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가루(3) >
처음에는 억울하고 원통하다가 점차 분노가 차오르던 와중에 금고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USB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저건 뭐예요?”
“어?”
텅 빈 금고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용역업체를 시켜 뒤를 쫓아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하던 차명진 회장이 정신을 차렸다·
“저기 금고에 남은 거요· 이건 뭐예요?”
형석은 금고에 남아 있던 USB를 집어 들었다·
“몰라· 애초에 그런 건 금고에 없었다·”
“그럼 송지용 그 개새끼가 두고 간 거네요?”
“그럴 거다·”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해볼까요?”
“일단 들고 나와보자· 비밀번호 바꾸고 사람 불러서 이곳에 있는 모든 미술품을 양평에 있는 창고로 옮겨라·”
“알겠어요·”
차명진 회장은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너무 큰 충격에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주저앉아 있을 정도로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송지용에게 가장 치명적인 아픔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게 걱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형석이 분노하며 물었다·
“그 씨발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단 신고부터 하는 게····”
“신고하면? 그 건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지하실에 설치된 시설과 미술품들은? 그리고 금고 안에 든 무기명 채권과 현금 금괴를 어떻게 모으게 된 건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럼 저대로 도망가게 둘 거예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뭘 그냥 둬?”
“죄송해요· 저도 마음이 급해서····”
차 회장이 버럭 소리지르자 흥분했던 형석이 찔금 놀라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한번 화가 제대로 난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놈 식구들이 전부 연락이 안 된다고?”
“네·”
“사람 시켜서 언제부터 종적을 감췄는지 은밀히 알아봐라· 괜히 경거망동해서 경찰이나 기자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고·”
“알겠어요·”
“간 크게 비행기를 타고 갔다면 탑승자 기록이 남아있을 거야· 중국으로 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니까 중국이나 동남아 쪽으로 탑승자 기록 확인해라·”
“네·”
“비행기를 탔다는 건 금괴를 국내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뜻이고 만약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면 인천에서 중국으로 밀항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에 가서 우리 쪽 사람 동원하면 밀항에 손댔던 선주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놈들을 족쳐보면 송지용이를 밀항시킨 놈이 나올지도 모른
다·”
“알겠어요·”
“그리고 HS그룹 송은채 회장하고 시간 잡아라·”
형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지가 송 회장과의 만남을 추진하려는 이유야 뻔했다·
수백 수천억이 될지 모르는 재산을 강탈당했는데도 당장 힘을 쓸 수 없는 상황·
공권력을 동원해서 놈을 잡으려면 지금의 검찰 수사를 무력화해야 한다·
지금 잘못 움직였다가는 온 국민의 시선이 전부 세영이 도난당한 수백억이 넘는 무기명 채권과 금괴에 쏠릴 수 있다·
느긋하게 송은채 회장의 결단을 기다리려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형석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크게 대답했다·
“바로 잡을게요·”
형석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망간 송지용 실장부터 잡아야 할지 아니면 그건 뒤로 놔두고 아버지를 감옥에 넣는 일에 먼저 주력해야 할지 말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그 USB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한 순간 그는 혼이 달아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
“보고 있다····”
놀란 건 형석뿐만이 아니었다·
차명진 회장 역시 무기명 채권과 금괴가 사라졌을 때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 USB 안에는 하나의 동영상이 들어있었는데 경악스럽게도 형석과 차 회장이 누군가를 집 앞에서 폭행하는 영상이었다·
마지막에는 폭행당한 누군가를 집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는 것으로 영상은 종료되는데 두 부자는 이 동영상이 무얼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절대 외부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영상이었다·
특히 형석은 너무 놀라 손을 바르르 떨었다·
장부 문제야 아버지만 감옥에 들어가면 끝이지만 이 동영상이 외부에 유출되면 자신도 감옥을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 개새끼····”
형석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아버지 재산이고 뭐고 당장 이 새끼를 잡아야만 한다·
잡아서 앞으로 절대 입을 놀릴 수 없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잠도 쉽게 못 자리라는 걸 깨달았다·
*
차명진 회장은 당일 저녁 만남을 청했음에도 거절당하지 않고 만남이 성사된 것에 그나마 안도했다·
세영그룹 회장이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는 요즘 떠오르는 재벌인 HS그룹의 수장이다·
명함을 앞세울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홀로 나타난 최영훈을 보고 뭔가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꾸 호텔에서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용하고 사람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서요·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유로운 표정의 그에게 차 회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송은채 회장과 약속을 잡았는데? 자네와 만나고 싶은 게 아니야·”
“회장님은 바쁘십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가 회장님을 대신해 처리할 수 있도록 지시받았습니다· 제 말이 곧 회장님의 뜻임을 아신다면 제가 홀로 이 자리에 나온 게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아무리 지가 말하는 게 회장님의 뜻이라지만 나이가 많고 회장직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세상을 오래 겪지 못했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도 젊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본인과 직접 대화하지 못하고 고작 기획조정실 실장과 대화한다는 건 그의 체면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버럭 화를 내고 이 자리를 박차며 나가지 못했다·
지금 맞은 편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저 재수 없는 어린놈이 그의 멱살을 잡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송은채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더니 과연 그렇군·”
“총애라는 말은 과하십니다· 그나저나 급하게 찾아오신 건 회장님께서 결단을 내리셨다는 뜻 같은데요· 맞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결단은 송 회장이 내려야지·”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혹시 송 회장님이 검찰을 움직이면 그때 가서 건물과 리조트를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럼 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줄 거라고 생각했나? 자넨 우릴 바보로 아는군·”
영훈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회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기만 하고 회장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실 수도 있겠어요·”
이런 생각은 중고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생각인데 마치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말한다·
차 회장이 어이없어할 때 영훈이 말을 이었다·
“서로 간에 의견 차이가 있으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군요·”
싫으면 관두라는 식의 협박은 부자가 영훈에게 이미 당해보았던 방식이다·
그렇기에 부자는 또 저런 식이라며 인상을 썼다·
“그런 식의 협박은 한두 번은 통할지 몰라도 언젠가 크게 당할 날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회장님은 모든 걸 회장님 기준으로만 생각하시는군요·”
“뭐라고?”
“송병창 사장님은 우리 회장님의 동생분입니다· 그런 동생분 나이가 이미 쉰을 바라보고 계시고요· 그 나이의 동생 마음을 돌린다는 게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송병창 사장님은 회장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분의 마음을 돌리는데 그냥 몇 마디 말로 해
결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째서 우리 회장님이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 겁니까?”
“·······”
“이 이야기는 전에도 했던 이야기니 그만하겠습니다·”
“성원 빌딩 정도면 내가 먼저 양도해줄 수 있네· 안 그래도 직원들과 변호사 움직여서 양도계약서 준비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한경리조트야· 설마 그것까지 미리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군요· 그런데 한경리조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이렇게 나오긴가?”
“죄송합니다· 아드님에게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회장님께서는 이 일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올 빌딩도 아닌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죠?”
차명진 회장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중간에 빠질 데도 없는 꽉 막힌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아무것도 확실히 보장해주지 않는 일에 한경리조트를 던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타개책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에 사려는가?”
“3천억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허··· 3천억이라····”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1조를 불러도 고민할까 말까인데 3천억에 퉁 치자는 게 말인가?
“5천억에 하세·”
“5천억은 HS관광에서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 HS관광이 그동안 벌어들인 현금을 그룹에서 가져가지도 않고 모아두고 있는 걸 모르는 줄 아는가? 그걸로 또 적당한 호텔 사려고 했잖아?”
“적금 들어서 어렵사리 모아놓은 돈을 차 바꾼다고 다 써서야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4천억에 하시죠·”
“자네는 천억이 애 이름인 줄 아나?”
“4천억 이상은 어렵습니다·”
4천억이라는 금액 역시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잘 알겠네·”
결국 차명진 회장은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한경리조트를 4천억에 팔았다는 게 나중에 알려지면 한동안 바보천치 소리 좀 듣겠지만 그걸로 이 수사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뒤처리까지 할 수 있다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차형석은 달랐다·
한경리조트는 이제 곧 감옥에 가야 할 아버지의 것이 아니고 자신의 것이니까·
성원빌딩 정도야 충분히 줄 수 있다·
그 정도로 아버지를 감옥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할 만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경리조트를 4천억이라는 헐값에 넘겨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형석은 영훈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역시나 영훈은 차형석에게 묘한 눈빛을 보냈다·
서로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형석은 한경리조트를 주지 않을 것임을 피력했고 영훈은 잘 막아 보라는 대답을 했음을·
*
우명그룹 김태현 회장은 상당히 난감한 표정으로 거실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시뻘게진 얼굴로 노발대발 하고 있는 아내와 난감한 표정의 큰아들이 서 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호적에 넣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가 있어요?”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오랫동안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오랫동안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거네? 나한테 비밀로 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안 중요해요? 날 속였는데? 날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몇 년 동안 그렇게 혼자 비밀로 살았는데?”
“하아····”
김태현 회장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렵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막상 말을 꺼내놓자 상상 이상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어린 것이 기가 팍 죽어서 학교 다니는 사진을 봤을 때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무엇 하나 모자람 없이 자란 아들들에 비해 그 아이는 뭐 하나 만족스러운 거 없이 자랐을 거다·
머리로는 그냥 남몰래 지원해주고 없는 듯 살고 싶었고 그러려고 했지만 둘째의 말에 김태현 회장은 마음을 바꿨다·
내 아들 내가 키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절대 안 돼요!”
하지만 딱 한 명 아내는 그 누구에 포함되는 사람이었다·
아내의 결사반대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때 2층에 올라가 있던 창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애가 무슨 죄가 있어요· 그냥 호적에 올려요· 불쌍하잖아요·”
청천벽력 같은 말·
듣는 엄마는 배신감을 느꼈고뒤에 있던 도훈 역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아버지 편을 들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망설이고 있었다·
어떻게 편을 들어야 어머니의 마음이 덜 상할지 눈치를 보고 있는데 저렇게 대놓고 편을 들 줄이야·
“너 너···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엄마 마음은 알겠는데 애가 무슨 죄가 있어요? 아버지도 분명 잘못한 거 맞아요· 그런데 애는 잘못 없잖아요· 그리고 방금 들어보니까 엄마도 몇 년 전에 죽었다면서요?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 사는데 불쌍해요· 그냥 우리가 키워요·”
김태현 회장의 아내인 윤지숙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탁자에 있는 유리잔을 들어 계단에 있는 아들에게 던졌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박살이 나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창훈에게 지숙이 소리쳤다·
“너!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지숙은 둘째를 향했던 삿대질의 방향을 김태현 회장에게 돌렸다·
“당신도 나가! 당장!”
김태현 회장은 참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훈은 보았다·
울상으로 엄마 옆을 지나쳐 가는 창훈의 눈에 희열이 깃든 것을·
< 콩가루(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