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독식(2) >
[대표이사 선임안 통과]
형준은 김재준 교수에게서 온 문자에 주먹을 쥐고 몸부림을 치며 환호했다·
“아아앗~싸!”
이렇게 되려고 지금까지 죽을 둥 살 둥 노력했지만 그래도 행여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최영훈 상무도 도와주고 곁을 지켜주는 민희도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는데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던 거다·
회사 안에 있어서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하지만 밖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그 짧은 순간 터져 나온 환호성을 못 들었을 리 없다·
게다가 오늘 이사회가 소집됐다는 걸 모르는 임직원은 없었다·
당연히 이사회 결과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그들이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판가름 날 거라는 걸 알기에 쥐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던 차·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다 터져 나온 환호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똑똑····
문이 열리고 머리를 빼꼼 내미는 이는 브랜드전략팀 손원주 상무였다·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벌써 상무를 단 그는 그룹 내에서 상당히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사실 능력보다는 입사 후 신기막측한 줄타기로 초고속 승진을 이끈 처신이 더 칭송받았다·
“어? 상무님?”
“아이고··· 계셨군요·”
“아 네····”
형준은 자신이 소리를 지른 게 밖으로 들렸나 떠올리고는 표정을 관리하는데 손원주 상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신영은행 직장인 대출 연계 상품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 회식이 잡혔는데 상무님도 같이 참석하실 수 있는지 해서요· 어려우시면 괜찮습니다만····”
“아닙니다· 좋아요·”
이세준 부회장과의 트러블이 외부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이후 그 어느 부서에서도 형준을 회식에 초대한다든가 식사를 같이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회장 쪽 사람이면 당연히 바로 앞을 지나감에도 남의 집 개 보듯 무시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행여 무슨 안 좋은 파편이 튈까 봐 거기를 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영훈이나 친구들과 같이 술을 하는 자리가 아니면 회사 사람들 특히 과장급 이하 직원들과 회식을 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이가 있는 것만 해도 반가운데 젊은 직원들과 함께 회식을 하자고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 형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하히! 직원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오늘 저녁인가요?”
“네· 시간이랑 장소는 비서에게 남겨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가 나간 직후 또 누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상무님 축하드립니다~”
놀랍게도 경영지원본부 유지헌 본부장이었다·
다른 임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형준에게 거리를 두고 멀리서 살포시 눈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제법 담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특유의 눈웃음이 가미된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그제야 브랜드전략팀 손원주 상무가 갑자기 회식을 하자며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떠올렸어야 하는 생각이지만 너무 기쁘고 정신이 없어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자신에게 줄을 대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니 진짜 이번 싸움의 승자가 누구인지 실감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준은 요새 민희에게 누누이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절대 교만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
특히 최영훈 상무의 예를 들며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했고 어떻게 말했는지 하나하나 브리핑을 해댔었다·
귀에 인이 박일 지경에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형준은 놀랍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민희의 잔소리는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그녀가 다른 여자보다 예뻐서도 아니었고 기분 나쁘지 않게 잘 돌려 이야기해서도 아니었다·
딱 하나 민희는 형준도 인정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여자였으니까·
나한테 잔소리해도 될 만한 여자라는 무의식중의 생각이 그녀의 잔소리를 조언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저도 방금 알았는데 정보가 빠르시네요?”
“오늘 이사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제 대표이사로 취임하시면 여길 떠나시게 될 텐데 아쉽습니다· 아시다시피 한낱 계약직인지라 윗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서 그동안 대표이사님께 제대로 대접 한번 못 한 것 같습니다·”
말이 길었지만 형준은 결국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본 척 만척했던 원인을 이세준 부회장에게 돌리면서 앞으로 충성을 다하고 싶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좋았다·
노골적이지만 어쨌든 유지헌 본부장은 능력 있는 사람인 데다가 주변 평판이 좋아 지금까지 어디 가서 실수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다음 정기인사나 늦으면 그다음 정기인사 때는 전무급 승진이 확실시 되고 있는 사람이라 그의 이런 접근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저도 아버지가 무서웠는데 당연합니다· 언제 시간 나면 식사라도 같이 해요·”
시원하게 웃으며 말하는 형준을 보며 마음이 놓였는지 유지헌 본부장이 그윽한 미소를 짓는다·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시간 한번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대표이사 선출 축하드립니다·”
“직접 찾아와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바깥이 스치듯 보였는데 마치 잘나가는 맛집 앞에 손님들이 대기하는 것처럼 임원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
“이게 뭐야! 당신 일 똑바로 처리하는 거 맞아?”
검찰에 구속된 차명진 회장을 찾아온 박찬열 변호사는 금방이라도 귀싸대기를 한 대 후려칠 듯한 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곤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서며 항변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와 이야기했던 내용과 다릅니다· 분명 최영훈 상무는 한경리조트를 조건에 포함 시키지 않고 선의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 혼자 들은 내용이 아니라 차형석 실장과 같이 들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차명진 회장은 박 변호사의 핸드폰을 탁자에 툭 던졌다·
[한경리조트 HS관광에 매각되나?]
[HS관광의 전략팀이 한경리조트 인수를 위해 움직였다는 내용을 본지에서 확인했다· 현진관광에서 HS관광으로 상호를 변경하며 HS그룹으로 편입된 이 거대한 호텔 체인은 세영개발과 한경리조트의 가격협상을 위해 다각도로 리조트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현재 HS물산
에서 어느 정도로 한경리조트를 평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장에서 보는 한경리조트의 적정가격은 약 9천억 가량으로 HS관광이 인수하기에 그리 버거운 금액은 아닐 거라는 전망이다· 만약 이 거대한 딜이 성공한다면 HS관광은 국내 관광업계에서 절대적인····]
박찬열 변호사는 처음에 이 기사를 믿을 수 없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해 세영개발에 전화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세영개발 차형석 실장은 마치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투덜거렸다·
[이 새끼들 아주 개새끼들이야· 말로는 공짜니 뭐니 하다가 갑자기 어려울 것 같다고 골프장 하나 더 얹지 않으면 힘들 것 같다고 나오더라니까? 순 깡패 새끼들 같으니라고····]
한경리조트를 주는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세영 C·C까지 넘긴다는 걸 차 회장에게 말해야 할 생각을 하니 시야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일단 HS그룹 쪽에서 마음을 바꾼 건 확실해 보입니다·”
“좋아· 더럽긴 한데 어차피 줄 생각을 했으니까 준다고 치자고· 근데 왜 아무 말이 없어? 송병창인가 뭔가 하는 그 새끼가 언론에 그 장부가 가짜라고 발표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직 인수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짝!
박찬열 변호사는 순간 별이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치욕스럽고 분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오다가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 말 그따위로밖에 못 해? 인수가 확정되지 않아? 어차피 그 장부가 진짠지 가짠지는 검찰이 나중에 확정지어· 언론을 움직여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아닙니다·”
그의 말처럼 일단 언론에 조치연에게 불리한 점을 흘렸다가 만약 인수가 틀어지면 검찰에서 전혀 다른 소리를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수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입도 뻥끗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었다·
박 변호사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말해도 될지 그걸 판단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럼 뭐야? 내가 지금 등신한테 내 일을 맡긴 거야? 태양이 그 정도밖에 안 돼? 야 말해봐· 내가 지금 임중석이한테 전화해?”
법무법인 태양의 대표변호사 이름까지 나왔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주며 시간을 두고 내막을 알아보려던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실은····”
“실은 뭐?”
“차형석 실장이 이상합니다·”
결국 말을 꺼내고 말았다·
당연히 차명진 회장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차형석 실장이 회장님을 검찰에서 빼내는 걸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똑바로 말 안 해?”
또다시 손을 들고 후려칠 듯이 말하자 박찬열 변호사가 얼른 대답했다·
“방해하는 게 확실합니다!”
“이 새끼가 지금··· 너 감당할 수 있는 말을 해·”
차 회장은 말을 험하게 했지만 박 변호사를 향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회장님을 검찰에서 빼내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처음에는 차 실장이 HS그룹에서 한경리조트만 가지고는 안 된다며 거래를 깨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런 줄 알고 분노했는데 그 자리에서 최 상무에게 전화가 왔고 리조트를 받지 않고 도와주겠다는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차 실장이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리조트를 받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하니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상황이라 회장님 변론에만 집중하고 곧이어 발표할 송병창 사장에 대한 뉴스를 기다렸는데··· TBC에서 송병창 사장과의 인터뷰가 취소됐다는 소식만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바로 이 기사가 뜬 겁니다· 이걸
보면 당시 최 상무의 리조트 포기는 진짜 포기가 아니라 어쩌면··· 당시만 해도 리조트를 넘기지 않고 어물쩍거리는 차 실장을 향한 협박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차명진 회장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걸 보고 박 변호사가 얼른 말을 이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차형석 실장은 제가 도움을 요청한 조치연에 관한 뒷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말고도 더 정확히 알아보고자 조사하려고 했는데····”
“됐어!”
차 회장은 버럭 소리 지르고 계속 머리를 쥐어뜯는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이 어질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 리조트까지 넘기며 아버지를 검찰에 던지려고 하는 상황·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망설이는 아들을 채근하며 몰아붙이던 때·
늑대처럼 호랑이처럼 키우기 위해 그런 조잡한 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었다·
그때 수사실의 문이 열리며 언제나 봐도 재수 없는 김상철 검사가 들어왔다·
안 그래도 못생겼다고 생각할 얼굴인데 감정이 쌓일 만큼 쌓여서 그런지 더럽게 못생겼다고 볼 때마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식사는 잘 하셨어요? 어? 많이도 남기셨네· 여기 설렁탕 맛있어서 다들 잘 먹는데 입에 안 맞으시나요?”
김상철 검사는 차 회장이 먹다 남긴 설렁탕이 놓인 쟁반을 자기 쪽으로 쭉 끌어당기더니 쟁반이 있던 자리에 서류 하나를 던지듯 올려놓았다·
차 회장의 눈이 그 서류에 닿자 김상철 검사가 말했다·
“우리 회장님 한 가닥 희망이 구속연장 기각되는 건데 어쩌나? 회장님 그렇게 힘이 좋으시다고요?”
“뭐?”
“회장님한테 얻어맞아서 지금 병실에 있는 아저씨가 회장님을 고소했습니다· 낚시 가셨다가 거기 주인한테 주먹 휘두르셨다지요?”
차 회장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거기 낚싯배 주인을 때린 건 자신의 경호원과 형석이 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 돈을 안겨주고 일을 마무리했는데····
“우리 회장님 폭행 전과까지 생기시겠네? 그러니 앞으로 편식하지 마세요· 이제 이 설렁탕 자주 먹어야 할 텐데 입에 안 맞으면 되겠어요? 연세도 있으신데 그러다 몸 상합니다· 흐흐흐····”
김상철 검사는 악마처럼 웃었다·
< 승자독식(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