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돌(2) >
형준의 엄마인 경원은 재숙과 통화한 뒤 냉수부터 찾았다·
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이 어디 냉수 한 잔으로 식혀질까·
마음 같아서는 아들이 있는 회사로 쳐들어가 한바탕 뒤집어놓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다시는 회사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 같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들이 퇴근한 10시 무렵까지 거실에서 팔짱을 낀 채 서릿발을 풀풀 날리며 기다렸다·
“저 왔어요·”
“이리 앉아라·”
형준은 넥타이를 풀며 귀찮다는 표정과 함께 소파에 몸을 맡겼다·
“왜 그래요? 나 피곤해·”
“피곤하긴··· 너 회식도 없었다며? 또 그 민희인가 하는 걔랑 놀다 왔을 거 아니야?”
“퇴근하고 나서 밥먹고 커피 마시고 온 거예요· 이런 것도 엄마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야?”
“너 걔랑 진짜 결혼할 거야?”
“아··· 또 했던 얘기··· 엄마 그러지 말고 그냥 져줘요· 엄마 걔 못 이겨· 걔 보통 애 아니야·”
‘보통 애 아닌 건 알고 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그녀가 애써 그 말을 집어삼키곤 소리쳤다·
“어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이기려고 해!”
“쉽게 질 것 같은 성격이 아닌데··· 하여튼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엄마가 나 설득한다고 내가 고쳐먹을 상황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그리고 만나 보니까 다은이는 내 스타일 아니에요·”
“무슨 소리 하니? 다은이가 얼마나 예쁜데?”
“못생긴 편은 아니긴 하지만 솔직히 다은이는 오성그룹빨인 거 엄마도 인정해야 해요· 그만한 재산이 있는 것 치고 예쁜 거지· 객관적으로 보면 예쁘기도 민희가 더 예쁜 거 엄마도 봐서 알잖아요·”
그녀는 더 뭐라고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녀라고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왜 모를까·
그걸 알고 있기에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거다·
“하아···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하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어· 너 오성그룹 강 부회장님이 찾으셔·”
형준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 사람이 왜요?”
“그 사람이라니? 너 행여 우리 가족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청와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대통령은 따로 있어·”
“아니 됐구요· 그 사람이 날 왜 보자고 하는데요?”
“뭐 때문이겠니? 사위 될 사람 얼굴이나 한번 보겠다는 거지·”
형준은 괴로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누구한테 연락 왔어요?”
“사모한테·”
“안 된다고 해요· 바쁘다고·”
“이형준!”
“엄마가 원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만나기만 하는 거야· 너가 그렇게 싫으면 그 양반 만나서 싫다고 하면 되잖아· 가서 싫다고 해!”
“내가 왜요? 내가 그 자리에 가면 나 민희한테 욕 엄청 먹을걸?”
“뭐야! 걔가 뭐라고 널 욕해! 너 그러고 사니?”
“욕 먹을 만해· 만날 거면 공식적으로 만나야 내가 신영금융 대표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 집을 찾아가 봐· 그건 그냥 친구 아들로 가서 앉아 있는 거라구요· 나한테 ‘너 이새끼 우리 딸이랑 결혼해’라고 할지도 몰라·”
똥개도 자기 집 마당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그냥 남의 집도 아니고 오성그룹 부회장 집에 일단 들어가는 순간 반은 지고 들어간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어머 어머··· 너 부회장님이랑 맞먹으려고 그러니?”
“나도 이제 신영금융그룹 대표예요· 엄마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날 사윗감으로 들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난 여자가 있고 결혼 생각도 있어요· 그리고 무슨 엄마가 아들을 호랑이 굴로 보내려고 해요? 거기가 호랑이 굴인지는 알고 그러는 거예요?”
“거기가 왜 호랑이 굴이야!”
형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 자꾸 안 되는 걸로 애쓰지 말아요· 자꾸 그러면 나 결혼한 다음에 엄마 자주 못 봐·”
형준은 차마 엄마 앞에서 정신병원이라는 단어는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꺼내지 않았을 뿐 형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재숙은 모르지 않았다·
“너 너 너···”
“그리고 민희야 항상 내 편이니까 그냥 욕하고 말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욕하고 끝내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인간 화나면 솔직히 나 무서워· 어떻게 행동할지 감이 안 잡히는 인간이거든·”
형준에게 있어 결코 적으로 만나지 않아야 할 인물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도 오성그룹 강 부회장도 아니었다·
“그게 누군데?”
“엄마는 몰라도 돼· 어쨌든 나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으면 공식적으로 비서실 통해서 약속 잡으라고 해요· 물론 그것도 시간이 돼야 만나겠지만·”
그렇게 형준이 쌩하니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자 경원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는 축 처진 어깨로 안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
작전 실패를 보고해야 하니 어깨에 힘이 들어갈 리 없다·
*
강대성은 자정이 가까워 옴에도 아직 회사에서 여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야식을 먹으며 수많은 서류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거 가지고 되겠어? 자식들은?”
“첫째 아들인 천지수의 중학교 1학년 때 성적을 보면 반 석차가 20등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3학년 이후로 10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습니다·”
“과외야?”
“학원을 다닌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학원비가 매달 백만 원 가까이 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백만 원? 애매하네··· 타이틀을 뭐라고 잡으려고?”
“이 정도면 과외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들 고액과외 한 천보윤 의원 서민들 교육 걱정 자격있나? 이런식으로 초점을 잡으면 어떨까요?”
“흐음··· 약한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픽스해 놓고 다른 거 찾아보자·”
“알겠습니다·”
민구상 의원이 능력이 없다고 한들 그렇다고 민 의원을 잘라내기에는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돈이 있다·
게다가 이제 와서 천보윤 의원과 손을 잡는다?
천 의원이 순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데다가 이미 천 의원은 HS그룹과 손을 잡았을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이니 일단 민구상 의원을 대선 후보로 밀어주는 게 맞다·
문제는 가만히 이길 수 있게 지켜봐준다고 그가 이기는 건 아니라는 거다·
정치인 그것도 당 대표 정도 되는 자리에 있기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 한계가 있고 자칫 사람을 잘못 부리다간 말이 새어나가 크게 곤란해질 수 있다·
깔끔하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오성그룹에서 대선전략을 싹 짜주는 거다·
이제 대선경선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오성그룹 전략실에 불이 꺼지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 였다·
이때 엄마인 재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성은 전화를 받자마자 퉁명스레 말했다·
“엄마 왜 또 전화야? 새롬이가 또 나 안 들어온다고 뭐라고 해? 내가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래? 그럼 왜 전화했어?”
[말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 일찍 좀 들어가· 새아기가 하루종일 심심해 한다· 아주 그냥 이마에 심심해가 적혀 있어·]
“내가 놀아요?”
[에휴··· 그래· 그건 됐고 방금 이형준 대표 엄마랑 통화했어·]
“뭐래요?”
[집에 안 오겠다고 했대· 만나고 싶으면 공식적으로 비서실 통해서 스케줄 잡으라고 했단다·]
대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거 미친 놈이네? 제까짓 게 진짜 우리 아버지랑 맞먹겠다는 거야 뭐야?”
[내 말이··· 회사 대표라고 진짜 똑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제는 나도 싫다· 저런 애가 우리 다은이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우리 다은이가 얼마나 구박 받고 살겠니?]
“에이··· 그렇다고 구박까지 가는 건 너무 갔고 그냥 마누라한테 잡혀 살지 않는 정도겠지·”
오성그룹 막대딸이 아내가 되면 그 어느 남자라고 해도 잡혀 살지 않는 게 이상할 수준이다·
[그게 그 말이지·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같이 살 부대끼고 살아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할 일이야·]
“그건 뭐 엄마 입장이니까 내가 이해할게· 그런데 아버지랑 맞먹겠다는 건 선을 넘었지· 지네 아버지 젖히고 그 자리 앉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뭐래?”
[내가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네 아버지한테 이거 말해야 하는 거니? 불호령 떨어지는 거 아니야?]
“말해야지·”
[그럼 이 결혼 쫑나는 거 아니냐고?]
“방금 전에는 싫다며? 쫑나면 잘된 거 아니야?”
[넌 애가 왜 그렇게 단편적이니? 말이 그렇다는거지·]
“아버지 포기 안 하십니다· 엄마는 아버지를 그렇게 겪어보고도 몰라? 싸가지는 싸가지고 돈은 돈이거든· 싸가지 없다고 돈을 포기하실 양반이 아니십니다·”
[그래? 알았어· 네 아버지한테 말할게·]
“전략실에서 그쪽 비서실에 연락해본다고 전해요·”
[알았다· 네가 고생 좀 해· 끊는다· 밥 꼭 챙겨 먹고·]
“예 지금도 먹고 있어·”
[끝나고 여자 만나지 말고·]
“엄마···”
전화가 끊기자 대성은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새끼가 감히···”
“왜 그러십니까?”
“내일 아침에 신영금융지주 대표이사실에 연락 넣어· 아버지랑 보자고· 하아··· 뭐라고 하지?”
전략실 직원은 재빨리 의견을 냈다·
“신영투자증권이 뉴욕에 지점을 낸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눈에 띄는 성장세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뉴욕··· 혹시···?”
“네 펜실베니아에 오성전자 공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직원들 급여랑 투자자산을 신영투자증권으로 연계해준다는 말이지?”
“대신 추가 투자 시 이자율 할인을 걸고 협상하자고 하면 혹할 만한 미끼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흐음··· 괜찮네· 그걸로 내일 보내봐·”
“그런데 만약 이형준 대표이사가 약속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설마 그럴까 싶긴 한데 이 미친놈 하는 거 보니까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오성생명이랑 손보 그리고 오성토탈 직원들 급여랑 IRP 전부 신영이랑 연계돼 있지?”
“그렇습니다· 오성에너지도 그렇습니다·”
“많기도 하네· 약속 거절하면 급여통장 잘라버리고 다른 은행으로 갈아탄다고 해· 그리고 앞으로 전 그룹사 신입사원 IRP는 신영금융 계열사와는 절대 거래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아 신영투증에 들어간 리츠 투자금 전부 회수할 거라고 하고· 아니다· 그냥 싹 다 빼버릴 거라고 해·”
“알겠습니다·”
“어디 이번 약속도 거절해 보시든가···”
강대성은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퇴근도 못하고 스트레스를 왕창 받는 상황이라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
“미친놈들이네? 결혼에 환장한 놈들인가? 아니면 우리 회사에 환장한 놈들인가? 아니 그 정도 가지고 있으면 좀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니야· 뭘 이렇게까지 달려들어? 딸 자식 가지고 더럽게 장사하려고 하네·”
형준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을 통해 들려온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어 했다·
미국 지점이고 나발이고 상대방 속이 빤히 보이는지라 거절하라고 했는데 조금 뒤 다시 들려온 소식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협박이었다·
급여통장 옮기겠다는 거야 은행 입장에서 몇 번 들어오긴 했어도 오성그룹 정도 되는 거대기업이 이런식으로 치졸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하면 일단 안 만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오성그룹과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건 법인영업을 사실상 포기한다는 뜻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요?”
눈치를 보는 비서에게 형준이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모레요?”
“네 오성전자 강남 사옥에서···”
“을지로 리츠 칼튼 호텔에서 보자고 해요· 시간은 5시·”
“네? 어··· 강재식 부회장님이 강남 사옥에서 만나자고 하셨는데···”
“강 부회장이 그렇게 하자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을지로 리츠 칼튼 호텔 5시예요· 그렇게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형준은 정신 못차리는 비서를 밖으로 내보내고 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영훈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이번만큼은 형준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 충돌(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