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력자(4) >
조치연은 전화를 끊은 영훈에게 말했다·
“그 녀석이 한경리조트를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하냐?”
“그럴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영훈을 보고 조치연이 시선을 멀리 옮겼다·
하야트호텔 외부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참 아름다웠다·
“어릴 때는 영특한 놈이었다· 욕심이 많기는 했어도 할애비를 만날 땐 나 좋아하는 조청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지 애미에게 꼭 이야기를 하던 놈이었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지금도 알지 못하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만···”
“맞습니다· 시간은 뒤로 돌릴 수 없으니 안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겠죠·”
“한경리조트를 준다고 하면 이 다음은 어찌할 테냐?”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말하면 그대로 따라줄 것이기는 하고?”
영훈은 잠시 숨을 내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죽을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였고 또 돌아가신 어머니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점차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조치연의 인생에 자꾸 관여하게 된다·
그의 아픔을 잘 알고 그의 복수심이 이해가 갔기에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적정선 이상 관여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이건 조치연에 관한 일이니까·
“우리가 할 수 있고 이익이 된다면요·”
“이익이야 당연히 되겠지· 한경리조트만 해도 시장가치가 1조를 넘었었다· 그걸 그 헐값에 인수할 수 있으니 이익 아니겠냐?”
“글쎄요·”
“왜?”
“전 세영그룹 자산을 우리 회사에 편입시키는 게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경리조트까지 송병창 사장님이 가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병적이다· 결벽증이야· 돈에 선악을 부여하지 마라· 돈을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돈에는 선악이 없어·”
“자고로 돈이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마음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저열함과 과시욕을 끌어올리는 게 돈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없으면 필요 이상의 돈은 화를 불러오게 되죠· 특히나 공짜로 얻은 돈이라면 더욱···”
“이상하구나· 넌 항상 자신감에 넘쳐 있는데 유독 돈 앞에서는 경계심이 강해· 돈에 잡혀먹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구나·”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한경리조트를 헐값에 가진다는 게 좋으면서도 너무 쉽게 얻어서 불안한 겁니다·”
“흥! 아직 형석이 그놈이 너한테 준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욕심 많은 놈이 지 애비 재산을 조금이라도 빨리 뺏고 싶어서 감옥까지 보내는 놈인데 주지도 않은 한경리조트를 네 손에 가진 것처럼 말하는구나?”
“영감님 운전 할 줄 아시죠?”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조치연이 미간을 찌푸린다·
“또 선문답이냐? 하여간 중놈 출신 아니랄까봐 선문답 참 좋아하는구나·”
“선문답은 아닙니다· 그냥 운전을 하다 다시금 깨달은 겁니다·”
“그래? 어디 늘어나 봐라·”
“처음에 멈춰 있는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큰 힘이 필요해서 저단으로 기어를 놓지요· 그러다 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기어가 고단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꼭 이와 같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어지간한 유혹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소 생각했던 것이 아
닐 때는 더욱 그렇지요·”
“···”
“그런데 한번 그 유혹에 설득당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남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처음 그를 유혹했던 힘이 줄어들어도 사람은 오히려 더 탄력을 받아서 욕심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속도는 더욱 빨라지죠·”
“그럼 지금 형석이는 이미 스스로 움직이는 상황이라 멈출 수 없다는 말이구나?”
“속도가 빠를수록 브레이크에 더 많은 힘이 가해져야 차가 설 수 있습니다· 차형석의 자제력은 지금 그를 멈추기엔 많이 부족하죠· 이미 그의 머릿속엔 아버지 없이 세영그룹의 회장이 되어 황제처럼 사는 그림이 꽉 차 있을 겁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아마 한경리조트보다 더한 것도
걸 수 있을 겁니다·”
조치연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우리 희주도 그렇게 된 것이냐?”
“아마도 그럴 겁니다·”
짧은 문답이었지만 조치연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곤 고개를 숙였다·
잠시 눈물을 찍어낸 그가 말했다·
“한경리조트보다 더한 것도 걸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네·”
“내 이미 검찰에서 차명진이에게 말했다· 검찰에 처박혀서 회사가 산산조각 나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볼 것이라고· 신문과 방송이야 정치권이 건들지 않으면 손도 못대는 것이지만 세영그룹의 핵심 자산은 세영개발이다· 난 그게 무너지는 걸 원한다·”
“흐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겠습니다·”
“고맙구나·”
“고마워 하실 건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부스러기를 주워담는 것만으로도 회사에 많이 도움이 될 테니까요·”
“네 결벽증 때문에 많이 가지고 갈 수 있겠어?”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흐흐··· 내가 예전에 내 딸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가난하다는 이유로 떼어놓았다는 말을 한 적 있었지?”
“네·”
“그 친구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만났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친구가 말해주더구나· 자기가 당시 그 친구였다고· 나더러 지독히 가난했던 그 때 세상의 냉혹함을 알려준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연화신녀였다·”
뜬금없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 영훈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인연이란 알 수가 없는 것이군요·”
“그래· 나에게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채업을 끊으라고 말 한 뒤에 그 이야기를 하니··· 만약 다른 점쟁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게 제대로 된 점인지 아니면 옛 감정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헷갈렸을 게야·”
“점괘는 믿으셨군요·”
“맞아· 연화신녀에게서 풍기는 그 묘한 분위기··· 지금의 자네를 꼭 닮았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재산의 절반이라니··· 뭐 내 실수였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니고 당시 연화신녀를 이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
런다·”
“무슨···?”
“너를 만나고 난 뒤에 혹시나 해서 연화신녀를 한번 찾아보았다· 이미 죽었더구나· 그리고 그녀 옆을 항상 따라다니던 명우도사라는 양반이 점집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연화신녀의 당시 점괘가 하도 마음에 걸려서 내가 몇 번 직접 움직여 찾아갔었다· 두 번인가 그랬지· 별 건 없었다· 점괘는 두 번다 똑같았고 그 흔한 부적 쓰라는 소리 한번 없었다· 부적으로는 막을 수 없다던가? 하지만 난 알았다· 옆을 항상 지키고 있던 명우도사
는 부적이나 굿을 하라고 눈빛으로 계속 채근하더구나· 그런데도 끝끝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었지·”
“그랬군요·”
“그래서 한 번 명우도사가 자리를 비웠을 때 물었다· 명우도사라는 저 인간하고 같이 있으면 사이비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따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야·”
그냥 옛날에 어땠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끝낼 줄 알았는데 제법 깊은 이야기가 나오자 영훈도 깊이 빠져들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욕심은 많지만 천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에게만 저러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물었지· 둘이 안 맞을 것 같다고· 그런데 좋다고 하더구나· 내 나이까지 살아보면 진짜로 좋은지 겉으로만 좋다고 하는 건지 얼굴에 보인다· 그런데 연화신녀는 진
심으로 그 명우도사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인가요?”
“그래· 웃기지· 내 딸의 위험은 모르고 남의 여자 잘 사는지 궁금해 했다니 늙은이의 주책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그런데 당시에는 진짜 궁금했단다·”
“좋아하셨군요···”
“그러면서 말하더구나· 자기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를 감당하지도 못할 것인데 그래도 신병을 다스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지지고 볶고 사람답게 살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했다·”
“···”
“널 만나고 나서 말해줄까 하다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았었다· 그런데 언제고 한번은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별 쓸데없는 이야기였으면 잊어버리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경치가 좋으니 난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가겠다· 넌 바쁠 테니 먼저 일어나거라·”
“예 그럼···”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렛요원에게 주차티켓을 내밀었다·
조치연의 말처럼 별 이야기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가벼워졌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행하지 않게 살았다는 걸 들으니 그냥 고맙고 더 그리워졌다·
영훈은 괜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누가 볼까 싶어 얼른 차에 올라타 도망치듯 차를 출발시켰다·
*
회사로 돌아온 영훈에게 민희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전해주었다·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영훈이 곧바로 내려가자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는 차형석이 벌떡 일어난다·
“바쁘시군요· 약속 없이 찾아온 제 잘못이지만요·”
“앉으세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조금 기다린 거야 문제될 게 아니고··· 솔직히 아까 많이 당황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겁니까?”
영훈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말했다·
“날씨가 좋아요·”
“네?”
“우리 날씨 좋은데 서로 빙빙 돌리면서 간 보지 맙시다·”
날씨가 좋은 것과 빙빙 돌리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형석은 일단 영훈의 그런 태도에 마음을 굳혔다·
“그럽시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십니까?”
“한경리조트· 그리고 세영 C·C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형석은 충격적인 영훈의 제안에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장난하세요? 1조를 준다고 해도 고민할 리조트를 헐값에 가져가겠다면서 거기에 골프장까지 얹어 달라구요? 우리를 껍질 채 날로 먹겠다는 겁니까?”
“이봐요 차형석 씨· 난 신의가 없는 사람하고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한경리조트는 원래 우리에게 넘어와야 할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마음을 바꾼 건 당신입니다·”
“내가 무슨 마음을 바꿨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계약일자를 마음대로 바꾸시면 안 되죠· 그것 때문에 HS관광 관계자가 절 얼마나 바보 취급했는지 아십니까?”
당연히 거짓말이다·
감히 그룹 회장의 사위인데다가 최고 권력자나 다름없는 영훈을 바보 취급할 임직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그건···”
“합당한 이유도 없이 무작정 계약 일자와 거래조건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한 당신 때문에 HS관광은 한경리조트 인수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경리조트를 넘긴다고 하면 우리가 ‘예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하면서 받아야 하는 겁니까?”
사실 한경리조트를 4천억에 인수할 수 있다면 마음을 바꿔준 것에 감사하고 세영개발이 있는 방향으로 백팔 배를 해도 모자르긴 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손해 보는 거래를 억지로 하는 듯한 영훈의 뻔뻔함에 형석은 어이가 없어 뭐라 항변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아니···”
“싫다면 어쩔 수 없구요· 저도 다시 회장님을 설득하려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회장님은 자꾸 이 일로 저와 대화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계세요·”
“···”
“이미 결정난 일을 되돌리려면 그 만한 근거가 필요해요·”
“그게 골프장이라는 겁니까?”
“솔직히 골프장 하나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골프장이라는 미끼가 있으니까 회장님께 다시 한번 밀어볼 수라도 있다는 거죠·”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아···”
차형석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젖히고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박찬열 변호사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바뀌었다는 걸·
아버지가 나오면 박 변호사의 의견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알려줄 거요?”
“네· 정확한 건 아니고 전해 들어서 아는 거긴 한데 검찰에서는 장부가 워낙 강력한 증거라서 구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뇌물혐의 하나만 가지고는 구속 연장을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뭔가 하나 결정적인 게 더 있지 않으면 법원에서 구속 연장을 하지 않을 거라나? 뭐 저는 법적인 부분은 잘 몰라서 하여튼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
“그냥 알아두시라구요· 우리가 도와준다고 해도 차명진 회장 구속이 풀릴 수도 있다는 거· 그리고 HS관광에서 세영개발에 다시 연락할 겁니다· 그때는 전처럼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영훈은 살짝 고개를 숙였지만 형석은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구속을 연장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무언가···
< 조력자(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