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전(1) >
“그게 무슨 소리지? 민 대표가 왜 대선 경선에 나와? 애초에 대선 경선에 나올 생각이었으면 당 대표를 하지 않았겠지·”
“그건 의원님 생각 아닙니까?”
“나만의 생각이 아니야· 당 대표 경선 때도 당 대표가 되는 사람은 대선후보를 밀어줘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게 있었다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전 당원의 생각이었어·”
“기사였는지 댓글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디서 봤는데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 같다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그런 이야기가 공감대를 샀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과연 그럴까요?”
“소속 의원들이 반발할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당시 그런 공감대가 있었다고 하니까· 그런데 만약 민 대표가 아니면 이번 대선에서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도 의원들이 무조건 민구상 당 대표를 거부할까요?”
“·······”
천 의원은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대선은 무조건 이겨야 하는 팀 게임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과거의 약속 정도는 충분히 잊어버릴 수 있는 게 대선이다·
하물며 약속한 것도 아니고 고작 공감대 정도만을 가진 걸로 문제 삼을까?
답은 나와 있었다·
“저와 천 의원님의 관계처럼 오성전자는 지금까지 민구상 당 대표를 밀어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성전자의 부탁을 받아 신하은이라는 판사를 밀어내기를 원하고 있어요·”
“오성전자? 그래 오성전자의 신 회장이 민 대표와 꽤 가까운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도 표면적으로 지금까지 그의 정치활동을 후원해줬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오성전자는 지금까지 야당을 많이 밀어줬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긴··· 오성전자가 원하는 게 있고 그걸 민 대표가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오성이 민 대표를 대선으로 밀어주기에 충분하지· 그런데 그 판사가 뭐길래 그러지?”
“오성전자 관련해서 중요한 판결을 맡고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오성전자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
“흐음··· 오성이 밀어준다면 민 대표가 이번 대선 공약에서 우리를 한 수 앞설 가능성이 크겠어·”
침중한 표정의 그를 보며 영훈은 잠시 바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쨌든 마음의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민 대표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민 대표가 그냥 부탁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뭐라고 하던가?”
“예상하신 대로 부탁을 안 들어주면 이번 카타르 LNG선 수주 경쟁에서 물먹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더군요·”
“아··· 민 대표라면 그럴 수 있겠어· 그런데도 민 대표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나? 자네 회사에 꽤 큰 손해일 텐데?”
“꽤 큰 손해 정도가 아닙니다· 막심한 피해죠· 그런데 그래서 더 들어주기 싫습니다· 제가 원래 반골 기질이 좀 있거든요·”
“그럼 내가 그와 손을 안 잡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영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물음입니다· HS그룹은 천 의원님을 도와드리는 것이지만 서로 간에 주종관계는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 난 그런 생각한 적 없네·”
“의원님께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우린 최선을 다해 의원님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럼 우리가 의원님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게 됐으니 의원님이 처리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경우를 벗어난 말을 하는 건가요?”
천보윤 의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어려운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최영훈 상무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문제는 본인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최영훈 상무에게 보여줘야 한다·
“아니네· 내가 실수를 했어· 걱정하지 말게· 내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보겠네·”
“감사합니다· 의원님이 충분히 처리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밖에서 서성거리며 서 있던 보좌관이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대를 잡은 보좌관이 시선을 앞에 두고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전에 말했던 대로·”
“알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선을 앞두고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
[검찰 새로운 장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
다음 날 아침 새로운 기사를 확인한 영훈은 방금 씻고 나온 연희에게 말했다·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돼?”
“왜?”
“점심 같이 먹을까 해서·”
보통 기조실 사람들과 식사를 했지만 그래도 가끔 둘이서 데이트도 할 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미안··· 나 계속 회의 있어서 외부 식사는 힘들 것 같아·”
“요즘 바쁘네?”
“히히··· 내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하는 거라서 그런지 정신없이 일해도 그렇게 힘들지가 않아· 그런데 어젯밤에 나가서 무슨 이야기하고 왔어?”
“어찌 보면 뻔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민구상 당 대표를 만나보니까 욕심이 보통 아니었어·”
“그래? 난 그 사람 TV에서 볼 때마다 인상도 푸근하니 당 대표까지만 하고 욕심 없이 정치 인생 마무리하지 않을까 했는데?”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어· 어찌 보면 지금까지 만나온 정치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그 정도야?”
“사주로 보면 양인살이 비겁과 균형을 이뤄서 고관대작이나 장군이 될 수 있는 사주야· 여당의 당 대표까지 됐으니 사주대로 산 셈이지·”
“그러네·”
“그런데 이 양인살이라는 게 본래 흉살 중의 하나거든· 그래서 거짓말을 잘하고 덕이 없어·”
“인망이 훌륭한 편이잖아·”
“그렇지· 덕이 없는 사람이 인망이 훌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 거짓말을 잘하니까····”
“그래· 타고난 거짓말쟁이야· 어제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자기가 어렸을 때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의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전부 수재였대· 그런데 그중에 법관으로 나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무서운 친구라고 아주 무서워서 외
모가 아름다웠는데도 감히 좋아한다고 고백을 못 했었대·”
“뭐야 드라마야? 웃기네?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일 거라는 거지?”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그런 이야기까지 해가면서 그 판사를 물 먹일 수 있게 수사팀을 압박해 달라는 거였어· 난 생각해본다고 했고·”
“어쩔 생각인데?”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하나 같이 신의가 없어· 거짓말을 잘하더라도 신의가 있는 사람이면 거래라는 걸 할 수 있지만 신의가 없으면 거래를 할 수 없거든·”
“무시할 생각이구나?”
“응·”
“가만있지 않을 수 있잖아?”
“천보윤 의원이 막아야지· 그거 하라고 우리가 지금까지 도와준 거잖아·”
“그렇긴 한데··· 잘할 수 있을까?”
“잘해야 할걸? 대통령이 되고 싶을 테니까·”
“가끔 오빠가 무서울 때가 있다니까·”
연희는 슬쩍 미소를 짓는 영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신영금융그룹 대표이사·
형준의 자신의 명패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이 없을 때면 계속 그 명패를 쓰다듬다가 손자국이라도 나면 헝겊으로 닦아내는 게 일상이었다·
그룹 내부의 임직원들은 언제 아버지에게 충성했냐는 듯 일제히 자신에게 돌아섰고 상대편이었던 사외이사들 역시 슬그머니 얼굴을 비췄다·
속마음이야 모르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듯 행동하는 걸 보고 있자니 이래서 권력이 무섭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표님 로네펠트라고 독일에서 온 차예요· 드셔보세요·”
원래 부회장실 비서진이 미모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비서진이 되자 아버지가 왜 미녀들만 비서진에 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예전이었으면 정신 못 차리고 껄떡댔을 테지만 이제 형준은 그때와 달랐다·
“두고 가세요·”
일단 민희의 미모도 저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민희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게 된 상황적 요인이 더 컸다·
그래서 은근슬쩍 미소를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의 눈빛에도 홀리기보다는 덜컥 겁부터 나는 그였다·
“그리고 1층에 사모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엄마가요? 이 시간에?”
형준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처치 곤란한 폭탄 그 자체가 바로 어머니였다·
그것도 하필 딱 퇴근 시간에 와서는····
“네· 입구에서 차마 막지 못하고 올라가셨다고····”
“알았어요· 오시면 안으로 들이세요·”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형준이 머리를 감싸 쥐기를 10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직원들 상태가 왜 이러니?”
올라오자마자 불평부터 늘어놓는다·
“왜요?”
“흥! 감히 누굴 몰라보고··· 직원들 교육부터 시켜· 어떻게 대표이사 엄마를 몰라볼 수가 있니?”
“대표이사 엄마가 회사에 왜 와요· 올 일이 없으니까 교육을 안 시키지· 그리고 직원들이 엄마 얼굴을 왜 외워야 하는데?”
형준의 엄마인 윤경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외워야 하긴? 넌 이 회사의 대표고 난 네 엄마야· 엄마가 아들 보러 회사에 올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직원들이 내 얼굴을 알아야 재깍재깍 들여 보내주지·”
“아들 회사에 엄마가 자주 찾아오는 경우는 없어요· 우리 회사에 그런 직원들이 어딨어? 여기가 학교야? 학교라고 해도 자식이 문제 안 일으키면 자주 오지 않아· 그러니까 엄마도 앞으로 회사 올 생각하지 마요·”
“너!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가 있니?”
“이럴 수 있어요· 내가 대표이사지 엄마가 대표이사야? 왜 그래요 진짜?”
“아휴 내가 너랑 말이 안 통한다· 됐어· 내가 비서들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형준은 눈을 감았다·
엄마가 뭐라고 비서들을 불러다 교육을 시킨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걸 가지고 싸우는 소리를 밖에 들리게 하는 것도 쪽팔렸다·
윤경원은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눈 감은 아들을 향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너 내가 전에 부탁한 거· 이제는 들어줄 수 있지?”
“뭐요?”
“뭐긴 뭐야? 내가 전에 현숙이 아들 취업 부탁했었잖니·”
“그거 꼭 들어줘야 해요?”
“당연하지· 내가 현숙이 남편이 뭐하는 사람인지 말했지? 국토부 5급 공무원이야·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 나이에 5급이면 뭐가 될지 알 것 같은데····”
“시끄럽고 어쨌든 엄마 말대로 해· 너무 힘들지 않은 곳으로· 알겠지?”
“엄마 나 대표이사 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엄마 친구 아들 취업시키는 일부터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뭘 뭐라고 생각해? 어디 아랫것이 회장님한테 그런 생각을 가져?”
“하아··· 됐어요· 나 힘드니까 그냥 가세요·”
“어딜 가? 조금 있으면 퇴근 시간이잖아· 너 나랑 저녁 먹으러 가자·”
“갑자기 무슨 저녁? 내가 스케줄 있으면 어쩌려고?”
“없는 거 알고 온 거야·”
“내 스케줄을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뭘 어떻게 알아? 내가 아들 스케줄 알면 안 되니?”
형준은 화가 나서 순간 밖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스케줄을 비서들이 알려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다 문든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앞으로는 절대 스케줄을 알려주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겠다고 마음 먹는데 엄마가 말했다·
“얼른 준비해·”
“안 돼요· 나 저녁에 약속 있어요·”
“무슨 약속? 너 혹시··· 그 비서인가 하는 그런 여자 계속 만나는 거니?”
“신경쓰지 마시고 그냥 가세요· 나도 나갈 거니까·”
형준은 더 이상 같이 있기도 싫다는 듯 옷을 챙겨입고 그대로 대표이사실을 나왔다·
“1층 입구에 엄마 나가니까 수행기사더러 차 대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형준의 엄마인 경원도 차마 비서들 앞에서는 목소리를 크게 못내고 이를 악물며 형준을 따라 지하주차장까지 따라 나왔다·
“1층에서 타고 가세요· 왜 지하까지 따라와요?”
“너 차 바꿨다며? 한번 보려고·”
“그냥 법인차예요· 내가 무슨 슈퍼카라도 타겠어요?”
그렇게 언쟁하며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아주 짧게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형준이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차가 눈에 들어왔다·
망했다고 느낀 순간 클락션을 울린 작은 차에서 운전자가 내렸다·
“형준 씨··· 안녕하세요·”
형준이 눈에 들어와 손부터 움직였던 그녀는 클락션을 울린 후에야 그의 곁에 있던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던 거다·
민희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자 윤경원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누구?”
“안녕하세요· 김민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민희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이죠?”
“형준 씨 여자친구입니다·”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애는 여자친구 없는데?”
경원은 기를 죽이려고 한 멘트였지만 민희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야말로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아드님이랑 안 친하신가 봐요· 보통 아들과 친한 어머님은 아들한테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으신다던데····”
순간 윤경원의 미간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 내전(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