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독식(4) >
“이 개새끼들! 이 썩을 놈의 새끼들 같으니라고!”
이세준 부회장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업무실을 다 때려 부쉈다·
처음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선임 안건이 시작될 때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결국 형준의 이름이 오르고 과반이 넘는 이들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순간적으로 분간을 못 했다·
그 정도로 비현실적이었으니까·
누가 보더라도 그룹의 정당한 후계자는 자신인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놈이 그룹의 대표이사가 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거였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자 그는 현실을 부정했다·
이사회가 끝나고 자신의 편을 들었던 이사들을 불러모아 반전을 꿈꿨다·
하지만 회사 정관에 과반이 넘는 찬성표가 있을 때 선임한다고 되어 있으니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이사회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달은 건 이제 자신의 손에 남은 건 회사 지분밖에 없다는 거였다·
아직 대주주의 신분이기에 회사에 계속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이형준이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언제고 회사를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졌다는 것·
대표이사가 된 형준은 자신의 지분을 꾸준히 늘려갈 것이고 옆에 자신의 우군을 더 많이 두려고 노력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회사를 다시 가져올 확률은 줄어드는 셈·
이제 돈만 많은 홀아비가 된 셈이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긴 했다·
그렇게 한동안 집기를 부숴버리던 그는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더니 급히 전화를 걸었다·
“나다·”
[형님~ 전화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인지 이세명 사장의 목소리엔 활기가 가득했다·
“좀 만나자·”
[그러자· 회사에서 보긴 그렇고··· 왕십리에 자주 가던 식당 있지? 거기서 보자고·]
“그래·”
이세준 부회장은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을 박차고 나섰다·
안의 소란에 말리지도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있던 직원들이 황급히 일어났고 이세준 부회장은 그중 비서 한 명에게 말했다·
“안에 치워·”
“알겠습니다·”
비서는 뭐라 입을 열려다가 이내 다물었다·
이형준 대표이사 취임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지금 그걸 꺼냈다간 말 그대로 이 자리에서 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멈췄던 건데 그걸 이세준 부회장도 알아챘다·
그는 비서를 사납게 노려보곤 그대로 부회장실을 나갔다·
“하아····”
다리에 힘이 풀린 비서가 그대로 주저앉았고 나머지 직원들도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실장님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비서실 직원 한 명이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평소 성격이라면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강하게 면박을 주었을 그도 오늘 이세준 부회장의 행동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지·”
“우리 이제 끝난 거 아닙니까?”
“설마 자르겠어? 기다려보자고····”
비서실장은 침중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마 이 중에 목이 잘릴 확률이 제일 높은 사람을 꼽으라면 자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
“빨리도 왔네· 누가 보면 바람난 마누라 찾으러 다니는 걸로 알겠수·”
이세명 사장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이세준 부회장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죽 급하면 연락한 지 30분도 안 돼서 자리에 앉아 있을까·
게다가 자리에 앉아 술 주전자를 들어보니 이미 반절은 마신 듯했다·
“혼자 드신 거유?”
“그럼 내가 누구랑 대작이라도 했을까? 봐라 여기에 누가 더 있는지·”
“꽤 충격이 크셨네? 흐흐··· 형 그거 알아? 내가 태어나서 형이 지금 같이 애달아 있는 걸 보는 게 거의 처음 같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에 그런 일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신선하다·”
“네가 만들어준 선물 아니냐·”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지· 사실 스포트라이트는 형준이가 다 받아서 누가 내 공을 몰라주면 어쩌나 고민했었거든·”
“재밌냐? 내가 지니까 재밌어?”
“이거 왜 이래? 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싸웠잖아· 그럼 상대방이 이렇게 녹다운이 됐으면 재밌어야지· 재밌어 죽을 만큼 좋아하는 게 정상이잖아?”
이세명 사장의 놀림에 이세준 부회장은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놀리면 발끈하기라도 해야 놀리는 재미가 있는 건데 상대방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니 이세명 사장도 더는 놀리지 않고 주전자를 받아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세준 부회장은 막걸리를 단번에 반쯤 들이키곤 말했다·
“언제고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혹시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어· 하지만 결국 내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으킨 회사였고 나에게 물려줬으니까· 네가 기분 나쁠 거라는 건 이해한다· 너도 아버지 자식이니까·”
그는 잔에 남은 나머지 막걸리를 해치우고 말을 이었다·
“형준이 놈이 사람들을 하나씩 포섭하는 걸 알아채고 나서 너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잠깐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래 내 실수였어· 난 내 힘으로 형준이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오해하지 마라· 너에게 내가 가진 재산을 나눠주기 싫어서 손을 내밀지 않은 게 아니라 내 치부를 네가 아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이세명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 그때는 그랬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모든 걸 알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내 부탁을 외면했던 건 형의 욕심 때문이 맞아·”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막상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내 손에 있으니까 굳이 위험을 부담하면서 줘야 하는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고?”
“난 너를 믿지 못했어· 당시 제수씨가 어땠는지 생각해봐라·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당장 나눠주지 않으면 형준이랑 손잡겠다고 대놓고 날 몰아세웠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나지· 내 마누라가 형만 몰아세운 줄 알아?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그럼 나눠줬으면 됐었잖아? 그럼 마누라도 더는 나를 들들 볶지 않았을 테고 형을 욕하지 않았겠지·”
“재산이 문제가 아니었어· 지분을 받고 만약 형준이랑 손을 잡으면 난 돈도 잃고 남는 게 없게 되는 거였다·”
이세명 사장은 형의 항변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나눠줬어야 했어· 설사 형이 실수해서 내가 배신한다고 해도 나눠주는 게 맞았다고· 그랬으면 적어도 정이 많은 바보는 됐을지언정 피도 안 섞인 아들에게 진 얼간이는 되지 않았겠지·”
“인정해· 그래서 내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당시 네 부탁을 들어줬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돈 많잖아· 그 많은 재산 가지고 떵떵거리면서 살면 되지· 예전에 그랬잖아? 세계적인 자본가가 될 거라고 그랬나? 돈은 많고 혼자가 됐으니 이제 투자법인 하나 설립해서 아시아 최고 자본가 한 번 돼보는 건 어때?”
“장난하냐? 철없을 때 했던 말을 용케도 기억하네·”
“크크크···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설마 나더러 형을 다시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지? 그건 늦었어·”
칼 같은 동생의 대답에 세준의 미간이 잠시 꿈틀거렸지만 그는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영은 우리 이씨 가문 거다· 우리 거라고· 너 설마 형준이가 순순히 이 회사를 너와 나눌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이세명 사장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틀려 올라간다·
“형 나 그렇게 순진한 놈 아니야· 형은 이제 밖에서 구경만 하라고·”
“그럼? 생각이라도 있어?”
“어차피 처음부터 난 형준이한테 우리 그룹 재산 나눠줄 생각 없었어· 형 말대로 신영금융은 우리집 거야· 그걸 왜 남에게 줘?”
“내가 도와주마·”
“이거 왜 이래?”
“야 설마 내가 너한테 뭘 달라고 그러겠어? 내가 가진 지분만 해도 수천억이 넘는다·”
“그룹 대표에 욕심 없다고?”
“만약 형준이 새끼만 내쫓을 수 있다면 네가 회장하고 난 부회장만 줘도 된다· 그 정도면 만족해·”
“진짜?”
“그래· 난 지분을 넌 회장 타이틀을··· 어때? 형제 사이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어?”
이세명 사장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형준을 내쫓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그를 어떻게 몰아낼 수 있을지 측근들과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만약 부회장직에 있는 그룹 대주주와 손을 잡게 된다면 그가 가졌던 탄탄한 인맥 때문이라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번 튕겼다·
“굳이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잘 생각해봐· 형준이는 이미 대표이사에 올랐어· 그룹 인사권을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핵심 요직에 자기 사람을 앉힐 거다· 그건 막을 수 없어· 반격은 그 다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형준이 비리라도 잡은 게 있어?”
당연히 없다·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준은 그가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자신이 먼저 알아내서 이사회가 열리기도 전에 형준을 쳐냈을 테니까·
“지금부터 알아보면····”
“마땅히 나오는 게 없을 거야· 네가 나보다 그 새끼를 잘 알겠냐? 그 새끼가 돈보단 여자를 더 좋아해서 여자 문제로 속을 썩였지만 룸살롱에서 놀고 클럽 가서 여자 꼬셨다고 대표이사직에서 내려오게 할 수는 없잖냐·”
“그건 그렇지····”
“돈으로 사고를 친 게 있다면 단박에 엮어서 쳐넣을 텐데 용돈은 두둑하게 받고 자란 놈이라 돈이 부족하면 법인카드를 쓰거나 지 엄마 카드를 썼다· 그런데 법인카드 쓴 걸 문제로 제기하려면····”
“형이 걸리네·”
“그래· 내가 준 카드니까· 녀석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없어·”
“그럼 형은 방법이 있어?”
“정공법이지· 다음 주총에서 녀석을 끌어내릴 생각이야· 잊지 마· 난 신영금융그룹 대주주야·”
세명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대표이사는 이사회를 거쳐서 선임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그 전에 너와 내가 힘을 합쳐서 이사진들을 설득해야지· 날 믿어라·”
이세준 부회장은 주먹을 쥐고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그 기세가 그럴듯한지 동생인 이세명 사장은 씨익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좋아· 한번 해보지 뭐·”
“잘 생각했다·”
이세준 부회장은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은지 한줄기 미소와 함께 해물파전을 입에 넣었다·
*
“땅? 또 그 땅 말하는 거예요?”
연희는 오랜만에 만난 그랜드백화점 송은진 실장에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래 거기· 혹시 거기에 뭐 다른 거 하려고 생각해둔 거 있어?”
“아니··· 그런데 전에 관심을 거뒀잖아요? 갑자기 왜 또 그 땅을 원하는 거예요?”
“왜 그렇긴? 회사 내부에서 결정을 번복한 거지· 그런 경우 많잖아? 한다고 했다가 엎고 그러다가 다시 살리고··· 너희도 그러지 않아?”
“그렇기는 하지만····”
“잘 생각해봐·”
연희는 송은진 실장과 헤어진 후 홀로 곰곰이 생각하며 회사로 돌아왔다·
그녀는 영훈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바이오 산업단지 선정이 다시 하남으로 돌아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영훈은 아파트 건설 따위로 HS건설의 성장을 도모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 땅에 욕심이 없었지만 연희는 왠지 그 땅을 그냥 돈 받고 팔기는 아까워졌다·
“무슨 고민 있어요?”
박병호 부장이 골똘히 고민하는 연희에게 다가와 물었다·
연희가 부하직원이기는 하지만 회장의 외동딸이다 보니 연희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는 말을 높였다·
“아 그게요····”
연희는 송은진 실장과 나눴던 대화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박 부장 역시 하남에 들어설 바이오 산업단지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사실 그 위치에 아파트를 지으면 가장 좋기는 합니다· 실장님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으시기는 하지만 아마 그 땅을 놀리느니 뭐라도 지어 올리는 걸 반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흐음····”
“다른 걸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뭐··· 솔직히 우리가 명품 사업에서 이제 좀 자리를 잡은 거 아닌가요?”
“네?”
“Nodri Clare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거 하나만 가지고 있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중국에서 이렇게 현금을 쓸어오는데 그 돈을 계속 쌓아놓고 있기만 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요?”
“우리 명품 사업 한번 키워보는 게 어때요?”
< 승자독식(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