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콕에서 생긴 일(2) >
이후 우따마 장관과의 만남은 어렵지 않았다·
연락처를 빙빙 꼬아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보낸 것도 아니고 며칠 뒤에 보자는 식으로 시간을 질질 끌지도 않았다·
그는 고승현 상무가 연락을 함과 동시에 바로 그 호텔 8층 스위트룸으로 불렀고 연회장에서 헤어진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와 독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아주 호의적인 태도로 영훈 일행을 부른 건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입만 보더라도 지금 그의 심기가 무척 불편한 걸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훈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 대충 손을 한번 잡아주고 소파로 이끌었다·
“만나자고 했으니 어디 할 이야기를 해보시오·”
불렀으니 만나주기는 하겠다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씨알도 안 먹힐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영훈은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제가 조금 무례하기는 했어도 장관님께 도움을 드렸는데 너무 냉정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나 손상될지도 모르는 내 체면을 살려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게 아니었다면 당신들을 내가 따로 만나지도 않았을 거요· 하지만 정말로 날 생각했었다면 나에게 조용히 따로 알려줬어야 했소·”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여자를 엿먹이려 했던 걸 우따마 장관도 알았지만 더 이상 지난 일을 가지고 채근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됐고 HS그룹이 한국석유공사와 손잡고 태국만의 가스전 사업에 참여해보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어렵게 됐소·”
이유는 설명하지 않은 채 단번에 잘라버리는 그의 선언에 고승현 상무가 끼어들었다·
“아직 우리의 조건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 상태 아닙니까?”
“당신들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소· 이미 결정된 일이니까·”
“아니···”
고 상무가 어이없어 할 때 영훈이 나섰다·
“혹시 장관님이 손을 쓸 수 없는 곳에서 일이 결정되고 있는 겁니까?”
“불쾌하군·”
“죄송합니다· 다만 혹시 저희가 장관님을 도와드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린 건데···”
“하하하! 날 도와줄 수 있다고?”
“타국에 있는 사람이라고 장관님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없다고 단언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영훈의 말에 고 상무가 눈치껏 설명을 채웠다·
“한국이나 태국이나 다 같이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HS그룹은 전 세계를 상대로 상당한 규모의 무역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인맥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가 장관님의 비밀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흥!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데 묘하게 우따마 장관의 표정이 처음보다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아니 누그러졌다기 보다는 호기심이 살짝 어렸다고 보아도 될 것 같았다·
영훈은 살짝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장관님처럼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할 때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누군가가 방해를 하기도 하고 장관님의 약점을 캐려고 드는 경우도 있지요·”
“크흠···”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시는데 주변에서 욕심만 가지고 장관님을 음해하려는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니 마음은 답답하고 화도 치밀어 오르시겠죠·”
영훈은 이 순간 그간 열심히 영어공부를 한 게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느끼고 속으로 뿌듯해했다·
“썩을 놈들이지··· 버러지 같은 것들···”
그리고 영어공부의 효과는 상당했다·
처음에는 잡상인 바라보듯 영훈 일행을 바라보던 우따마 장관은 어느새 영훈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맞습니다· 버러지들이죠· 그런 버러지들 사이에서 장관님이 홀로 헤쳐나가시기에는 많이 버거우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럴 때 해외에서 든든한 친구가 도움을 준다면 어떨까요?”
“난 친구가 많네·”
“그럴 겁니다· 아마도 이번 가스전 수주를 맡게 될 회사도 장관님의 든든한 친구일 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그들은 왜 장관님의 현재 고충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영훈의 말에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자네는 내 고충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군?”
“글쎄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HS그룹은 장관님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드릴 수 있다는 것· 말로는 친구라고 하지만 그저 매달 돈 몇 푼 안겨주며 하수인 부리듯 일을 해결하라고 독촉하는 그런 주인 행세하는 친구가 아니란 말이죠·”
“···”
“오늘은 만나뵙게돼서 즐거웠습니다· 인사하는 자리인 만큼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걸 결론짓자고 하는 건 장관님을 압박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겠죠· 우리의 의도가 아니겠지만요· 다음에 한번 더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우따마 장관은 영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호텔에 비치된 메모지에 번호를 적어서 영훈에게 건네주었다·
“아까는 내 비서 연락처였고 이게 내 연락처네·”
“감사합니다·”
“내가 그동안 여러 허풍을 다 들어봤지만 오늘 자네의 허풍은 들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라 신선했소· 다음 만남이 기다려지는군· 어디 말만 그럴 듯했는지 아니면 진짜 그대의 말이 진실인지·”
“저도 기다려집니다· 그럼···”
영훈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호텔을 나왔다·
고승현 상무는 뒤따라 나오다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난 이후에 궁금했던 걸 토해냈다·
“어떻게 안 거야? 우따마 장관이 곤란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
“뭐 다들 그런 거 아니에요? 저렇게 높은 자리에 그것도 엄청난 이권이 걸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듣고 보면 그렇긴 한데···”
우따마 장관의 사주를 살펴보니 그는 무척 예민한 사람이었다·
감정적으로 동요도 심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분명한 사람이라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크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주변에 적이 많을 수밖에 없고 작년부터 구설수와 관재수까지 들어와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할 시기였다·
그도 바보가 아닌데 그걸 모를 리 없고 아마도 예민한 그의 성격상 자신을 둘러싼 적들의 움직임에 무척 스트레스 받고 있을 게 뻔했다·
“그리고 아까 들어보니까 이미 상황이 결정난 듯이 말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되게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던 거 기억 나세요?”
“그랬나?”
고 상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마따 장관은 처음부터 불편한 표정이었기에 딱히 그 순간만 불편한 표정은 아니었다·
“네 확실히 그랬었죠· 그럼 그렇게 된 상황에 불쾌함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아마 그에게 로비했던 회사 때문에 자존심 상하는 일도 몇 번 겪었을 테고 이런 상황이 마땅치 않을 겁니다·”
“허··· 참 보지도 않고 참 잘도 추리해·”
“대단한 건 아니에요· 어쨌든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물어본 건데 잘 맞아떨어진 겁니다·”
“항상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져· 하여튼 최 상무는 귀신이야·”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영훈의 전화가 울렸다·
누군가 해서 보니 천보윤 의원이다·
“여보세요?”
[어 나야· 지금 외국인가?]
“네· 지금 태국에 있습니다·”
[그래? 흐음··· 언제 들어오나?]
영훈은 잠시 생각했다·
오늘 우따마 장관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그는 예민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오늘 그의 번호를 주었다고 잘 설득된 것처럼 굴었지만 그는 쉽게 남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빠른 시일에 답을 줄까?
결론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가벼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게 그의 의심을 덜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그래? 일은 다 봤고?]
“네· 빠른 비행기를 타면 내일 오전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벽부터 움직이지는 말고 내일 저녁에 한번 보자고· 천천히 들어와·]
“배려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알겠습니다· 내일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고승현 상무가 물어본다·
“내일? 뭐야 이대로 패스하자는 거야?”
“연인들 사이에만 밀고 당기는 과정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그에게 뭘 줄 수 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허풍만 요란스럽게 떨었지·”
“하하! 맞습니다· 그랬죠· 그러니 의심스럽기도 하고 괜히 궁금하기도 할 겁니다· 그럴 때 여기서 계속 밀어붙이면 결국 자신을 이용만 하려고 드는 다른 에너지 기업과 비슷하게 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대로 한 걸음 물러나 보자?”
“네· 왜 물건을 살 때도 그러잖아요? 영업사원이 현란한 말빨로 휘어잡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지갑이 열린 물건은 나중에 환불해야겠다는 마음도 쉽게 드는데 자기가 사야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직접 산 물건은 쉽게 환불 안 하는 거·”
“최 상무도 그런 기분을 알아?”
“사실 인터넷에서 본 겁니다·”
“크크큭··· 하여튼 최 상무 말빨이 딱 그런 말빨이긴 한데 나도 그런 경험 있지· 그래서 마누라한테 등짝 몇 번 맞기도 했고·”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오랜시간 고심해서 다시 우리를 찾게 되면 그때는 태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오늘은 그가 갑이었을지 몰라도 그때는 우리가 갑이 되겠죠·”
고승현 상무는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영훈의 말은 전부 그럴 듯했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가 HS그룹을 다시 찾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런데 고 상무는 굳이 그걸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최영훈 상무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던 일은 없었으니까·
*
다음날 오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온 영훈은 회사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청담동의 한 한정식 집을 찾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미리 와있는 천 의원을 보며 영훈이 물었다·
그는 미안한 기색으로 영훈에게 앞 자리를 권했다·
“아니야· 괜히 외국에서 바쁘게 일하는 친구를 불러내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그냥 심심해서 연락하신 것도 아닐 테고 중요한 일일 텐데 한국에 있으면 어떻고 외국에 있으면 어떻습니까·”
“이해해줘서 고맙네·”
“그런데 무슨 일로···”
“일단 식사부터 하지· 그런데 외국에는 무슨 일로 갔나?”
“아 태국에 있는 가스전 사업에 한번 진출해보려구요·”
“가스전?”
“네· 한국석유공사랑 컨소시엄을 맺고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 뭐 결과가 나온 건 없습니다·”
“중요한 일이었구만· 이거 더 미안해지는데? 누구는 해외에서 국위선양을 하려고 하는데 정치인이라는 게 정치적인 문제를 물어보려고 밖에서 일하는 청년을 들어오게 하고 말이야·”
“하하하! 이미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한 다음입니다· 저도 일은 해야죠·”
“그럼 다행이네· 일단 들지·”
식사는 무척 맛있었다·
태국에서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먹고 온 다음에 먹는 한식이라 더 그런 것인지도·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천보윤 의원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도수연이랑 만났어·”
“생각보다 늦었네요? 전 도수연 의원이 꽤 빨리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말고 꽤 많은 여당 의원들을 만나고 다닌 것 같아· 그런데 결국 내가 이번 수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거지· 그런데 그게 조금 어이없게 들켰어·”
“어떻게요?”
“내가 이번에 수사팀장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좀 했는데 그걸 도수연이가 알게 된 거야·”
“조심하시지···”
“그러게 말이야· 자네 말을 듣고 호텔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어쨌든 그래서요?”
“도수연이가 그걸 빌미로 하나를 제안해왔어· 나더러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더군· 정치권과 고위공무원들을 스폰한 정황까지만 기소하고 거기서 마무리를 해달라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뭘 해주겠답니까?”
“이번 대선에서 날 밀어주겠다고 하더군· 이번 대선후보 경선에서 빠져서 은밀히 날 도와주겠다고 했어·”
“하하! 그래요? 그거 잘 됐네요·”
확실히 운이 따르는 사람이다·
별거 한 게 없는데 야당 거물 정치인이 대선을 밀어주겠다고 한다·
오로지 운이 좋은 거 하나만으로 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도 되겠어? 난 이걸 받아도 되는 건지 확실하지가 않았거든· 이 수사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가는 거잖아· 도수연이가 그러는데 검찰들도 거기서 더 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거야?”
“더 가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건 맞는데··· 지금 수사팀이 원하는 게 있기는 합니다·”
“만약 거기서 수사를 마무리해주면 검찰총장을 비롯해 그 라인들이 다 옷을 벗게 해준다고 했어·”
“그래요? 그럼 이보다 좋을 게 없네요·”
“그런가?”
“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 깔끔히 주고 받을 리가 없죠·”
“그럼?”
“이렇게 될 바에 은밀하게 말고 대놓고 도움을 받으시죠· 언제 뒤통수 칠지 몰라 전전긍긍하지 마시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도수연 의원이 당을 바꾸면 어떻습니까?”
< 방콕에서 생긴 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