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전(4) >
“아아아악!”
집으로 돌아온 윤경원은 비명을 질러댔다·
형준이 인테리어 비용으로 수억을 쓴다며 그렇게 욕했던 궁궐 같은 그 집은 비명 소리로 인해 을씨년스러운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엄마 왜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야?”
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경원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차마 자식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근본도 없는 미친년이 자신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말하기 위해선 자신의 치부를 밝혀야 하는데 어느 엄마가 자식 앞에서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가· 빨리 사라져 얼른!”
엄마의 히스테리를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닌 딸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일단 자리를 피해주었다·
초조한 경원은 비싼 네일을 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형준이 만난 여자가 어디 한둘일까?
그중에 임신한 여자도 있었고 그걸 빌미로 돈을 뜯어내려는 여자도 있었다·
그뿐인가?
남편인 이세준 부회장의 여자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행여 그 여자들이 아이라도 가졌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말도 못 했고 그 여자들 하나하나 뒤처리를 했던 것 역시 자신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자신이 뭐라고 하면 눈물 뚝뚝 흘려가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여자도 있었지만 눈 똑바로 뜨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독한 년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독한 년이라도 그래 봤자 독하기만 할 뿐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년은 아니다·
다른 여자들처럼 분노에 차서 아무 말이나 토해내는 게 아니라 단 한 번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협박했다·
형준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가정은 하지도 않았다·
마치 형준은 자신의 꼭두각시라도 되는 양 말하는데 전혀 불안감이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해대니 가당치 않고 웃음이 난다기보다는 조금씩 무서워지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정말 저 미친년 때문에 무슨 사단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마음을 굳힌 경원이 재빨리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 호호호! 저예요· 잘 지내셨어요?”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윤경원이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건 오직 그녀만이 알 것이다·
*
“그래도 우리는 대표님을 믿었는데··· 실망입니다·”
여당 당 대표인 민구상 의원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리며 대답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그게 끝입니까?”
오성그룹 차남이자 전략실장인 강대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젊고 패기 만만하며 무서운 게 없는 그는 감히 여당의 당 대표 앞에서도 사나운 기세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난 나대로 최선을 다했네·”
“아이 참···· 최선을 다해달라고 우리가 의원님과 손을 잡은 게 아니잖아요· 잘 좀 봐 달라고···· 같이 좀 잘 해보자고 손잡은 거 아닙니까? 의원님 지역구에 공장 세워준 게 그 땅이 좋아서 그런 거겠어요? 막말로 그 지역에 전철도 없어· 거기 출근하려면 직원들이 근처에 살거나 광역버
스 타야 해요· 그런데도 해준 거잖아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점점 목소리가 커지던 그는 급기야 마지막에서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민구상 대표는 마치 빚쟁이에게 쫓기게 된 것 같은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지만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기에 그저 눈을 감으며 화를 삭일 뿐이었다·
하지만 강대성 전략실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는 노인네를 보자 속에서 더 열불이 났다·
“대표님 말씀 좀 해보세요· 너는 지껄여라 나는 모른다 그겁니까?”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예의를 지키게·”
“예 죄송합니다· 제가 버릇이 좀 없죠?”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데 지금 예의를 따질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검찰은 입 싹 닫고 여기서 셔터 내릴 분위긴데? 벌금 500억 정도 나오면 대표님이 대신 내주실 건 아니시죠?”
“지금까지 주가조작으로 500억이나 벌금 맞은 사례가 어디 있나?”
“그거야 부당이득으로 생긴 금액이 고작 몇십억이나 몇백억이었으니까 그렇죠· 지금 검찰에서 부당이득으로 잡은 금액이 3천억입니다· 그럼 벌금을 얼마나 때릴 것 같으세요? 500억도 적게 잡은 겁니다?”
“크흠··· 이번만큼은 내가 미안하게 됐어· 천 의원에게 내가 단단히 주의를 시켰네만 말을 안 듣더군· 오히려 나를 경계하는 분위기야·”
강대성은 눈을 빛냈다·
“천보윤 의원이요? 천 의원이 이번 수사팀을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까?”
“맞네·”
“천 의원이 어떻게 검찰 수사팀을 움직였어요? 검찰에 그렇게 깊숙한 끈이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조치연이 이번 비리 장부를 검찰에 던질 때부터 천 의원이 뒤에서 움직였을 가능성이 커· 우리도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대략적인 그림은 그렇게 그리고 있네·”
“그러니까 당 대표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
“그 인간 대선 욕심 있어요?”
“아마 이번 대선 경선에 나올 거야· 꽤 오래전부터 대선을 준비했던 사람이거든·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대표님하고 붙으면요?”
민구상 대표는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유리한 게 맞지만 대선 경선은 말 그대로 대선의 전초전이야· 온갖 비방이 난무하고 예상치 못했던 비밀무기라 튀어나오지·”
“어렵게 돌리지 마시고· 어쨌든 유리한 건 맞지 않습니까·”
“맞네·”
“말 잘 하세요· 지금껏 대표님한테 투자한 돈을 생각하시라고요· 이번 대선 경선에서 떨어지면 회장님이 많이 실망하실 겁니다· 뭐 지금도 많이 실망하셨겠지만····”
“·······”
“그리고 이번 판결에서 나온 벌금만큼 의원님께서 다른 쪽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진작부터 말했지 않나· 차라리 벌금을 맞고····”
강대성 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 참· 진짜··· 대표님 그 판결 하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알았네 알았어·”
“그리고 대선 경선 준비는 우리 쪽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과하지 않게 부탁하네·”
대선 경선 준비라는 건 돈이 아니라 정보를 말함이다·
상대 후보를 낙마시킬 결정적인 정보·
당 대표인 그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같은 당 의원의 뒷조사를 누구에게 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성그룹이 뒷조사를 해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선택은 없으리라·
“나중에 약하다고 닦달하지 마시고요 정보는 우리가 물어다 드릴 테니까 굿이나 보고 떡으나 잡수세요·”
“크흠··· 어쨌든 고맙네·”
강대성 실장은 그렇게 민구상 대표의 집에서 나와 회사로 향했다·
뒷자석에 앉아 느긋하게 핸드폰을 보려는데 생뚱맞게 막냇동생에게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오빠·]
“왜?”
[나 부탁 하나 들어줘·]
“뭐 해줄 건데?”
잠시 말이 끊기고 나서 대략 5초 정도 흘렀을 때 다시 막냇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언니랑 쇼핑 한번 가줄게· 새언니 요즘 우울해 보이던데?]
“안 우울해· 되게 즐거워해· 돈 쓰는 재미에 푹 빠졌어·”
[아 오빠 일 때문에 신혼여행 오래 못 갔잖아? 내가 좋은 곳으로····]
“내가 갈 시간이 어디 있냐? 네 새언니나 놀다 오겠지·”
[씨··· 그냥 한번 도와주면 안 돼?]
“끊는다·”
[잠깐만! 하아··· 안 되겠다· 내가 이거 안 꺼내려고 했는데 내 부탁 들어주면 오빠 결혼식 전날에 힐튼호텔에서 파티한 거 언니한테 입 다물고 있을게·]
순간 대성이 움찔한다·
“어?”
[뭘 모른 척하고 그래? 딱 걸렸는데 그냥 말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뭐? 뭘 원하는데?”
[신영금융 이형준 대표 있잖아? 여자친구 있는지 좀 알아봐 줘·]
강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인마 내가 한가해 보여?”
[한가하지 않은 거 아니까 부탁하는 거야· 그래서 싫어? 싫음 말고··· 새언니 오늘 쇼핑 간다고 들떴던데 안됐다· 많이 슬퍼하겠지? 그럼 끊는다?]
“잠깐만 하··· 알았어·”
[뭐라고? 크게 말해봐· 안 들렸어·]
“알았다고!”
[오케이· 최대한 빨리 알아봐 줘· 나 입 싼 거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
[조금 기분 나빠지려고 하지만 봐줄게· 끊어·]
강대성은 전화를 끊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씨발··· 어떻게 알았지?”
*
도수연 의원은 검찰이 수사를 종료하려 한다는 걸 알고 쾌재를 불렀다·
이제나저제나 마음을 졸이고 있던 상황에서 가슴에 묵직하게 올라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그녀에게 있어 가족은 어떤 상흔 하나 없이 지켜야 할 존재다·
가족에게 향할 수 있는 명백한 위험을 제거했다는 건 그녀를 채우고 있던 족쇄를 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형수야!”
“네 부르셨습니까·”
밖에 있던 강형수 보좌관이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분위기는 어때?”
“당내 분위기는 계속 안 좋습니다· 특히 검찰이 이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 것 같은 방향으로 가니까 의원님께서 더 날뛰지 않을까 걱정하는 말도 오가고 있습니다·”
“그렇겠네·”
안 그래도 지금 수사가 불완전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판국에 수사팀이 접으려고 하니 도수연이가 더 날뛰지 않겠냐는 말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이제 다음 단계로 진행할까요?”
“그래야지·”
“그런데····”
“뭐?”
“여당에서 의원님을 받아주는 건 확실한 겁니까? 지금 여당도 분위기가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거야 여당 의원들도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여당 유력 의원이 의원님의 입당을 허락한다고 해도 여당 의원들이 들고일어나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당장 움직이는 것보다 조금 시간을 두시는 게 어떨까요?”
도수연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나도 지금 상황에 움직인다는 게 부담스럽긴 하거든· 그런데 대선 경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왔잖아· 내가 입당 신청을 늦게 하면 그만큼 대선 경선에 변수로 작용할 거야· 그 변수가 유리하게 적용되면 모르겠지만 불리하게 적용되면 나도 천 의원도 힘들어져·”
“기왕 맞을 매면 일찍 맞겠다는 뜻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기자들에게 나눠줄 보도자료는····”
“지금까지 나를 향한 막말과 조롱이 도를 넘었고 그로 인해 내 정치적 신념을 오롯이 지키려면 통일평화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논조로 작성해· 기자들 부르고·”
“오늘 저녁 7시로 잡겠습니다· 그럼 8시 뉴스에 첫 꼭지로 나갈 수밖에 없을 테고 당내 중진 의원들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좋아·”
도수연 의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진짜 주사위는 던져졌다·
흔하디흔한 국회의원 중 하나로 남느냐 당을 옮기고 천보윤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뒤 대통령까지 넘보는 큰 정치인으로 가느냐·
이 모든 건 앞으로의 몇 달에 달려 있을 것이다·
*
남산의 하야트 호텔 1층 로비·
경원은 재숙을 다시 만났다·
“미안한지만 내가 오늘 좀 바빠서 그런데 무슨 일로 만나자고 했어요?”
어딘가 모르게 심통이 난 재숙은 형준이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짐작한 것 같았다·
경원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아니었다고··· 아무 여자도 없다고 잡아뗄까 아니면 여자가 있다는 걸 실토해야 할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수히 갈등했던 경원은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그때는 제가 너무 미안해서 만나자고 했어요·”
“미안했다니요?”
“아니 글쎄··· 전 우리 애가 누구를 만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거든요· 그런데 여자가 있다는 거 있죠?”
“어머 그랬어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미처 몰랐다는 표정을 짓는 재숙·
하지만 경원은 그 묘한 표정을 캐치하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고 자칫 잡아떼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 애가 지금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그런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날 수는 없다고··· 너무 미안해요·”
“그래요? 되게 사랑하나 보네요?”
그런데 경원의 말은 묘하게 재숙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오성그룹의 막내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성그룹의 핏줄에다가 예쁘고 어리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자가 있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한다?
재숙은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우리 애가 다른 건 몰라도 의리가 있거든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만나려면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 헤어진 후에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조금 고지식하죠?”
“아니요· 그게 맞는 거죠· 아들 잘 키우셨네·”
돌려 말했지만 아들 자랑이었고 노골적이었음에도 재숙의 마음을 흔들었다·
신영금융그룹이라는 거대 금융 재벌이면서 여자를 쉽게 보지 않는 젠틀한 면모까지 가진 남자·
이 바닥에서 돈 많은 남자는 찾기 쉬워도 젠틀하고 여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남자는 만나기 어려운 법이다·
특히 딸을 키우는 엄마에게 그런 사윗감은 결코 뺏기기 싫을 수밖에 없었다·
“잘 키우긴요· 그냥 지가 알아서 큰 거지· 하여튼 너무 미안하게 됐어요· 다은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런데··· 둘이 많이 사랑하나 봐요?”
재숙이 같은 질문을 두 번 던졌을 때 경원은 자신의 도박이 먹혔다는 걸 확신했다·
< 내전(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