
분명 다 쓰러져가는 것 같은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온도와 습기조절기능이 완벽히 갖춰진 공간에는 갖가지 미술품들이 모셔져 이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마 시내 한 가운데 이런 오래된 건물에 개당 수십억을 호가하는 고가의 미술품들을 숨겨놨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나 화재가 날까봐 허름해 보이는 이 안에 온갖 방화재와 안전장치를 해 놓았다·
굳이 이런 장소를 외부에 만든 이유는 혹시나 집에 세무조사나 검찰이 들이닥칠 걸 대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내 가까운 곳에 있어야 언제든지 이곳의 물건들 중 하나를 꺼내 유용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익숙하게 벽면에 밀착된 거대한 책상을 옆으로 밀었다·
책상이 옆으로 밀려나자 벽면에 숨겨져 있는 금고가 드러났다·
그는 금고의 숫자판에 손가락을 가져가다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그는 그 안에 있는 무기명 채권과 수북히 채워진 금덩이 상당수를 가져온 가방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내 그 안에 넣어놓고 문을 닫았다·
< 콩가루(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