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가루(2) >
영훈이 오랜만에 조치연을 만났다·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온 조치연은 인생의 마지막 할 일을 마친 것처럼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까지 띠는 걸 보면 마음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많이 풀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검찰 조사 때 힘들지 않았어요?”
“힘든 거 없었다· 김상철 검사가 힘을 받았는지 눈에 불을 켠 것 같아서 나도 덕분에 힘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검찰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분위기를 보니까 내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니었어·”
“가볍게 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래 김상철 검사뿐만 아니라 수사팀 전체에서 꼭 차명진 회장을 잡아넣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나중에 김상철 검사에게 알아보니 검찰 내부에도 복잡한 속내가 있더구나·”
“어떻게요?”
“서울대 출신인 검찰총장 라인 중에 장부에 이름이 올라간 검사가 몇 있다는 거야· 나야 그 검사가 어느 라인인지 알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조직 내 제1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었던 게지·”
“그것 참 공교로운 일이었군요·”
“그래· 인생 참 알 수 없구나· 내 지금까지 평생 검찰을 재벌의 개라고 욕하고 살아왔는데 죽을 때가 돼서야 도움을 받게 생겼어· 이 나이까지 살았어도 아직 세상을 잘 몰라· 그런데 그래서 네가 더 궁금하구나· 넌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인생 다 산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아누?”
영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들이 국영수 배우고 있을 때 전 사람을 배웠거든요· 그런데 국영수 배운 사람이 나보다 사람을 더 잘 알면 그건 불공평한 거 아닙니까?”
“그거 말 된다만··· 하여간에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영어도 잘 쓰시네·”
“늙은이는 영어도 모를 거라 생각하냐? 그건 그렇고 왜 왔어? 내가 찾지 않으면 발길 한번 없더니·”
“얼마 전에 차명진 회장이 우리 회장님을 찾아왔었습니다·”
“차명진이가? 그래서? 네 장모 혼자 만났냐?”
“아니요· 저랑 같이 만났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은은한 미소를 보이던 조치연은 사람이 달라진 듯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어떻더냐?”
“운명을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거 아시죠?”
“매정한 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여기 온 건 아닐 테니 꺼낼 수 있는 것만 얼른 꺼내 봐·”
영훈은 슬며시 미소 짓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쩌면 어르신도 아실만한 사실이죠· 성격이 포악하다든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든가···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그렇지· 내가 아니라 그놈 주변에 있는 사람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다·”
“다만 한 가지 조금 의외일 수 있는 건 외부에 보이는 포악함에 숨어있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네 은근 겁쟁이에다가 엄살이 심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조치연은 믿을 수 없었다·
“겁쟁이에다가 엄살이 심해? 그놈이?”
“내부의 나약함을 외부에서 잔인한 표현으로 숨기는 거죠·”
“뭐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세영개발이 가지고 있는 빌딩이 하나 있습니다· 사직동에 있는 건데····”
“성원빌딩?”
“아세요?”
“흥! 그거 원래 내 거였다· 하여튼 그래서?”
“좀 도와달라고 송병창 사장님을 움직여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길래 성원빌딩을 주면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허··· 그게 몇백억짜리인데 그걸 그냥 달라고 했다고? 놈이 그걸 줄 거라고 생각하냐?”
“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영훈을 보며 조치연은 자신이 뭔가 잘못 판단한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줄 거라고? 수백억짜리 빌딩을 고작 말 몇 마디 해주는 대가로 줄 놈이라고?”
“고작 말 몇 마디에 자신의 운명이 걸려 있으니까요· 지금 한번 찾아오고 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아마 굉장히 초조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다 검찰에서 소환장이라도 발부하면····”
“더 미치겠지·”
“맞습니다· 그럼 변호사랑 건물 매매 계약서 들고 찾아올 겁니다·”
“그럼 어쩌게? 진짜 도와줄 생각은 아니잖아?”
“빌딩으로 마음을 돌리는 건 제가 아닙니다· 송병창 사장이죠· 송병창 사장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어르신을 배신할 게 아닙니까?”
“아까 말 몇 마디로 빌딩 받는 게 당연한 거라며?”
“전 다른 걸 받기로 했습니다·”
“뭔데?”
“세영개발이 가진 자산 중에 가장 그럴듯한 게 한경리조트더라고요· 적당한 가격에 HS관광이 가져갈 수 있으면 호텔과 좋은 시너지가 날 것 같습니다·”
조치연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이어진 설명에 자신이 들은 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한경리조트? 도둑놈이 남몰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훔쳐도 기둥뿌리까지 뽑아가지는 않는다·”
“한경리조트가 세영개발의 기둥뿌리라고 하기에는··· 다른 것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조치연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듣고 나서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이놈아! 성원빌딩이 수백억 대면 한경리조트는 수천억 원이 넘는다· 돈으로 달라고 해도 고민을 할 텐데 그걸 그냥 달라고 한다고? 왜? 차명진이한테 그냥 전 재산을 달라고 하지 그러냐?”
“어차피 그냥은 못 주잖습니까· 회사 간의 거래니까 적당한 가격에 오고 가겠지요·”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구나· 그래서? 그걸 홀랑 먹으면 그때부터는 어쩌려고?”
“뭘 어쩝니까? 열심히 해봤는데 잘 안 됐다고 하면 되겠죠·”
영훈은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는 것인데 네놈은 정말 그 끝을 모르겠구나· 그런데 좋다· 아~주 좋아· 차명진이가 성원빌딩이랑 한경리조트를 날리고 감방에 들어가서 울고 있는 걸 상상하니 십 년 묵은 내 한이 씻겨 내려갈 것 같구나· 하하하하!”
조치연은 한동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예 눈물까지 찔끔 흘릴 정도로 웃어대기를 얼마나 했을까·
뱃가죽이 당긴다며 중얼대다가 눈물을 닦은 조치연이 말했다·
“고맙다·”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고마워· 아직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차명진이가 저리 궁지에 몰리게 해준 것도 고맙고 내가 검찰에 장부를 가져다준 게 헛일이 안 되게 해준 것도 고맙다· 마음 같아서는 내 재산 중 일부를 주고 싶은데 넌 받지 않겠지?”
“맞습니다· 재산은 더 이상 있어 봐야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제 처가가 재벌입니다· 게다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신흥재벌이죠· 10년만 지나면 대한민국에서 제 처가보다 돈이 더 많은 집안은 많지 않을 겁니다·”
“대단한 자신감인데 네가 말하니 그럴듯하구나· 그렇겠지· 네 능력이면 못할 게 없겠지· 내가 뭐 도와줘야 할 게 없냐?”
“검찰 조사 성실히 하시고 나중에 송병창 사장이 연기 좀 할 때 그럴듯하게 동조해주시면 됩니다·”
“병창이 그놈이 언제고 날 한번 엿 먹이려고 쇼를 할 거라는 말이지?”
“별다를 건 없을 겁니다· 아직 송 사장님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니까· 그저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그러마· 결국 병창이 그놈만 신났구나·”
“네 아마 굉장히 좋아할 겁니다·”
송병창 사장의 좋아하는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
세영개발 전략실장인 차형석은 며칠 전부터 직원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예전부터도 어느 순간에는 세상 그런 젠틀한 사람이 없었다가도 갑자기 눈이 돌면 미친놈이 되기 일쑤였던 그였는데 며칠 전부터는 언제 자신이 아수라 백작이었냐는 듯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직원들이야 차형석 실장이 저런 모습만 보여주니 좋을 수밖에·
그런데 차형석은 오늘 직원들에게 갑자기 세영개발 전략실을 본사가 있는 강남으로 옮긴다는 선언을 하고 이사 준비를 하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송지용 비서실장을 찾았다·
이틀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유로 잠시 모습을 감췄던 송지용 실장은 오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려면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송지용 실장임을 알고 있는 형석은 어머니가 입원했다는 병원을 수소문했다·
“송지용 실장님 어머니요? 편찮으시다는 말은 들었는데 입원하셨대요? 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비서실에 문의하니 직원이 곧바로 전화를 돌리며 알아보았다·
송지용 실장의 본가와 주변 대형병원에도 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송지용 실장과 가족에 대한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
그런데 문득 떠오른 건 아버지가 송 실장을 시켜 최영훈 상무를 죽이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결정적인 순간에 최영훈 상무의 도움이 없다면 아버지를 감옥에 넣을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형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설 용역업체 직원들을 불러 송지용 실장이 살고 있는 송파동 단독주택으로 쳐들어갔다·
쾅쾅쾅!
“실장님! 실장님!”
핸드폰도 안 되고 가족들 전화도 안 받는 상황에 떠오른 생각은 최영훈 상무가 벌써 죽은 게 아닐까라는 의심·
그는 문을 두드리면서 최영훈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전화를 안 받으면 당장 119에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전화를 거는데 신호가 세 번이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최영훈 상무님?”
[네 맞습니다· 차형석 실장님이시죠? 무슨 일로····]
“아··· 혹시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나요?”
[그런 일 없습니다·]
“그래요?”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하여튼 몸조심하세요·”
[무슨 일이신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형석은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온 용역업체 직원에게 말했다·
“안에 사람 없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불도 꺼져 있고··· 그런데 도망친 사람입니까? 그게 아니면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가는 경찰이 올 수도 있습니다·”
“도망친 건 아니지····”
맞다·
도망친 건 아닌데 사라졌다·
그건 곧 잠적했다는 말인데 왜?
송지용 실장이 잠적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사고라도 친 게 아니라면 잠적할 이유가····
“이런 씨발! 여기 몇 명만 남아서 잠복하고 있어· 나머지는 철수해· 그리고 송 실장 딸이 있는데 걔 학교 등교했는지 확인해봐· 어서!”
형석은 황당해하는 용역업체 직원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쾅 열고 들어선 형석은 정신없이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아버지!”
퍼팅 연습에 매진하고 있던 차명진 회장이 깜짝 놀랐다·
“웬 소란이야?”
“아버지··· 아버지 있잖아요····”
“뭔데?”
“송지용 실장이 사라졌어요·”
차 회장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난 또 뭐라고··· 송 실장 지방 내려갔어· 송 실장 모친이 병원에····”
차 회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형석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연락이 안 돼요! 송 실장 어머니가 입원했다는 병원이 어딘지 근방에 다 찾아봐도 없고 송 실장은 물론이고 가족 중 누구와도 연락이 안 돼요· 하다못해 송 실장 딸이 등교도 하지 않았대요!”
차명진 회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골프채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종로··· 종로로 가자·”
“종로요? 종로는 왜요?”
“가자면 가! 어서!”
차명진 회장은 운전기사는 필요 없다며 형석에게 운전대를 잡게 하고 주소를 불러주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운전하며 도착한 곳은 볼품없는 오래된 건물·
여기를 왜 오자고 했는지 형석이 갸웃거릴 때 차명진 회장은 주변을 살피곤 어둑한 계단으로 내려갔다·
삐빅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린 곳으로 따라간 형석은 내부 인테리어와 미술품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 이게 다 무슨····”
“뭐긴? 전부 우리 재산이지·”
차 회장의 대답에 형석의 눈에는 탐욕이 깃들었다·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한 차 회장은 정신없이 책상을 밀고 금고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금고 안이 텅 빈 모습을 보이자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미친 새끼····”
“아버지 안에 뭐가 들었었길래 그래요?”
“무기명 채권 현금다발 그리고 금괴· 못해도 수백억이 넘는 가치다·”
그 말에 형석 역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게 다 내 것인데····
저 안에 들었던 비자금이 다 내 것이었는데····
너무도 원통했는지 급기야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 콩가루(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