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환(3) >
반포동에 위치한 성모병원 VIP 병동·
형석은 박찬열 변호사와 함께 찾은 VIP 병동 앞에 잠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박 변호사는 뒤에서 그런 그를 지켜보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찾았다고는 하나 한참을 뭉그적거리던 형석이 두 시간이나 지나 병원을 도착한 것에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충격을 받아 쓰러졌지만 아직도 가슴 한편에 아들에 대한 믿음이 분명 남아 있는 차 회장이 형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차 회장은 형석을 찾을 것이고 자신은 그런 아들을 회장 앞에 최대한 빨리 데려다주는 것이 일단 차 회장이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 여겼다·
그런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병동 입구를 서성이는 형석을 지켜보고 있으니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장님?”
“아 잠깐 뭐 좀 생각했어· 가자고·”
한번 삐뚤어지기 시작하자 이제는 아예 존댓말을 머릿속에서 지운 그는 성큼성큼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하고 분주한 다른 병동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이곳에는 병원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딱 봐도 차명진 회장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경찰들이 분명했다·
박찬열 변호사는 그중 한 명에게 형석의 신분을 소개하고 들어갈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형석의 표정을 살폈는데 의외로 차분히 가라앉은 그를 보고 속으로 갸웃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형사가 자리를 비켜주자 박 변호사가 형석을 에스코트하며 같이 들어가려했다·
그런데 형석이 박 변호사의 앞을 팔을 들어 막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자간에 중요한 대화를 할 게 있으니까 밖에 있으세요·”
갑자기 또 존댓말이다·
“예?”
“밖에 있으라니까요?”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찬열 변호사가 뒤로 물러서자 형석이 옷깃을 다시 정돈하고 고개를 좌우로 툭툭 털어 긴장을 풀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상에 초췌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차명진 회장이 누군가가 들어서는 걸 보고 고개를 들다가 형석의 존재를 확인했다·
“너··· 이놈····”
“쓰러지셨다면서요? 그러게 조심하시지· 일단 누워있어요· 그러다 또 쓰러지실라·”
형석은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그를 대했다·
평소의 차명진 회장이라면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며 윽박질렀을 터였다· 하지만 잠시 병원에 있을 뿐 아직 구속상태를 벗어난 게 아니어서 그런지 그의 마음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태연하게 구는 형석을 보면서 버럭 화도 내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고작 이렇게 묻는 게 전부였다·
형석은 박찬열 변호사에게 했던 것처럼 HS그룹을 욕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한경리조트를 주면 송병창이를 움직여서 증거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 했잖아요? 솔직히 느낌이 싸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아버지를 나오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결국 한경리조트를 줬는데 이 새끼들이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얼쩔 수 없이 골프장까지 넘겼는데 아직도 노력하는 중이라고만 하고···· 하여튼 이 개새끼들 우리가 곤란한 걸 알고는 날로 처먹으려는 수작이었던 거예요·”
차명진 회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형석의 어설픈 연기에 속아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내가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으냐?”
형석은 뭐라 항변하려는 듯 숨을 들이 쉬다가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곤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왜 웃어?”
“하아··· 아버지 나 진짜 너무 웃긴 거 같아요· 씨발 무슨 상황이 이래? 이게 무슨 X 같은 상황이냐고요·”
“·······”
형석은 울분이 치미는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다 아버지 책임이에요· 애초부터 왜 외할아버지랑 원수를 져서 이렇게 만들어요?”
“뭐야?”
“난 싫다고 했잖아요· 난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이건 아버지 잘못이에요· 난 잘못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 하지 말아요·”
“이런 못난 놈이····”
차명진 회장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형석은 이미 터진 감정이라 주체를 못하는지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차 회장에게 계속 퍼부었다·
“난 엄마 싫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엄마 싫어한 거잖아· 송지용 실장이 놓고 간 USB· 그거 알고 있었죠? 내 얼굴이 그 영상에 찍힌 거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만약 엄마 일이····”
“시끄러!”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차 회장이 몸을 일으켜 형석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홱 돌아간 형석의 얼굴·
처음에는 억울해하던 형석의 눈빛은 점차 광기에 물들어갔다·
“진짜 아버지가 걸리면 날 집어넣으려고 그랬어요? 아니 그랬지? 전부 내 탓으로 돌리려고 그랬지?”
“이 이런 멍청한 놈이····”
“멍청한 건 아빠지! 젠장할! 내가 그냥 당할 줄 알아? 내가 엄마처럼 아빠 소모품으로 살다 죽어줄 것 같아?”
차명진 회장은 광기 어린 아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왜 널 소모품으로 생각해? 내가 널 왜 죽여?”
“그럼 엄마는 왜 죽였는데!”
“이런 미친 새끼!”
밖에 형사들이 쫙 깔려 있는 상황이다·
저 미친놈이 하는 말이 형사들 귀에 안 들어갈 리 만무했다·
이 이야기가 형사들 귀에 들어갔다고 수사에 들어갈 리는 없겠지만 알아서 좋을 사안도 아니다·
죽을 때 무덤에 가지고 들어갈 만한 비밀 중의 비밀을 저 미친놈이 눈깔이 뒤집혀서 떠들어대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빼버리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형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작은 화분을 들어 또 형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화분이 박살 나고 충격을 받은 형석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 썩을 놈의 새끼가····”
그런데 쓰러진 형석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경련을 일으켰다·
놀란 차 회장이 숨을 헐떡이며 바라보다가 이내 고함을 질렀다·
“의사! 의사 불러와!”
밖에서 감히 들어가지는 못하고 서 있던 박 변호사가 화들짝 놀라 들어오더니 쓰러진 형석의 모습을 보고 똑같이 고함을 질렀다·
“간호사! 여기 의사 불러오라고! 얼른!”
형사고 간호사고 우르르 병실로 몰려 들어왔다·
형사들은 행여 차 회장이 흥분해서 또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싶어 그를 억지로 침상으로 밀어붙였고 간호사들은 형석의 상태를 살피곤 의사를 부르러 달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혹한 사고에 다들 뭐라 입을 열지는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담당 형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특히나 박 변호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형석과 차 회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로 말싸움하는 것이야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차 회장의 성격이라면 아들의 귀싸대기 한번 올려붙이는 거야 당연할 것이고 아들은 몇 대 맞고 정신을 차릴 거라 생각했다·
어디 부자간의 인연이 쉽게 끊어지던가?
지금 아들이 돈에 눈이 돌아서 헛짓거리를 꾀하려고 한다지만 차 회장의 무서움을 느끼면 바로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형석이 괜찮은 거지?”
차명진 회장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뒷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손을 덜덜덜 떨면서 물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래 누구 아들인데··· 그깟 뒤통수 좀 맞았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쓰러진 아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침상에서 일어나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있음이 침상 지지대를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움켜쥔 그의 손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황급히 달려온 의사의 입에서 사태가 심상치 않은지 뇌출혈 의심에 수술방을 잡으라는 말까지 나오자 차 회장은 숨을 헐떡거리다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호사와 의사들을 아무나 붙잡고 울먹이며 호소했다·
“내 아들 좀 살려주시오· 내 아들 좀 살려주시오·”
“최선을 다할 테니까 흥분하지 마시고 앉아 계세요·”
“아이고··· 내 아들 좀 살려주시오·”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토했다·
서러운 울음소리가 실려 나가는 차형석의 뒤로 구슬프게 울려 펴졌다·
*
통일평화당 원내대책회의·
다들 불편한 표정으로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이상준 의원이 그 후원에 연루된 게 맞는지는 수사결과가 나와야 확실하게 알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확실하게 결정된 일이 아닌데도 기자들이 조회수 때문에 마구잡이로 기사를 쓰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요 며칠 사이에 계속 야당 의원의 이름만 언론에 흘러나오고 있는 건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요?”
“맞습니다·”
이때 가만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도수연 의원이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다들 좋은 말씀 해 주셨는데요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의 나열에 아무 생각 없이 의원들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도수연 의원의 얼굴에 집중했다·
기자들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걸 느낀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국민은 말이에요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지금도 이런 사태가 터지고···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이럴 때 우리 야당은 여당과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말만 가지고 깨끗하다 더 잘났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
요·”
“뭘 어떻게 보여준다는 말이에요?”
야당 중진의원인 서영준 의원이 물었다·
그녀는 마침 잘 됐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단호하고 절절한 심정으로 조치연 비리 장부 수사를 특검 수사로 전환해야 한다고 봅니다·”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방금 질문을 던졌던 서영준 의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 오진혁 의원이 한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지금도 일방적으로 야당에 불리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요· 그럴 때 대통령이 선임한 특별검사가 공평할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요즘 국민 어리석지 않습니다·”
“아니 누가 국민을 어리석다고 했어요?”
당황스러워하는 서영준 의원에게 도수연 의원이 또다시 동문서답식 일침을 가했다·
“국민은 누구보다 현명해요· 지금 여당하고 다를 바 없는 어영부영하는 대처를 보면서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야당이 나서서 공정하게 특검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야당에 대한 신뢰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습니다·”
“아니··· 자꾸 딴소리 하시는데 특별검사는 대통령이 지정하는 거 몰라서 그래요?”
“그렇게 지정된 특별수사가 공정하게 수사한 것인지 아닌지는 국민도 다 알아요· 만약 수사에 문제가 있다면 다음 대선에서 국민이 여당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정도를 걸어야 하는 겁니다·”
지루한 이야기에 졸음까지 몰리던 기자들은 갑작스러운 도수연 의원의 폭탄선언에 번개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다·
[(속보)도수연 의원 조치연 비리 장부 특검 도입 주장]
[내용 없음]
이런 식의 속보가 연이어 포털에 오르기 시작했다·
노회한 정치인 정도 되면 기자들의 손놀림만 봐도 어떤 타이틀로 기사가 나갈 건지 미리 짐작하고는 한다·
당연히 미소까지 지어가며 기사를 써대는 기자들을 보면서 야당중진의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썩어들어갔다·
떡밥을 너무 제대로 물어줬으니까·
이제 특검 정국으로 흘러갈 것이고 진심으로 특검을 도입하자고 주장할 수 없는 야당은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똥볼도 이런 똥볼이 없을 것인데 막상 특검을 주장한 도수연 의원은 자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 마냥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 상황을 참지 못한 서영준 의원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여기 정의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하고 있네 진짜····”
그리고 인상을 긁으며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기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확신했다·
통일평화당은 완전히 내분에 휩싸였다고·
< 전환(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