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환(1) >
천보윤 의원은 흠칫 놀랐다·
“도수연이가 당적을 바꾼다? 도수연이가? 당적을 바꾼다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요?”
도수연은 야당의 차기 대권 후보 중 하나로 여성에다가 똑똑한 검찰 출신이라는 메리트가 더해져 상당한 인기를 끄는 정치인이었다·
야당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여당으로 당을 옮긴다?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일단 되기만 한다면 야당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게다가 뒷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녀가 수사를 종결시켜주면 입을 다물겠다고 하나 그거야 그녀의 말일 뿐이다·
차라리 명확한 증거가 있는 사안이라면 그 증거를 없애면 될 것이지만 이번 일은 그녀의 마음이 바뀌는 순간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런 그녀가 같은 당으로 들어오면 상황은 완전히 변하게 된다·
이번 대선에서 감히 자신을 밀어낼 생각을 못 하기에 여당이 무조건 대선에서 이기게끔 도와줄 수밖에 없고 차기 대선을 생각한다면 감히 떠들 수 없는 사안이 되어 버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최영훈 상무의 의견은 모든 걱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돌려버렸다·
만약 도수연이 정말로 여당으로 오게 된다면 말이다·
“그렇죠·”
“하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는 건가? 당적을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물론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 대선이나 총선에서 크게 패해서 권력다툼이나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 때문에 당이 쪼개지는 상황에서 간혹 상대 당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어· 하지만 그것도 그 전에 해당 행위를
한다든지 하면서 계속 자신이 속한 당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걸 은연중에 표한 다음에 움직이지·”
“대부분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달라· 도수연이는 통일평화당 내에서 상당히 오래 그리고 깊게 뿌리를 내려왔어· 그녀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도 통일평화당 윤필호야· 윤필호 전 대통령· 그런데도 그녀가 자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통일평화당을 떠나 우리에게 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건가?”
영훈은 입가심으로 나온 수정과를 한 모금 넘기곤 말했다·
“도수연 의원이 왜 수사를 멈춰달라고 한지 아십니까?”
“그거야····”
영훈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직 핵심적인 내용까지 들은 건 아니었다·
정말 알아야 할 핵심 내용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최영훈 상무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이번 수사는 세영그룹 차명진 회장을 노리고 진행한 거지만 그 칼끝은 결국 도수연을 향할 겁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죠·”
“그녀가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당적을 옮길 거다?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갈 텐데?”
“수사가 계속 진행되면 당적을 옮기는 것 이상으로 힘들 겁니다·”
“흐음··· 만약 자네 말대로만 되면 난 거절할 게 하나도 없을 것 같군·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있나· 알겠네· 내 자네만 믿지·”
“그러시죠·”
“그럼 도수연은 어떻게 만날 텐가? 내가 연결해줄까?”
“아닙니다· 전에 한 번 만난 적 있습니다· 제가 만나자고 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자네 장모님이 참 부럽군· 뭘 하나 물어보면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데다가 직접 일 처리까지 다 해버리니 말이야·”
“과찬입니다·”
“과찬은 무슨···· 어쨌든 일 끝나고 또 보세·”
영훈은 그렇게 천보윤 의원과 헤어졌다·
*
도수연 의원은 천보윤 의원에게 수사 중단을 부탁했음에도 아직 연락이 없어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뉴스에서는 검찰의 소스를 받은 기자들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새로운 인물을 터뜨려댔고 이러다 법조인의 이름이 들어간 장부가 나오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천보윤 의원까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면 검찰 수사팀장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놀랍게도 HS그룹 최영훈 상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실 얼마 전부터 HS그룹을 의심하고 있던 그녀였다·
조치연과의 만남 이후 정신이 없었지만 모든 일이 조치연이 바라던 대로 흘러가는 이 상황을 보면서 뭔가 더 큰 세력이 그를 도와주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 가장 의심이 갔던 게 바로 HS그룹·
그중에서 조치연과 같은 자리에서 봤던 최영훈 상무를 떠올리며 언제고 한번 뒤를 캐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코너에 몰렸을 때 딱 연락이 오는 게 너무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뭔가 의도가 있기는 할 텐데 그걸 모르고 나가도 되는 건지 망설였던 그녀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어려운지라 어쩔 수 없이 약속장소로 나갔다·
영훈이 정치인과 은밀하게 만나는 장소는 언제나 그렇듯 계열사 호텔·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미리 직원들을 시켜 지하주차장에서부터 그녀를 호텔 로열스위트룸으로 에스코트하게 했다·
1박에 천만 원이 넘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은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으로 어지간한 국회의원이라도 쉽게 묵어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수연 의원도 문을 열고 들어서며 보이는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를 보고 위축되지 않으려 일부러 가슴을 펴고 당당히 걸었다·
“어서 오세요·”
영훈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과 치즈 따위의 안주를 미리 준비해놓은 영훈을 보며 도수연 의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영훈의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재벌이라고 티 내는 건가요? 과하게 호화스럽지 않아요?”
“하하 제가 본래 조용한 곳에서 높은 분들을 만날 때는 계열사 호텔을 이용하고는 하는데 마침 빈방이 이곳밖에 남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아시다시피 휴가 시즌이 아직 다 가지 않아서 서울 시내 호텔이라고 해도 빈방이 많지 않습니다· 이해해주세요·”
“·······”
“아 그리고 와인은 의원님께서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준비한 겁니다· 솔직히 전 와인은 잘 모릅니다· 어느 지역에서 나야 비싸고 얼마나 숙성돼야 좋은 건지 하나도 모르지만 호텔 지배인이 추천한 거라 준비했습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분명 만족할 거라고 하더군요·”
평소라면 어떤 와인인지 살펴볼 법도 하지만 지금 그녀의 정신상태는 한가하게 와인 따위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아직 해도 다 떨어지지 않았어요· 한가하게 술이나 마실 상황이 아니니까 불필요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요·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영훈은 와인병을 한쪽 옆으로 치워놓고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천보윤 의원님과 친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했는데 도수연 의원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그녀는 분노에 찬 고성을 토했다·
“감히 재벌이라고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농락해?”
“제가요? 제가 도수연 의원님을 농락했습니까?”
“그게 아니면? 조치연을 움직여 날 압박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다는 듯 말했다·
“그게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군요· 세영그룹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는데 옆집에 살던 의원님께서 피해를 봤을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요 일단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처음부터 의원님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치연의 목표도 의원님이 아니라 세영그룹 차명진 회장
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의원님이 곤란에 처한 건 과거 의원님의 잘못 때문이지 저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 농락당했네 뭐했네 하시면 당황스럽습니다·”
“·······”
“게다가 전 오늘 의원님을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만남을 청한 것인데 마치 오늘 제가 의원님을 협박이라도 할 것처럼 말씀하시면 굉장히 섭섭해집니다·”
도수연 의원은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
“왜 조치연을 도와주는 거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우연히 조치연 씨를 알게 됐고 사연이 안 돼서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믿기 어렵다는 거 이해합니다· 계열사 시총이 조 단위를 훨씬 넘어가는 재벌그룹이 고작 인정 때문에 세영그룹과 검찰을 흔들려고 했다는 게 사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긴 하죠· 그런데 그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 아닙니까? 때로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니까요·”
“흥!”
“믿기 어렵다면 안 믿으셔도 무방합니다· 의원님이 저를 신뢰하는가 아닌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날 도와주려고 만났다면서 당신을 신뢰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가요?”
“네·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릴 텐데 선택은 의원님께서 하시는 거니까요·”
도수연 의원은 목이 마른 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눈치 빠른 영훈이 움직이려 하자 괜스레 가슴이 답답했던 도 의원은 영훈이 한쪽으로 치워놓은 와인병을 가리켰다·
“그거 가지고 왔으면 한 잔 주세요·”
“그럴까요?”
그간 영훈은 연희와 자주 와인을 마셨기에 와인을 잘 모르긴 해도 능숙하게 딸 줄은 알았다·
매니저가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까먹은 영훈은 어쨌든 비싼 와인을 따서 그녀에게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도 반쯤 채웠다·
와인을 한 모금 하자 긴장이 조금 풀어졌는지 그녀가 말했다·
“어디 하고 싶은 말 해 보세요·”
“천보윤 의원님은 고작 대선을 밀어준다는 의원님의 말만으로 수사를 막지는 않을 겁니다·”
“·······”
“정치권에서 오가는 말을 다 믿으면 그건 순진한 게 아니라 바보 아닙니까? 의원님이 대선을 도와줄 거라는 말도 수사가 끝난 이후에 어떻게 지켜질지 모르고 이후 의원님이 수사팀장과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언제까지 입을 꾹 다물고 계실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요?”
“부동산 계약을 할 때도 먼저 계약금으로 계약할 의사가 분명함을 밝히고 나중에 잔금을 치릅니다· 천보윤 의원님과 계약을 하고자 하시면 계약금을 걸어두셔야 천보윤 의원님도 의원님의 진심을 믿지 않을까요?”
“말을 그럴싸하게 하네· 그래서 계약금으로 뭘 해줘야 할까요?”
“당을 옮기시죠·”
그녀는 와인을 마시던 동작을 뚝 멈췄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최영훈 상무· 말이 지나치네?”
“그럼 수사를 계속 진행하도록 두시면 되겠군요· 그러다 10년 넘게 세영그룹으로부터 스폰 받은 판사의 이름이 나오고 그 판사 중 한 명이 도수연 의원님 남편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도 상관없다면야····”
도수연 의원은 와인잔 잡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설마 최영훈 상무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신····”
“말했잖습니까· 전 조치연 씨를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줬다고· 당연히 그 장부에 뭐가 기록돼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는 마세요· 어디 가서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
“까짓 배신자 이미지 좀 쓰면 어떻습니까? 가족을 지키고 본인을 지킬 수 있는데요· 게다가 여당으로 옮기는 게 꼭 의원님에게 해가 되는 일도 아닐걸요? 천보윤 의원님이 대권을 잡으시면 의원님을 얼마나 밀어주시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녀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계속 와인을 마셨다·
영훈은 그녀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뒤 따라주었던 와인을 다 마신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당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대학교 동아리 옮기듯 마음대로 옮길 수 없다고요·”
“어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내가 자연스럽게 옮길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마중물을 내려달라는 겁니까?”
“미친년도 아니고 통일평화당을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할 것 같던 내가 갑자기 당을 옮기는 게 말이 되나요?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흐음····”
영훈은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데 제가 정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네요· 어쩔 수 없이 그 명분은 스스로 생각해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그런····”
“그것보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거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하남에 선정될 것 같던 바이오 산업단지는 왜 춘천으로 옮기려고 하시는 겁니까?”
도수연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 영훈을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알 것 없어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점쟁이 의견을 듣고 그러신 건 아니죠?”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너무 놀란 그녀를 보고 영훈이 태연하게 말했다·
“천보윤 의원이 수사팀장과 술을 마셨다는 거··· 문제 될 수 있는 사안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천보윤 의원님을 압박했겠죠· 그런데 점쟁이 말을 듣고 바이오 산업단지 위치를 옮기려고 한 것 그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면 천보윤 의원님과 도수연 의원님 중 누가 더 큰 타격을
받을까요?”
“·······”
“통일평화당에 계속 있으시면 의원님에게도 별로 좋지 못합니다·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그 와인 가져가셔도 됩니다· 한 병에 천만 원이 넘는다는데 그 정도는 제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럼····”
영훈은 충격으로 얼이 빠진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 전환(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