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가루(5) >
차명진 회장이 세영개발 사장에게 내린 한경리조트 매각 지시는 그룹 내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세영개발이 가진 알짜배기 자산이자 매년 꾸준한 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한경리조트를 그것도 4천억이라는 헐값에 매각하라는 지시는 장복수 사장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였다·
“자네가 회장님에게 말 좀 해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결국 장복수 회장은 세영개발 전략실장이자 차명진 회장의 아들인 차형석을 붙들고 앉아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후··· 그러게나 말이에요·”
뻔히 무슨 사정으로 진행되는 것인지 알면서도 차형석은 답답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혹시 지금 검찰에서 회장님을 수사하는 것 때문에 그러나?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거랑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게 아니면 한경리조트를 이렇게 싸게 팔 리가 없잖아요· 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경리조트를 팔 수가 있어요? 그것도 4천억에?”
“내 말이 그 말 아닌가?”
“전 이해할 수 없어요· 1조를 줄 테니까 팔라고 애원해도 고민할까 말까 하는데 4천억에 판다? 이건 아버지가 분명 잘못 판단하신 일이에요·”
“아니 그렇다고 꼭 잘못이 있다기보다는····”
감히 회장님 뒷말을 하는데 여기서 같이 말려들면 큰일 날 수 있다는 걸 장복수 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발 빼려는데 형석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잘못한 거죠· 한경리조트가 어떤 곳이에요? 양양에 처음 리조트 만들 때 거기 지역구 정치인한테 온갖 로비해서 겨우 만든 데가 거기 아닙니까? 사장님이 그때 갖은 고생을 다 했다고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것뿐이에요? 리조트 하나 만들 때마다 거기 지역주민들이랑 얼마나 마찰이 많았어요? 땅 살 때마다 파네 못 파네 하면서 말뚝 박은 지역주민이랑 용역 불러서 싸우고··· 민원 들어왔다고 싸우고···· 제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사장님 얼마나 하소연하셨어요? 제가 그걸 모르면 사람
이 아니죠·”
“사업을 하다 보면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리조트를 올리나 아파트를 올리나 개발을 하게 되면 지역 주민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거지·”
“제가 우리 사장님 그 고생하면서 한경리조트 키운 거 다 압니다· 그런데 그걸 4천억에 홀랑 넘기겠다는 건 아버지가 사장님 알기를 개떡으로 아는 거 아니냐고요!”
“저기 흥분하지 말고····”
“제가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우리 한경리조트를 4천억에 판다는데 흥분 안 하게 생겼냐고요!”
장복수 사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들은 아버지 흉도 볼 수 있고 욕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부하직원은 그랬다간 바로 모가지다·
그런데 이번 사안만큼은 형석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형석의 장단에 따라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장님 편을 들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뭘 어떻게 해요?”
“그래서는 안 된다며? 그럼 회장님을 설득해야지·”
“이미 해봤어요·”
“그랬어? 그랬더니?”
“저한테도 정확한 말씀을 안 해주세요· 분명 이번 검찰 수사랑 관련이 있으신 게 틀림없으신 것 같아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넘길 수밖에·”
“허····”
장복수 사장은 허탈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차형석 실장 말마따나 그게 어떻게 키운 리조트인가?
대한민국 최고의 리조트로 키워보겠다고 해외에서 건축가 조경업자 5성급 호텔 총지배인 등 수많은 인력을 직접 검토하고 채용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런 노력이 제값도 못받고 고작 4천억이라는 헐값에 팔린다는 건 젊은 시절의 고생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도 참···· 그러게 공무원 정치인 또 누구야? 별의별 사람들 그렇게 후원해서 뭘 얻겠다고 그러셨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도 없고 지금에 와서 그 사람들이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 때 도와주기나 한 대요?”
“지금은 궁지에 몰렸잖니·”
“궁지에 몰렸을 때 도와달라고 그 돈 갖다 바친 거 아니냐고요· 그런데 보세요 누구 하나 아버지 돕겠다고 나서는 정치인이 있나·”
지금 이 상황에 세영그룹 회장을 돕겠다고 나서면 그 순간 자신의 이름이 장부에 올라가 있다고 광고하는 꼴인데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못 나서는 게 당연한 것인데도 막상 형석이 이렇게 짚고 나오자 장복수 사장 역시 차명진 회장의 그런 후원이 전부 부질없어 보였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아버지 잘못으로 회사 재산이 거덜 나게 생겼어요·”
“거덜이라니? 그래도 말이 심한 거 아니냐?”
“만약 한경리조트가 끝이 아니라면요?”
“뭐? 설마··· 설마 그러겠어?”
“사장님은 언제 우리 한경리조트가 4천억이라는 똥값에 팔릴 거라고 예상이나 하셨어요?”
“그건 그렇다만····”
“성원빌딩도 매각하는 거 들으셨죠?”
“·······”
“만약 한경리조트가 끝이 아니라 세영 CC 테헤란로에 있는 원일타워 그리고 커피체인점인 드림카페까지 넘긴다고 하면 그때는요?”
“꼭 그렇게까지 비약해야만 할 이유가 있어?”
“검찰 쪽 수사 의지가 생각보다 강력해요·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재판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고 하고요· 일단 재판에 서면 최소 5년 이상은 나올 거라고 보고 있어요·”
“태양에서 그렇게 말하니?”
법무법인 태양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 만큼 유능한 곳으로 차명진 회장이 이번 수사에 변호사로 선임한 곳이다·
그리고 당연히 태양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네 아주 어려울 거라고 했어요·”
장복수 사장은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 이제 어떡할 생각이냐?”
“어쩌긴요? 아버지 말대로 리조트 넘기고 또 넘겨야 할 게 있으면 넘기는 걸 그냥 두 눈 뜨고 지켜봐야죠·”
“허허····”
“하아··· 아버지의 욕심 하나 때문에 회사가 무너지는 꼴을 봐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네요·”
“·······”
형석은 슬쩍 장복수 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서 그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장복수 사장은 넘어왔다·
아마 아버지가 감옥에 간다고 해도 애써 구원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며 검찰에서 압수수색 영장이 들어오면 기를 쓰고 막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미래 아내 될 사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는 일만 남았다·
*
세영개발이 가지고 있는 이천에 위치한 세영 CC·
계속 집 안에 있어봤자 답답하기만 하니 바람이나 쐬어 보려는 생각에 오랜만에 필드에 나온 차명진 회장은 힘차게 드라이버를 휘두른 뒤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이스 샷!”
“오늘 공이 좀 맞네·”
“실력이 더 느신 것 같습니다· 쉬시면서 골프 연습만 하신 거 아닙니까?”
“요즘 내 상황 뻔히 알잖아· 골치 아파서 골프채 한번 마음 편히 잡아본 적 없다고·”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잘 하시는데요?”
“운이 좋은가?”
“수사가 잘 마무리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하!”
“하하 그랬으면 좋겠구만·”
차명진 회장은 캐디에게 골프채를 넘기며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딱 봐도 이 땡볕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다가오는 것이 누가봐도 골프 치려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차명진 회장은 뭔가 느낌이 싸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일단의 무리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가장 앞에서 어깨를 딱 펴고 당당히 걸어오는 이는 이미 사진으로 수차례 보았던 김상철 검사였기 때문이다·
“검찰입니다· 차명진 회장님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대답하며 저 멀리 보니 자신의 경호원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속으로 멍청한 놈들이라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연락이 잘 안 되시던데 여기 계셨군요·”
“글쎄요 난 잘 몰랐는데·”
“그럴 수도 있겠죠· 어쨌든 만났으니 다행입니다· 회장님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여기 영장입니다·”
김상철 검사가 품에서 영장판사의 기명이 날인된 영장을 들이밀며 씨익 미소지었다·
차명진 회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장갑을 벗어 막 헐레벌떡 달려온 경호원의 얼굴에 툭 던지고 말했다·
“갑시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차명진 회장을 체포하는 순간 김상철 검사는 등허리를 타고 짜릿한 쾌감이 지나가는 걸 느꼈다·
*
차명진 회장의 체포영장이 떨어졌다는 기사가 뜨고 얼마 후 차 회장이 골프장에서 기습 체포됐다는 뉴스가 포털에 도배됐다·
그리고 뉴스가 뜨고 나서 5분도 채 되지 않아 한주연이 형석을 찾아왔다·
“뉴스 봤죠?”
“네 주연 씨네 집에서 힘을 쓴 거예요?”
“검찰은 우리가 손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지가 확고했어요· 다만 영장판사가 영장을 기각할지도 모른다는 게 한가지 걱정이었는데 마침 우리 회사 법무팀 고문님이 대법관 출신이라고 했잖아요? 그분이 힘을 써주셨어요· 그래서 한 번에 영장이 통과된 거예요·”
형석은 한주연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녀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제 아버지를 구속하는데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생했다니····
주연은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한 일인데도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고마워요·”
“일단 체포는 됐고 검찰 분위기는 어때요?”
“영장 통과된 걸로 내부에서는 거의 다 됐다는 분위기예요· 증거가 너무 강력해서 이후 범죄 입증이 쉽다고 해요· 차 회장님이 구속되면서 이후 장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계속 소환조사 될 예정이고 수사는 급물살을 탈 거라고 했어요·”
“그럼 아버지가 쉽게 나올 수 없겠네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은데··· 법무법인 태양에서 보석으로 빼내기 위해 힘을 쓸 거예요·”
“보석도 돈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렇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형석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일단 세영그룹이 가진 재산으로 보석을 요청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가진 재산으로 보석을 요청해야 하는데 그 재산을 손에 꽉 쥐고 있을 사람이 자신이다·
“네 알겠어요·”
누가 보면 천하의 원수를 감옥에 집어넣는 분위기지만 주연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걸 따지기에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언론재벌이 화려한 유혹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명그룹 적자에 허덕이는 현진중공업의 구원투수로 나설까?]
영훈은 포털에 뜬 기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확신을 가지고 김창훈 상무를 설득한 건 아니었다·
그가 대단한 언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회사 내에서 그의 입지가 대단한 측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그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건 현진중공업을 살리기 위한 다른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저대로 회사가 더욱 안 좋은 상황으로 간다면 아마 송은채 회장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에게 남은 한가지 미련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니 이제 마음 한구석에 있던 찝찝함이 사라졌다·
오늘 차명진 회장에 대한 체포영장 기사는 너무 당연한 거라 영훈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상무님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민희가 들어와 말했다·
“알겠어요· 출발해요·”
영훈은 옷을 챙겨입고 자신의 사무실을 나섰다·
민희와 같은 차를 타고 움직인 영훈 일행은 남산에 위치한 하야트 호텔에 도착했다·
약속한 장소는 호텔 내의 한식 레스토랑·
“왔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이형준 상무가 자못 긴장한 얼굴로 영훈을 반겼다·
“네· 와 있어요?”
“아직····”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티나냐?”
“네· 앉아요·”
영훈이 먼저 자리에 앉자 이형준 상무가 옆자리에 앉았다·
민희는 영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고 나갔다·
“상황이 어때요?”
영훈이 묻자 형준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없어· 아버지랑 작은아버지 둘다 서로에게 펀치를 날려대고 있는데 타격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둘 다 실효타를 못 내고 있지· 그나마 좋은 건 작은아버지가 하도 아버지에게 날을 세우니까 나에 대한 주목도가 조금 내려간 것 같아·”
“그래도 회사가 조용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 말도 마· 서로 누구 줄을 타네 마네 하면서 업무처리가 제대로 되질 않아· 다른 라인이라고 판단되면 무슨 프로젝트를 하든 전부 견제하고 보거든· 금융업이라 업무가 많이 보수적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IT기업이 이랬으면 아이고····”
형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녀였는데 살포시 미소를 짓고는 영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이케 유리코예요·”
“HS물산 최영훈입니다·”
“반갑군요·”
그녀는 신영금융 사외이사 중 한 명이자 로얄메이저의 상속녀인 고이케 유리코였다·
< 콩가루(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