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 싸움(3) >
영훈이 태국에서 우따마 장관과 만나고 있는 그 시각 오성그룹의 강대성 전략실장은 한눈에 봐도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어머니가 직접 회사 근처로 찾아온 상황이라 그는 차마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넌 엄마가 찾아왔는데 계속 그렇게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야겠니?”
“귀찮다기보단 바쁘니까 그렇죠· 아시잖아요? 바쁜 거·”
둘째 아들이 퉁명스럽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성전자를 물려받을 게 확실한 형 때문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성그룹의 전대 회장은 형제들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 혜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지금의 부회장 역시 능력이 뛰어난 자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줄 것이 확실했고 또 실제로 강대성을 적당한 계열사 임원으로 앉히지 않고 그룹의 전략실장으로 배치했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 형의 뒷바라지를 하라는 말과 다름없다는 뜻으로 대성은 받아들였다·
어디 가서 티는 내지 못하지만 그나마 어머니 앞에서는 기분을 드러내는 대성이었다·
“너 요즘 너무 냉정하게 변했어· 아니?”
“도와줄 거 아니면 자꾸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요· 엄마 아들 몰라요? 나 그렇게 착하게 키우지 않았으면서?”
“어휴··· 네 아버지는 왜 그런다니?”
“그런 소리는 됐고요 나 점심 먹고 들어가야 해요· 왜 왔어요?”
“알면서 뭘 물어보니?”
“다은이 때문에 그래요?”
“그래· 나 어제 HS그룹 송은채 회장 만나고 왔다·”
강대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송은채 회장? 송 회장은 왜요?”
“내 나름대로 알아보니까···· 아 직원한테 이야기 들은 거 맞지?”
“네· 엄마가 다은이 남편감의 여자 뒷조사 부탁한 거 들었어요·”
“그래· 그 여자애 알아보니까 송은채 회장이 꽤 총애하는 여직원이더라고· 느낌이 이상했지· 그냥 운으로 만난 것 같지가 않은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도?”
“희한하게 HS그룹이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고작 비서 주제에 대표이사를 만나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지금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HS그룹이 관련돼 있다는 게··· 하필 이것까지 엮이니까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어요·”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뭔데?”
“대선이요·”
“대선?”
“네· 우리가 밀어주는 후보와 반대편에 선 후보를 HS그룹에서 밀고 있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정확한 건 아니라서 나중에 헛소문으로 밝혀질 수도 있는데 하필 다은이 일에 HS그룹이 엮여 있다고 하니까 마냥 뜬소문처럼 생각되지가 않아요·”
재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둘째 아들에게 말했다·
“이형준 대표이사는 어떤 것 같아?”
“사람? 아니면 다른 걸 물어보는 거예요?”
“사람· 어떤 사람 같냐고· 넌 이미 알아봤을 거 아니니? 주변 친구들한테도 들었을 테고·”
“소문이야 지금까지 많이 듣긴 했죠· 몇 년 전까지는 꽤 방탕하게 살았다고 들었는데 요 몇 년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이상해요·”
“그게 뭐가 이상해?”
“이경호 회장이 죽기 전에 이형준 대표가 이세준 부회장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굉장한 루머가 터졌잖아요? 신영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세명 사장의 양자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가 결국 이형준 대표가 아버지를 몰아냈어요· 사실로 드러난 건데··· 루머가 터지기 전까
지 이형준 대표가 그룹 내에서 굉장히 좋은 이미지를 쌓고 있었대요·”
“그래 그랬지·”
“어머니도 알겠지만 사람이 바뀌는 게 어디 쉬워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고 착실하게 회사 내에서 이미지를 관리하면서 자기 편을 늘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통 후계자인 아버지의 뒤를 친다···· 이거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재숙은 둘째 아들의 추리력에 감탄했다·
“역시 우리 아들 똑똑해·”
“똑똑하면 뭐 해? 형한테 다 줄 거면서·”
“넌 진짜···· 어쨌든 송 회장에게 들었어· 이형준 대표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게 전부 자기 사위 덕이라는 거야·”
“와 그걸 직접 거론했어요? 자기 입으로?”
“그래·”
“무슨 자신감이야? 그 말이 이형준 대표 귀에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건가?”
“자기 사위랑 이형준 대표랑 절친이래·”
대성의 미간이 팍 찌그러졌다·
“예? 절친이요? 아 시팔··· 어머니 포기해요·”
“뭘 포기해?”
“다은이 포기하라고요· 송은채 회장 사위면 최영훈 기조실장이고 그룹 최고 실세잖아요· 그 인간하고 이형준 대표가 절친이면 그 여자 소개해 준 사람이 최영훈 그 인간이겠네·”
“그 이야기도 하더라·”
“그럼 끝났네·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해요? 포기해요·”
“후··· 난 포기한다고 쳐· 너희 아빠는?”
“아빠도 포기하시겠죠· 안 되는 거 억지로 밀어붙이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자존심이 상하실 텐데?”
순간 대성이 멈칫했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니 방금 자신이 말하고도 까먹었던 내용이 번뜩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네? 다은이 결혼이야 관심 없는데 다은이 남편감도 까이고 만약 대선에서 우리가 미는 후보가 또 밀리면··· 아버지가 많이 화나겠는데요?”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하니?”
“뭘 어떡해요?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되지·”
대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태도를 싹 버렸다·
여동생의 결혼이 여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다·
이번 일을 실수해서 아버지의 눈 밖에 나면 그나마 달고 있는 전략실장이라는 직책조차 보존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코딱지만 한 식품 회사 하나 물려받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는 작은아버지처럼 볼품없이 늙어갈 게 분명했다·
“그럼 어쩌게?”
어머니인 재숙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성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머니는 그냥 가만히 계세요· 괜히 다은이 생각한다고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고·”
“알았어· 실수하지 마· 너희 아버지 성격 알지?”
“걱정하지 말아요·”
대성은 밥은 다 먹었다고 생각하며 바로 회사로 올라갔다·
*
우따마 태국 에너지부 장관은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출근해서는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중요한 보고서 결재를 마무리 지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우따마 장관이 퇴근하기 위해 차에 타는 순간 누군가 차 문을 쾅 때리며 막아섰다·
“미스터 사와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어디서 나타난 건지 엘리샤 레키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얼마 전 파티에서 천사처럼 웃으며 그의 품에 안기듯 했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데 이런 상황을 짐작했던 우따마 장관으로서도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요?”
“내 앞에서 거짓말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차기 에라완과 본코트의 가스전 채취 사업권을 한국의 기업에 넘기기로 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우따마 장관은 어이가 없었다·
오늘 결재한 사항인데 퇴근하기도 전에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
부하 직원 누군가가 쉐브론에 정보를 넘긴 것이다·
자신만으로는 믿을 수 없어 부하 직원들도 미리 매수했던 거다·
“이상하군· 내가 당신들에게 어떤 확답이라도 주었단 말인가? 아니면 나와 무슨 거래라도 있었던 건가?”
“당신··· 지금까지 당신에게 들어간 돈 그냥 용돈이라고 생각한 건가요?”
“계산은 확실하게 하지· 애초부터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신들이 사업권을 딸 수 있었을 줄 알아? 당연히 받아야 했을 돈이었어·”
“웃기지 마! 우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장관 자리에 앉지도 못했지·”
“흥! 그게 날 위해서였나? 당신들이 추가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날 장관 자리에 앉힐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엘리샤 레키는 그녀의 가방에서 마치 총을 꺼내는 것처럼 작은 만년필을 꺼냈다·
그 만년필의 뒤쪽 뚜껑을 여니 작은 칼날이 드러났다·
영문을 모르는 우따마 장관이 멍하니 쳐다보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만년필 뒷부분의 칼날로 자신의 손바닥을 스윽 그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손바닥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거래를 했는지 몰라도 정신 차려· 연간 생산량만 40억 달러가 넘는 이 사업이 틀어지면 나 살아서 태국 못 나가· 그럼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이 받은 돈을 생각해· 과연 당신을 그냥 놔둘까?”
이때 멀리서 지켜보던 경비원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우따마 장관은 별일 아니라며 경비원들을 돌려보내곤 그녀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지랄하지 마! 너희들이 내 덕에 번 돈에 비하면 내가 받은 건 먼지 한 줌도 되지 않아· 그래 네가 나와 잔 거? 그게 억울한가? 그건 좀 미안하군· 정 억울하면 내가 태국에서 가장 비싼 창녀 화대만큼 지불해 주지·”
엘리샤 레키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똑똑히 기억해· 그 결재가 왕에게 올라가는 순간 당신은 장관 자리를 1년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거니까· 아니 반년도 버티지 못할걸?”
“알아들었으니까 손 치우지?”
그녀는 우따마 장관을 노려보다가 피를 차 문에 스윽 묻히곤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모습에 우따마 장관은 지금까지 자신을 한 나라의 장관으로 대우해 주는 듯하면서도 그 속내가 어떠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섬뜩할 만한 협박을 했지만 오히려 그 협박은 그의 생각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
오성그룹 일가의 막내딸인 다은은 오빠가 일을 해결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기다리는 게 싫어서가 아니다·
결혼에 환장한 여자도 아니고 이형준이라는 남자를 알면 얼마나 알며 호감이 생겼으면 얼마나 생겼을까·
어차피 대학 졸업도 못 했고 나이도 어리니 1년을 기다리라면 기다릴 테고 3년을 기다리라면 기다릴 수 있었다·
잘 놀다 보면 시간은 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한 번 보고 까인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남자 문제를 둘째 오빠에게 맡긴 상황도 화가 났고 아무것도 못 하고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라는 엄마의 말도 다은을 화나게 했다·
졸지에 결혼 못 해 환장한 여자가 남자를 잊지 못하고 가족들을 움직여 어떻게 해 보려는 처량한 여자 신세가 되고 만 거였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느끼기에 그녀의 처지는 그랬다·
누구에게 해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자신의 이런 상황을 이형준 대표가 혹시 알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답답해졌다·
쪽팔리고 짜증 나서 가만히 있어도 울화가 치밀었다·
차라리 그냥 포기하라고 하면 어떤 미련도 없이 깨끗하게 마음을 접을 수 있는데 그건 또 아니라고 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저히 참지 못한 그녀는 새벽부터 일어나 청담동 숍에서 풀 메이크업으로 빡세게 치장했다·
그리고 무작정 HS물산으로 향했다·
행여 오성그룹 사람이나 가족들이 알면 말릴까 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런데 막상 HS물산 사옥에 도착한 그녀는 그 문제의 여자의 연락처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로비에서 그녀를 불러내 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행여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기획조정실 김민희라는 여자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비의 직원이 그녀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리곤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기 뒤에 오고 계시네요·”
다은이 뒤를 돌아보자 일단의 무리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오고 있었다·
조용히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이지 남자 때문에 싸우러 왔다고 광고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는지라 다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분은···?”
“김민희 씨를 만나러 오셨다고 합니다·”
연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보여 주려 하지 않는 여자를 흘깃 보다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먼저 올라갈래요? 민희 씨는 여기 남고·”
연희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있는 다은에게 말했다·
“다은이 맞니?”
“어? 언니?”
“반갑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렇지? 자리 옮길까?”
“네·”
다은은 연희의 뒤편에 서 있는 민희를 스치듯 탐색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그렇게 두 여자를 데리고 본사 지하 1층의 작은 소강당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강당에 불을 켜 준 연희는 잠깐 다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자리 피해 줄게· 그래도 성질대로 하면 안 된다· 우리 회사 직원인 거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연희는 다은의 어깨를 톡톡 털어 주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연희가 자리를 피해 주니 그나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다은은 전투력을 가득 높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연희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다소곳이 서 있던 민희라는 여자는 언제부터인지 강당의 앞자리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다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다·
저건 비웃는 게 확실했다·
< 고래 싸움(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