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전(2) >
“뭐라고?”
“어머 죄송해요 어머님· 농담으로 한 말인데 기분 나쁘셨어요?”
“어머님? 누구한테 어머님이야? 그리고 넌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하니?”
“형준 씨한테 어머님 성격이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굉장히 쿨하시다고 들어서요·”
순식간에 올드하고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린 윤경원은 이성의 끈이 툭 끊기고 말았다·
안 그래도 아들이 말을 듣지 않아 짜증이 난 와중에 근본도 모르는 여자의 건방진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인내심의 한계가 무너졌던 것이다·
“이게 어디서····”
귀싸대기를 한 대 후려갈기려고 뛰쳐나가려던 경원의 손을 형준이 가까스로 막아냈다·
“엄마 그만! 제발 그만해요·”
경원은 파르르 떨리는 팔에 힘을 빼지 않았다·
말리는 아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손바닥을 코앞에 두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어린 여자의 건방진 눈빛 때문이었다·
“너····”
“건방지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너 누구야?”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름은 김민희라고 하고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HS물산에서 기획조정실 비서로 근무하고 있고 형준 씨를 알게 된 지는 1년 정도 됐습니다·”
“1년이나 만났어?”
“정식으로 사귄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너 설마 우리 애랑 결혼하려는 생각은 아니지?”
“누가 그러더라고요· 연애는 여자의 동의가 필요하고 결혼은 남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결혼하려는 거냐고 물어보시려면 제가 아니라 형준 씨에게 물어보시겠어요?”
이렇게 되니 그녀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돌아갔다·
형준은 자신에게 손목이 잡힌 채 돌아보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너 미쳤니?”
“미치지 않았고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오는데 민희 씨 도움이 컸어요· 몰라요? 이 여자 아니었으면 작은아버지랑 거래조차 할 수 없었던 거?”
“시끄러· 그게 다 이 여자 때문이야?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지?”
“그건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내가 엄마 아들이기만 해서··· 아니다· 그만 가요 이제····”
윤경원의 몸이 분노로 인해 바르르 떨렸다·
엄마의 아들이기만 하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이런 사단이 났다는 말을 그녀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근본도 모르는 년 앞에서 저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아들과의 말싸움은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다시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집안에 돈은 있니? 혹시 우리 집에 몸만 들어오려고 그러는 거니?”
민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더러운 여자·
민희가 생각하는 형준의 엄마는 그랬다·
어려서부터 겪었던 엄마의 불륜에 대한 상처는 아직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아물지 않은 채 딱지만 앉아 있었다·
그런 여자의 입에서 돈과 집안 이야기가 나오니 민희로서는 가당치도 않았던 거다·
그래서 뭐라 반박하려는 순간 뒤에 짧게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한 대도 아니고 다섯 대가 넘는 차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떤 차주는 대표이사를 알아보고 잠깐 나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은 상당히 민폐를 끼치는 형국이었다·
“차를 비켜줘야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약속은 다음에 하기로 해요·”
민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차를 타고 휭 가버렸다·
“저거 싸가지 봤니?”
길길이 날뛰는 경원을 보며 형준은 이마를 짚었다·
자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지나가는 임직원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곤 얼른 어머니를 데리고 엘리베이터 타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만하시고 이제 1층 가서 차 타고 들어가세요·”
“뭘 들어가? 너랑 저녁 먹으려고 왔다니까? 쟤 갔으니까 저녁 약속 취소된 거 아니니? 같이 가자·”
형준은 안 된다고 하려다가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리는 직원들과 인사하며 여기는 말싸움을 할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알았어요· 가요·”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바로 로비로 올라온 그는 입구에 주차된 차에 같이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운전대를 잡은 수행기사가 답했다·
“충무로에 있는 수담으로 갈 예정입니다·”
형준은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담이면 한정식집이잖아요? 누굴 만나려고 거기로 가요?”
“가보면 알거 아니니? 아저씨 출발해·”
“알겠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형준은 괜스레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나 몰래 선자리 봐놓고 그런 거예요?”
“그것보다 너 빨리 말해봐· 그 여자랑 정말 결혼할거니?”
“그럴 거예요·”
“그 생각 접어· 너 예전의 이세준 부회장 아들 아니야· 이제는 엄연한 신영금융그룹 대표이사라고· 10년 20년 후에 대권을 잡을 후계자랑 지금 거대 그룹을 이끌고 있는 대표이사랑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니? 부릴 수 있는 직원이 다르고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달라· 넌 지금 재계에서 태
풍의 눈이야·”
“잘도 갖다 붙인다· 엄마가 이렇게 표현력이 좋은 사람인지 처음 알았어요·”
“내 자식을 이것보다 훌륭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너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아무나 결혼해서 인생 망치지 마· 이제 엄마가 네 앞길 쫙 깔아줄게·”
“도대체 누굴 만나러 가길래 이런 소리까지 해요?”
“가보면 알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들 앞에서 행여 아까 그 여자 이야기 털끝만큼이라도 꺼냈다간 엄마 그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을 테니까 알아서 해·”
혀 깨물고 죽는다는 말은 그녀가 항상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할 때 아버지에게 주로 하는 단골멘트였다·
그 멘트가 나오면 아버지도 더는 말리지 못하고 으레 엄마가 하는 대로 놔두었었다·
“후··· 알았어요·”
형준은 포기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민희의 마지막 얼굴이 계속 마음에 걸린 채로 말이다·
*
“어머~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우리도 빨리 온다고 왔는데 아들이 그냥 직원도 아니고 가장 먼저 퇴근하면 되겠냐면서 그렇게 미적거리더라고요· 호호호!”
“당연히 그러겠죠· 대표이산데 직원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우리 몇 번 봤지?”
형준은 당황했다·
어느 정도 괜찮은 집안 사람이 나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오성그룹 부회장의 사모가 나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일어나는 젊은 여자는 아직도 대학생 신분일 게 분명한 이 집 막내딸이다·
국내 최연소 주식부자라던가?
얼굴도 예쁘고 돈도 많아서 어지간한 셀럽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명한 여자였다·
“네 작년 석훈이 형 결혼식 때 뵀었습니다·”
“맞아· 그때나 지금이나 어쩜 그렇게 훤칠해?”
“감사합니다·”
“취임식은 언제 할 거야? 가서 축하해줘야 하는데·”
“취임식은 할 생각 없습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바뀌게 된 자리인데 굳이 취임식까지 해가면서 떠들썩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형준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살기 위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스러움도 컸다·
그래서 혹시나 떠들썩하게 진행되는 취임식을 멀리서 지켜보고 크게 상심하고 상처 받을까 두려워 일절 취임식을 비롯한 행사 자체를 계획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럴 만하지· 일단 앉아·”
오성그룹 강대식 부회장의 아내인 조재숙은 형준도 이미 몇 번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한 사이였다·
사실 재벌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갖가지 이유로 진행되는 국가행사 또는 사적인 경조사를 통해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했다·
그렇기에 저렇게 아들 친구에게 말하듯 친한 척 말을 걸 수 있는 거였다·
“네· 오랜만이네·”
“네 오빠·”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나도····”
강다은 역시 이 자리가 어색한지 배시시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예뻐보인 건지 형준의 어머니인 윤경원이 자리에 앉으며 폭풍칭찬을 해댄다·
“어쩜 그렇게 예뻐? 말하는 것도 예쁘고· 들어보니까 성적도 그렇게 좋다며?”
“아니에요·”
“예쁘고 똑똑하고 어른 공경할 줄 알고··· 정말 너~무 탐난다· 호호호!”
대한민국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오성그룹 막내딸·
그 간판이 가진 가치는 지금껏 초연한 마음을 유지해온 형준까지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누구라도 흔들릴 게 분명했다·
오성그룹 중 오성전자만 하더라도 1년 순이익이 10조를 넘는 초거대 글로벌 기업이다·
오성전자에 비하면 신영금융은 아직 글로벌그룹이라는 이름을 내밀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니 괜스레 마음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식사는 노골적이지 않았다·
두 가문의 엄마들은 억지로 두 사람을 이어주지 않고 그저 친한 친구들이 자식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 것처럼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진지한 정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드문드문 젊은 두 남녀가 화제에 올라 두 사람이 끼어들었지만 주로 대화는 경원과 재숙이 했다·
그렇게 식사가 다 끝났을 때 재숙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천천히 나와·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
“어머 내가 사야 하는데·”
“됐어·”
재숙이 나가자마자 경원이 말했다·
“잠깐 손 좀 씻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경원이 들고 나가도 되는 가방을 일부러 두고 나간다·
이유야 뻔했다·
두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개인적인 연락처를 받아 놓으라는 뜻이었다·
그 두 사람의 의도를 어찌 젊은 사람이라고 모를까·
당연히 연락처를 물어보리라고 생각한 다은이 빤히 형준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형준이 말했다·
“오늘 자리가 우리 엄마가 원해서 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원치 않아서 온 자리면 미안하게 됐다· 나도 오늘 와서야 알았거든· 불편했다면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우리 엄마가 요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그래서 불편한 이야기도 하고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이해해· 오늘 자리는 미안했다·”
형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경원의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다은은 당황했지만 급하게 나가는 형준을 붙잡지 못했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다은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재숙과 경원은 두 사람이 연락처를 나눴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 없이 웃으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경원은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연락처는 받았니?”
“안 물어봤어요·”
경원이 화들짝 놀랐다·
“왜? 왜 안 물어봐?”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애잖아요· 그런 애랑 무슨 결혼을 해· 쟤랑 나랑 몇 살 차인 줄 알아요?”
“너 웃겨· 너 예전엔 어린 여자가 최고라며? 너 예전에 사고 칠 때 스물 갓 넘은 애랑 그랬던 거 모르니?”
형준은 고개를 숙였다·
당시 놀기 좋아하던 철부지 때 친 사고는 그의 흑역사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영훈을 만나 그 충격적인 사실을 듣기 전까지는 계속 철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오성그룹이야· 오성그룹 막내딸이잖니·”
“내가 쟤랑 결혼하면 오성그룹을 나한테 준대요?”
“오성전자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오성생명 정도는 주지 않겠어?”
“하하 오성생명? 순환출자 핵심 고리인 오성생명을 사위한테 준다고요? 엄마 참 순진하네?”
“그 그럼 오성물산이라든지····”
“안 줘요· 안 준다고· 이름은 거창한데 결혼해서 내가 얻을 건 없어·”
영훈을 만나고 철만 든 건 아니었다·
시야가 넓어졌고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게 된 그였다·
오성그룹 막내딸을 보는 내내 그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녀의 배경 때문에 마음이 떨렸던 형준이었지만 이제는 앞뒤 구분도 못 하고 날뛰는 망아지가 아니었다·
당황하는 경원을 형준이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뺏기는 게 많을걸요? 우리가 가진 신영생명 신영손보 전부 욕심나겠지· 신영금융을 통째로 얻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룹 계열사처럼 구멍 난 데 메꿔달라고 할 테고 우린 손해가 나면서도 따라줘야겠죠· 엄마 결혼으로 이익을 보려는 마음이면 제대로 해요· 아들 앞길 망치지
마시고·”
경원은 아들 앞길을 망친다는 말에 입도 뻥끗 못 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에는 아들이 너무 커버렸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 내전(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