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전(5) >
“글쎄요· 아 일단 음료수라도 드시겠어요?”
“그럴까요?”
방금전까지만 해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듯 심통난 모습을 보였던 재숙은 어느새 경원과 더 깊은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직원을 불러 음료를 주문하고 나자 경원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둘이 애틋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래 만난 건 아니라는데···”
“얼마나 만났는데요?”
“1년도 안 됐다고 하더라구요·”
“1년도 안 됐대요? 그렇게 오래 사귄 건 아니네···”
재숙의 입가에 슬며시 드리우는 미소·
경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죠· 그렇게 깊은 관계인지도 잘 모르겠고··· 사실 그 아이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좀 그렇더라구요·”
“좀··· 그렇다니요?”
“들어보니까 회사도 좋고 능력도 있다고는 하는데··· 집안이 좀···”
“평범하대요?”
“차라리 그냥 평범했으면 좋았겠어요·”
“그런데요?”
“아니 글쎄···”
경원은 순간적으로 짜증이 올라온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글쎄··· 그 아이 엄마가 어릴 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고 하더라구요·”
“어머 그래요?”
“네··· 차라리 돈이 좀 없으면 어때요? 돈 없어도 부모 사랑 듬뿍 받고 자라서 밝고 건강하게 자란 애면 아무 걱정이 없겠는데 엄마가 바람 나서 이혼했으면 어렸을 때부터 그 속이 속이었겠어요?”
“어머··· 너무 안 됐다·”
말은 안 됐다고 하면서 재숙의 표정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미묘하게 변했다·
안쓰러워하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다고 해야 할까?
경원은 재숙의 그런 표정을 캐치했다·
“맞아요 안 됐어요· 그런데 그런 힘든 사연을 겪으며 살아왔던 아이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럼요· 이해하죠·”
이해 못할 리가···
돈이 많으면 아무리 깨어있는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도 가족을 들이는 일에서 만큼은 보수적으로 변하기 십상이라는 걸 경원은 잘 알고 있었다·
“안 되긴 했지만 그냥 찝찝하고 그래요· 괜히 그런 아이 들였다가 돈 욕심 때문에 우리 애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까· 왜 맞고 자란 애들이 어른이 되면 그 폭력 그대로 물려준다고 하잖아요? 혹시 그 피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바람이라도 피우는 게 아닌가 싶고···”
“이해 된다·”
“그렇죠? 그래서 그 아이 이야기를 듣고 잠도 한숨 못자고 정신 심란해 죽겠어요·”
“그렇겠네요· 그럼 이제 어쩌시게요?”
눈을 빛내는 재숙을 보며 경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걱정이에요· 요즘 애들이 어디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지던가요? 쉽게 헤어질 거라면 어디 다은이를 두고 그렇게 목석처럼 있을 수 있었겠어요? 어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
재숙은 슬며시 경원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진의를 알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행여 자신이 섣부르게 말을 꺼냈다가 쓸데없는 일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경원이 한숨만 푹 쉬며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결국 재숙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네?”
“내가 한번 알아볼까요?”
“네? 어떻게···?”
“아니 그냥··· 어떤 아가씬가 해서···”
경원은 무릎을 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어머 그래주시면야 너무 감사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아휴 그냥 알아보기만 하는 건데요· 궁금해서···”
“네· 그럼 제가 그 아가씨 이름이랑 직장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호텔 직원을 불러 그 독하고 무서운 년의 이름과 직장을 알려주었다·
제발 재숙이 그년을 잡아주길 바라면서···
*
[도수연 의원 전격 탈당 선언!]
도수연 의원의 탈당 선언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야당의 얼굴마담이자 똑똑하고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여줬던 그녀의 탈당은 대선을 앞둔 통일평화당에 엄청난 악재였다·
당연히 야당 의원들은 도수연 의원실로 달려와 온갖 비난을 퍼부어댔지만 당연하게도 의원실의 문은 굳게 잠겨 있을 뿐이었다·
도수연 의원실에서 근무해야 할 직원들은 며칠간 때 아닌 휴가를 보내게 됐고 도 의원은 당분간 호텔에 캠프를 차리게 됐다·
“많이 힘드시죠?”
호텔에 들른 영훈을 도수연 의원이 흘깃 바라보더니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천보윤 의원은 뭐라고 하던가요?”
“천 의원님을 따르는 의원들에게 은밀히 도 의원님이 입당 신청을 할거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밑바닥부터 다지고 있는 중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강형수 보좌관이 영훈에게 말했다·
“의원님께서 어제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못 드셨습니다· 신경쓰셔서요·”
영훈이 그걸 듣고 고개를 돌렸다·
“기운 없어서 되겠습니까? 룸서비스 시키시죠·”
“공짜로 해주시는 거예요?”
“에이 농담도··· 국회의원이 호텔에서 공짜를 바라시는 건 아니죠?”
“여기로 오라고 한 게 결국 호텔 매출 늘리려고 부른 거 아니에요?”
“하하 그래도 이왕이면 저희 호텔로 오시면 빈방 채우고 다같이 윈윈이잖습니까· 그건 그렇고 저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물어보세요·”
“혹시 요즘도 삼청동 가십니까?”
도수연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대체 뭐 때문에 물어보는 건지 잠시 상상해보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형수야 잠깐 나가 있을래?”
“알겠습니다·”
강 보좌관이 나가고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왜 물어봐요?”
“흠···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좀 궁금했거든요·”
“내가 그 점쟁이와 친한 게?”
“도 의원님이 점쟁이의 말에 휘둘렸다는 게 궁금한 건 아닙니다· 그 점쟁이가 아직도 그 짓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거죠·”
“국회의원인 내가 점쟁이의 말에 휘둘린 게 의외가 아니었다구요?”
“네·”
“어째서요? 내 귀가 얇게 보였나보죠?”
“역린이라는 말 아시죠? 강대하고 적수가 없을 용의 유일한 약점· 사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누구나 한 가지씩 자신만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만 잘 공략하면 아무리 심기가 굳건한 사람이라도 흔들리게 마련이구요· 그 점쟁이는 그럴 능력이 있어 보였기에 의원님이 그 점쟁이에
게 휘둘린 건 크게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도 의원은 차마 뒷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발가벗겨진 듯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최영훈 상무가 무서워졌다는 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훈은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네요 안 만나고 있다니· 앞으로도 그 점쟁이는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바이오 단지 이전에 욕심 가지지 마시고·”
“그 말 하려고 왔군요?”
“다 정리됐는데 혹시나 보너스 같은 걸 바라다 일을 그르칠까 해서요· 하여튼 다 잘 돼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아!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아무거나 시켜 드세요·”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룸을 나갔다·
*
형준은 오늘따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민희의 마지막 얼굴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여주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계속 마음에 남아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면 당연히 일에도 실수가 생기는 법·
몇 번이나 비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실수하기도 했던 그는 퇴근시간이 되자 누구보다 빠르게 회사를 빠져나갔다·
HS물산 본사 건물이 있는 을지로 근처 명동의 한 삼계탕집·
평소 삼계탕을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형준은 이미 자리를 잡고 그녀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민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괜히 일하는데 전화를 걸면 없어보일까 싶어 그는 묵묵히 더 기다렸고 40여 분이 흘러서야 그녀가 가게에 나타났다·
“미안해요· 일이 늦게 끝나서· 민망했죠?”
“조금··· 주인 아주머니가 하도 째려봐서 기다리는 값으로 생각하라고 5만 원짜리 한 장 줬어· 안 그랬으면 쫓겨났을지도 몰라·”
“잘했어요·”
생각보다 민희의 표정은 나빠 보이지 않아 형준은 내심 안심했다·
그렇게 맛있게 삼계탕을 먹고 나서 민희는 자기가 쏜다며 놀랍게도 커피숍이 아닌 을지로 인근의 고급 바로 이끌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걸 알고 있기에 형준은 얼떨떨해했지만 술을 좋아하는지라 미소를 지으며 따라갔다·
막상 자리에 앉자 뭘 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그녀를 위해 너무 세지 않으면서 달달한 칵테일을 주문한 형준은 민희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계속 하고 싶어하던 눈치였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녀는 칵테일을 받아 들고 한참동안 컵을 매만지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어머님을 만났어요·”
“우리 엄마?”
“네·”
“뭐라고 했는데? 아니다· 뭐라고 했을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뻔하지·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안 헤어진다고 했어요·”
“잘했어· 신경쓰지 마· 어차피 결혼하면 같이 살 생각도 없었어·”
“칫··· 그래놓고 아직 프로포즈도 안 했잖아요?”
순간 형준은 당황했다·
“어? 어 아니 그건··· 내가 정신이 없었잖아·”
“알고 있어요·”
“그래· 솔직히 이번에 대표이사 안 됐으면 난 어떻게 됐을지 몰라· 그래서 이전에는 프로포즈 생각을 못했어· 기다려 내가 근사하게···”
“근사하게 필요없어요· 남들은 프로포즈를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난 그런 거 믿지 않아요·”
“어?”
“프로포즈 다 해놓고 나중에 가서 딴소리 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아? 난 그런 로망 없어요·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요·”
“약속? 그래 약속할게·”
“나 배신하지 말아요· 그러면 나도 당신 배신하지 않을게요· 나 배신하면 당신 죽여버릴 거야·”
섬뜩한 소리지만 이상하게 형준은 그런 그녀의 단호함과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놀 만큼 놀았고 여자들 만나볼 만큼 만나본 그였기에 다른 곳으로 눈돌릴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이야 운 좋게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지만 싸움이 끝난 건 아니었다·
최대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호시탐탐 지켜보는 상황에 돈은 많지만 어리버리하고 멍청한 여자와는 결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나 너 배신하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서라도 나 너 배신 못해·”
민희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형준 씨 어머니가 날 많이 싫어해요·”
“아까 말했잖아· 신경쓰지 마·”
“그리고 나도 형준 씨 어머니 싫어요·”
“어? 어···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를 싫어해서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날 알아요· 재벌 가문에서 보면 우리 집이 많이 부족하니까· 이해해요·”
“그럼?”
“이 말을 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형준 씨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형준 씨 어머님 지금도 다른 남자랑 만나고 있어요·”
형준은 너무 놀라 그저 입만 떡 벌렸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설마 지금도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
“전에 우리 계열사 호텔에서 혼자 점심 먹다가 어머님을 뵀었어요· 중년 남자랑 같이 있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뒤에 계속 알아봤어요·”
“뭐하는 사람인데?”
“화가예요·”
“하아···”
형준은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민희는 그가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형준 씨도 알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갔었던 게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어요· 난 지금도 그런 엄마를 용서할 수 없구요· 만약 내가 형준 씨와 결혼하게 되면 내 시어머니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거 두고 볼 수 없어요·”
“이해해·”
“그래서 어머님께 말씀드렸어요·”
“어? 뭐라고?”
“내가 형준 씨와 결혼하고 나서도 바람피우고 다니시면 정신병원에 넣어버리겠다구요·”
“허···”
형준은 이번에도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시어머니 될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는 지금에서야 알았다·
“미안해요·”
“어? 아니야 아니야· 잘했어·”
아마 형준의 과거가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면 어떻게 자신의 엄마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냐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를 오갔던 요 몇 년간 그를 괴롭힌 건 결국 화목하지 못했던 가정이라는 걸 뼈져리게 느낀 그였다·
“진짜 괜찮아요?”
“응 그 정도는 돼야 엄마가 정신 차리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난 솔직히 형준 씨가 화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도 그렇게 쎄게 말했던 거야?”
“그래야만 했으니까요· 난 형준 씨 어머니를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종처럼 부림당하면서 결혼생활을 할 수는 없어요·”
형준은 민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잘했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엄마도 믿을 수 없고 동생들도 믿을 수 없어· 너랑 나랑 둘이서 손 꼭 잡고 우리 잘 살아보자·”
“그 말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은 프로포즈였어요·”
민희는 부끄러운 듯 볼을 발갛게 물들었다·
< 내전(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