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프로젝트(3) >
“영업 팀이 안 바쁘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 너도 바쁠 텐데?”
연희의 까칠한 말투에 준기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운을 띄웠다·
“신영투자증권 이형준 본부장 알지?”
“형준 오빠? 응 알아·”
“언제 자리 한 번만 만들어줄래?”
“회사 일?”
“당연하지·”
“고마워· 언제 밥 한 번 살게· 아 그리고 나도 도움 하나 줬어· 잘 해봐·”
연희가 승낙하자 준기는 멋들어지게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자기가 도움줄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뭐 때문에 저러지? 우리 회사가 신영투자증권이랑 만날 일이 있나?”
혼자 중얼거리던 연희는 영훈이 핸드폰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걸 보고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그랜드 백화점 BM(브랜드 매니저)에게 메일 보냈었잖아요? 한 번 만나자는데요?”
“어? 만나자고 해요?”
“네· 뭐지? 노 대리님은 다 까였다고 했는데?”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것 역시 운명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도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와··· 이게 다 노 대리님한테 대운이 들어서 그런 건가요? 말도 안 돼· 나 지금 소름돋았어·”
연희가 팔을 걷어부치고 자신의 팔을 내보인다·
가느다랗고 하얀 팔을 들이미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니 연희가 민망해하며 슬그머니 옷을 내렸다·
“고 과장님 때가 더 소름 돋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소름 돋았어요· 지금도 그렇고··· 사람 참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 있으시네요·”
“민망하게 했으면 미안합니다· 신기해서요·”
“내가요?”
“네· 처음 만났을 때랑 비교해서 상이 좀 변한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요?”
“아닙니다· 잊어버리세요· 어떻게 할까요? 내일 미팅할까요?”
“당연하죠· 샘플북 챙기고 갈색 가방 있죠? 그거 가지고 갈게요· 아 그리고 정장 그거 한 벌이에요?”
연희가 영훈의 위아래를 빠르게 스캔한다·
“한 벌은 아닙니다·”
“미안해요· 말을 잘못했네· 오늘 입은 정장 말고 소매랑 바짓단 길게 나온 검은색 정장 말고 또 원 버튼의 빛깔나는 회색 정장도 제외하고 다른 건 없어요?”
하나만 입고 다닐 수 없어 정장 세 벌에 와이셔츠는 다섯 개로 돌려가며 입는데···
“검은색 정장이 소매랑 바짓단이 좀 길었나요?”
“네· 원래 정장은 소매가 여기까지 오는게 맞는 거구요· 바짓단도 너무 길면 보기 싫어요· 구두 뒷굽에 딱 맞는 길이가 가장 보기 좋거든요· 재질은 뭐··· 그리고 영훈 씨는 허리가 좀 두툼해서 원 버튼은 너무 안 어울려요·”
그녀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지 순식간에 우르르 쏟아냈다·
“좀 평소에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뭘 말해줘요· 이미 산 거고 환불할 수도 없었을 텐데·”
“그럼 지금은 왜 말해줍니까?”
“영훈 씨도 이제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는 상사인이 됐잖아요· 그럼 패션에 대해 좀 아셔야 하는거 아니겠어요? 맞춤 정장에 커프스 버튼과 짱짱한 원단 그리고 패션의 완성은 구두 인거 알죠? 좀 갖추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그녀는 영훈을 향해 손가락을 휘휘 돌리며 조언을 빙자한 지적질을 해댔다·
평소에 계속 구박만 받으니 쌓인게 많았나보다·
“나 아직 고시원에 삽니다· 커프스 버튼인가 하는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거 집에 놔둘 곳도 없어요·”
“네? 고시원에 산다구요?”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후다닥 자리에 앉아 말을 쏟아냈다·
“돈이 없어요?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요? 아 식사야 식당이 있겠고 빨래는요? 샤워실은 따로 있어요?”
“큼··· 거 참 궁금한 것도 많으시네· 평생 산에서 살았는데 돈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있다고 해도 아껴 살아야지·”
주지 스님이 모아주신 돈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비싼 서울에 괜찮은 전세방 얻을 정도는 아니었다·
요새 5백만 원 가지고 얻을 전세방이 어디 있겠는가?
“와 그런데 삼촌한테 듣기로는 보너스까지 다 거부하셨다면서요? 왜 거부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무시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이야 언제든지 벌 수 있으니 굳이 욕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시원이야 조금 좁기는 해도 내 한몸 편히 누일 수 있고 샤워야 평생 찬물로만 씻다가 뜨신물 잘 나오니 불만 없습니다· 다만 방음이 좀··· 코 고는 소리도 짜증나고 통화하는 소리까지 다 들려서 그게 많이 힘들더군요·”
영훈이 말을 하고 나서 슬쩍 옆을 돌아보니 연희가 세상 이런 불쌍한 사람이 옆에 있었냐는 듯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뭡니까 그 표정은? 내가 불쌍해요? 하여간 금수저 들이란···”
“아니 내가 뭐라고 했어요? 가만 있었잖아요·”
“그 눈빛 마음에 안 듭니다· 눈빛 조심하세요·”
“와~ 난 내 눈 가지고 마음대로 뜨지도 못하나요?”
“농담은 됐고 옷을 사야 된다는 말이죠?”
“후··· 원래 그쪽 사람들이 차나 옷 같이 외형만 보고 사람 판단하거든요· 직장인이라고는 해도 일단 명품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옷은 제대로 맞춰 입고 가는게 설득력을 더 올릴 것 같아요·”
“그냥 갑시다· 한두 푼도 아니고···”
연희는 잠깐 자신이 옷을 사주겠다고 말하려했지만 괜히 그게 영훈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마음을 접었다·
“그래요· 영훈 씨 말대로 고작 미팅 한 번인데 정장까지 새로 맞추는 것도 웃기네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고작 옷 아니겠는가?
정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연희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다음날 그랜드 백화점 입점 브랜드 심사를 주관하는 박운호 BM과의 만남을 위해 본사 4층을 방문한 연희와 영훈은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약속시간 30분이 넘도록 미팅할 관계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슬 연희의 얼굴이 붉어지며 화가 치밀어 올라갈 때쯤 미팅룸 문이 덜컥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연희가 흠칫 놀랐다·
“어?”
“왔어? 내가 좀 늦었지· 미안~”
들어온 이는 서른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였는데 짧은 원피스에 온갖 화려한 악세서리로 자신의 몸을 꾸민 모습 만큼이나 얼굴도 화려하게 생겼다·
화려하게 생겼다는 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강렬할 때 대개 여자들은 화려하게 생겼다고 하고 남자들은 진하게 생겼다는 평을 듣는데 이 여자가 꼭 그랬다·
“어머 은진 언니···”
“반갑다 얘· 넌 어쩜 정장을 입어도 그렇게 예쁘니?”
“제가 올 줄 아셨어요?”
당황하는 연희가 묻자 은진이라는 여자는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여기는 어떻게 되지? 나 송은진 실장이에요·”
영훈도 재빨리 일어나 그녀와 악수했다·
“아 네· 현진물산 영업 2팀의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아직 사원?”
“네·”
“음~ 실무진이 조금 약하네? 중요한 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나봐?”
송은진은 자리에 앉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너 몰랐구나? 준기가 잘 부탁한다고 직접 연락왔잖아·”
“하하···”
연희가 허탈하게 웃는 걸 보며 송은진이 달래듯 말했다·
“왜? 어렸을 때부터 네 가방 들어줬던 애잖아· 예쁘게 봐줘· 지금도 너 도와주려고 한 거잖니·”
“준기 얘기는 그만하고 그럼 내가 무슨 얘기할지 아는 거네요?”
연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본 모습이 딱 이랬던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에 상대를 탐색하는 눈빛 그리고 조금은 편해진 자세·
“이거 어쩌니? 내가 너 오기 전에 다 챙겨 봤잖아· 전부 계약기간이 많이 남았더라구· 그나마 계약만료가 가까운 브랜드가 있는데 월 매출이 15억이나 나와서 계약해지가 쉽지 않아· 너희 브랜드··· 아 미안· 내가 자꾸 깜빡깜빡하네· 브랜드 이름이 뭐였지?”
영훈이 봐도 이건 알면서 모른척 하는게 분명했다·
“Nodri Clare입니다·”
영훈의 대답에 은진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맞다 맞다· Nodri Clare· 우리 직원들이 다들 그거 찾아보느라고 한동안 난리였잖아· 아~무도 몰라· 하하하·”
한동안 배를 잡고 웃던 그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하필 가지고 와도 왜 그런 걸 가지고 왔니? 어쨌든 다들 반응이 안 좋았어· 그래서 나도 밀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서 어떡하지?”
“언니는 이게 웃기나 봐요? 난 하나도 안 웃긴데·”
“어? 뭐 그냥···”
“그 얘길 하려고 직접 나온 거예요?”
연희의 싸늘한 대답에 순간 그녀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달랬다·
“우리 직원들이 너한테 안 된다고 하면 좀 그렇잖아· 네 체면도 있는데··· 그래서 직접 왔지· 내 마음도 몰라주고 너무한다·”
연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영훈에게 말했다·
“아 내가 소개를 안 했네· 이 언니가 그랜드 백화점 소유주인 대명그룹 송주훈 회장 손녀분이에요· 나랑 네 살차이· 생일도 나랑 몇 달 차이 안 나요· 7월 8일 맞지?”
“어? 어··· 그런데 갑자기 생일은 왜 얘기하니? 뜬금없다·”
영훈은 그녀가 왜 갑자기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탁자 아래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한방 먹여달라는 소린데···
“그런가? 언니 선물 좋아해서 혹시 회사에 남는 선물 있으면 생일 때 줄까 했었죠·”
“됐어· 이제 입사해놓고 네가 무슨 힘이 있니? 그리고 생일도 지났어· 너 회사 들어가더니 조금 이상해졌다·”
은진이 황당하게 쳐다볼 때 영훈이 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안타깝네요· 여기 연희 씨가 이번에 잘 해결해주셨으면 괜찮은 남자분 소개시켜드리려고 했는데·”
“응? 뭔 소리야· 나 결혼했잖아· 호텔에 와서 축하한다고 한 지가···”
“어? 연희 씨는 이혼··· 아닙니다· 제가 착각을···”
순간 송은진의 손이 파르르 떨렸고 연희는 한 순간에 화색을 띠며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언니 내가 아니면 누가 언니 마음을 알아? 많이 힘들었지?”
< 첫 프로젝트(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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