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 싸움(2) >
한 명은 HS그룹 회장이고 다른 한 명은 오성그룹 안주인이었기에 두 사람의 약속을 잡는 비서실 직원들은 상당한 눈치 싸움과 기 싸움을 해야 했다·
누구에게 더 편한 시간을 잡는가 누구에게 더 편한 동선을 짜는가에 따라 오너가 비서실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몇 번 약속 장소를 변경하다가 결국 정해진 곳은 남산의 반얀트리 호텔이었다·
오성그룹 역시 계열사로 호텔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느 호텔에서 만날지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다가 양쪽 모두와 관련이 없는 호텔로 정해진 것이다·
입구로 미끄러져 들어온 벤츠 S500 마이바흐에서 조재숙이 내리자 이미 연락을 받은 호텔 직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문을 열어 줬다·
그녀는 우아하게 선글라스를 끼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약속 장소인 이국적인 아시안 레스토랑의 1층으로 들어섰다·
지배인이 바짝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예약된 룸으로 안내하니 이미 그곳에서는 송은채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늦지는 않았죠?”
송 회장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네· 앉으세요·”
재숙은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살짝 당황했다·
보통은 누굴 만나더라도 자신을 보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데 이 여자는 엉덩이 한번 움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문은 하셨어요?”
“네· 비서실 통해서 이곳 음식을 즐겨 드신다고 들어서 좋아하신다는 코스로 시켰어요· 괜찮죠?”
“그럼요·”
송 회장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재숙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어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해 보라는 뜻이다·
누가 먼저 용건을 꺼내느냐는 것은 대화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는 것과 동일하다·
먼저 꺼내는 사람이 주도권을 잃는 것인데 아무래도 송은채 회장은 주도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재숙은 욱하는 마음이 올라오려 했으나 이내 오늘 아쉬운 사람은 자신임을 자각하고 입을 열었다·
“종종 마주쳤는데 우리 서로 대화가 많이 없었죠?”
“그랬던 것 같네요·”
“내가 좀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 나도 모르게 친한 사람하고만 계속 가까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이들 아빠는 그런 내성적인 성격 바꿔 보라고 이것저것 손에 쥐여 주는데 전 사업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미술 쪽으로만 손을 대고 있어요· 사업적인 마인드는 아니고 그냥 취미이자 문화
활동 같은 거예요· 언제 시간 나시면 우리 미술관에 놀러 오세요·”
“그러도록 할게요·”
오성그룹이 가지고 있는 아르떼 미술관은 인사동에서 꽤 알아주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 나이 정도 되면 아이들 걱정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서 여유롭게 노후 생활을 보낼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되지가 않네요· 성인이 됐는데도 아직 아이들에게 손이 많이 가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전에 따님이 결혼하셨다죠?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청첩장을 왜 안 줬냐고 물어보기가 민망하네요· 따지고 보면 우리 둘째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여러모로 내가 많이 부족한 걸 깨달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살다 보면 손에 닿는 것만 처리해도 버거울 때가 있는 거니까요·”
“이해해 주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네요· 실은 우리 막내가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보면 구시대적이라고 해야 할지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는 듯해요·”
송 회장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네· 남들은 경영을 해 보겠다 예술을 해 보겠다 너무 설쳐서 문제라는데· 우리 애는 지금껏 사고 한번 안 치고 조용히 학교를 다녔지만 그렇다고 남보다 뛰어난 특기를 가지지도 못했고 더 잘하려는 마음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러고선 하는 말이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대요· 현모양처
가 되고 싶다나?”
“정말 요즘 아이들 같지 않네요·”
“그러니까요· 그러다 보니 저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너 알아서 해라’ 하고 싶은데 그 눈을 믿을 수도 없고 워낙 순진하거든요· 그래서 누구를 소개해 줘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아이 아빠가 신영금융 대표를 넌지시 권하더라고요·”
“아····”
“이후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신영금융 대표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하필 그 여자가 HS물산에서 근무하고 있더군요·”
“그게 민희라는 거죠?”
“네· 사실 굳이 회장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나 생각했었어요· 그냥 따로 만나서 해결하면 되는 게 아닐까 했는데···· 그냥 일개 직원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송은채 회장은 오성그룹의 정보력에 내심 감탄했다·
민희가 단순히 수많은 임원 비서 중 하나가 아니라는 건 그룹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자신조차도 사위가 민희를 그렇게 중요하게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실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때 많이 놀라기도 했었다·
“저희 회사 내부 사정을 꽤 잘 아시네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HS그룹을 뒷조사한 게 아니라 그 직원에 대해서만 알아본 거니까·”
“어떻게 알아봤어요?”
“우리 직원이 퇴직한 비서실 직원을 통해 들었다고 하더군요·”
송 회장은 살짝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만큼 마음이 급하다고 여겼다·
“퇴사한 직원도 찾아내고···· 능력 좋군요·”
“능력이 좋은 사람들만 뽑으니까요· 어쨌든 그냥 그 여직원 불러 앉혀서 무작정 대화를 나눴다간 괜히 회장님께서 감정이 상하시지 않을까 싶었어요·”
고작 집안도 별 볼 일 없는 남의 회사 여직원을 처리하는 데 굳이 그 회사 회장까지 만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알아보니 집안은 별 볼 일 없지만 회장이 총애하는 직원이라고 하여 재숙의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아무리 왕비 같은 그녀라고 해도 무작정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오지는 않았던 그녀였다·
최소한 외부에 불미스러운 일로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게 처신했던 그녀였으니 이번 일도 괜히 HS그룹에서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순간 재숙은 송 회장의 눈을 마주했다·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생각을 물으셨나요?”
“네·”
송 회장은 미소를 거두고 담담히 대답했다·
“민희는 내가 아끼는 직원인데 그걸 떠나서 난 직원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이 없어요·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다만····”
“다만?”
“민희는 내 사위의 비서고 이형준 대표는 내 사위와 아주 친해요· 아마 사위가 둘을 연결해 줬을 텐데 만약 사모님이 민희의 생각을 억지로 돌리려고 하면 우리 사위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질 거예요·”
재숙은 일이 결코 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님을 깨달았다·
“회장님을 만나서 대화하기를 잘했네요· 자칫 내 마음대로 움직였으면 회장님을 곤란하게 할 뻔했으니까요·”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위분이 많이 곤란해할까요?”
“네·”
단호한 송 회장의 대답·
“이유가 어떻게 되죠? 소개해 주고 둘이 헤어지는 경우는 많잖아요?”
송은채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재숙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모님 저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사위를 오래 겪어서 그런지 사위의 어법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사위는 어지간해서는 돌려 말하지 않는데 저도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그러세요·”
“이형준이라는 남자를 원하는 게 아니라 신영금융을 원하시는 거죠?”
“아니라고는 할 수 없네요·”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네?”
“이형준 대표가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그건 우리 사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형준 대표가 오성그룹의 사위가 된다? 우리 사위가 그냥 두고 보지 않아요·”
재숙은 잠시 송 회장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만큼 송 회장의 말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HS그룹은 신영금융과 같은 식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맞아요· 그러니 오성그룹이 신영금융 대표를 사위로 맞이하려는 건 우리와 싸우자는 것과 같아요·”
지금까지 자신들을 향해 이런 식의 도발을 걸어올 회사가 있으리라고 재숙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못할 때 송은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불편한 대화가 오갔으니 오늘 식사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해요· 그리고 사람의 인연이란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군요· 사모님의 따님은 훌륭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송은채 회장은 그렇게 식당을 나가 버렸다·
*
태국에 도착한 영훈 일행은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유명 휴양지인 파타야로 이동했다·
우따마 장관이 파타야로 불렀기 때문이다·
몇 시간을 차로 이동해 도착한 곳은 수영장이 딸린 거대한 저택이었다·
그는 둔탁한 영어 발음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영훈 일행을 웃으며 반겼다·
마치 불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 친근한 모습에 영훈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친한 척 미소를 지으며 반긴 그는 석유공사 직원을 보내고 통역이 가능한 고승현 상무만을 남겨 놓은 채 자리에 앉도록 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소·”
“좋은 곳이군요·”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항상 날 부럽게 바라보곤 하오· 당신도 그런가?”
영훈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우따마 장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말을 이었다·
“이 저택은 내 것이 아니오· 내가 장관 자리에 있을 때까지만 나에게 허락된 것이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면 내가 가진 대부분의 사치품은 전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오·”
그는 과장되게 손을 휘저어 연기를 표현하고는 영훈에게 말했다·
“당신의 그 말은 참으로 인상 깊었소· 그래서 묻겠는데 내가 이 자리에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게 당신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소?”
영훈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며 쳐다보는 우따마 장관에게 말했다·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꽤 오래전에 책에서 이런 구절을 봤습니다· ‘재물은 물과 같다’· 장관님은 그 자리에 오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장관에 오른 지는 3년 정도 됐지만 에너지부에 바친 내 인생은 이십 년도 넘었소·”
“훌륭한 분이시군요· 한곳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것이오?”
“말했듯이 재물은 물과 같습니다· 장관님은 그 자리에 오래 있었고 물은 한곳에 오래도록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죠· 이럴 때 재물을 더 얻겠다고 계속 자리에 붙어 있으면 어찌 될까요?”
“···”
“물은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길 테고 결국 썩은 물이 사람들을 불러들일 겁니다· 그 썩은 냄새를 정화하려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대의 답은 무엇이오?”
“오래되고 고여 있는 물은 버리고 새로운 물을 담으면 됩니다·”
우따마 장관이 인상을 팍 일그러뜨렸다·
“지금 장난하는 거요? 내가 처한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 준다고 하지 않았소!”
영훈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자를 끌고 와 그의 바로 앞에 놓고는 거기에 앉아 말했다·
“장관님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 주려는 겁니다· 에너지부 장관 자리에서 더 버텨 보실 생각입니까? 한두 번은 장관님을 도와 정적의 위협에서 지켜 드릴 수 있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큰돈은 그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될까요?”
고 상무는 영훈의 말을 통역하고는 이어 우따마 장관이 지금까지 장관 자리에서 행했던 각종 부조리와 부패 관련 혐의를 읊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내용이지만 그걸 타국 사람이 읊어 대니 그의 입장에선 또 다른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무거워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영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장관님은 한 자리에 계속 눌러앉아 윗사람 눈치나 보며 일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윗사람이란 태국 왕을 뜻했다·
불충하고 위험한 표현이었지만 놀랍게도 우따마 장관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크게 일하십시오· 전 세계를 당신의 무대로 삼으세요· 난 당신이 우리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관님이 아닌 당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표현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파트너? 태국을 떠나라는 건가?”
“네· 정적으로 둘러싸인 이곳 태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세요· 아니면 홍콩 미국 유럽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후원하겠습니다·”
“날 자네 회사의 로비스트로 만들 생각이군? 그 첫 번째 일이 이번 가스전 사업일 테고·”
“이번 사업은 첫발을 뗀 것일 뿐입니다· HS그룹은 전 세계를 상대로 수많은 물품을 거래하고 있습니다· 고작 허가 한 번에 몇십만 달러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진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따마 장관의 눈빛이 야망으로 가득 차올랐다·
< 고래 싸움(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