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돌(3) >
강재식 부회장은 평소 회사에서 큰 소리도 잘 치지 않고 별것 아닌 일로 직원들을 괴롭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랫사람들은 항상 그의 기분을 체크했다·
그의 심기가 편찮은지 아닌지는 사소한 손짓 하나에도 드러난다·
결재를 받아 처리하는 손놀림이 부드럽지 못하고 날이 서 있을 땐 결재를 받는 고위 임원진들이 바짝 긴장을 하곤 했다·
자칫 잘못하면 결재 서류가 얼굴로 날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서진들도 마찬가지로 그가 오늘따라 차 맛이 어떻다고 지적하면 그날은 비서실 전체에 비상이 걸리고 발걸음 소리조차 신경 써서 걸어야 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방정맞다며 해당 여직원을 다른 부서로 쫓아내기도 했었으니까·
오늘도 그랬다·
아침에 둘째 아들이자 전략실장인 강대성 실장이 접견하고 나온 뒤로 부회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모든 이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때 오전에 방문해 부회장의 심기를 어지럽혔던 문제의 전략실장이 다시 방문했다·
강대성이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서자 강재식 부회장은 창밖으로 몸을 돌린 채 보기만 해도 편안해 보이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성입니다·”
“·······”
“부회장님?”
“피곤하구나·”
“네?”
“여기서 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항상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저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인간들을 먹여 살릴 생각을 하면 쏟아지던 졸음도 저 멀리 사라졌지·”
“·······”
“그런데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는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감흥이 없어 감흥이···· 죽을 때가 돼서 그런 걸까?”
“그럴 리가요·”
“그래 그럴 리 없지· 그럼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니?”
순간 대성은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짜릿하게 흐르는 걸 느꼈다·
흥분돼서가 아니었다·
긴장해서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대성아·”
“네·”
“넌 그게 문제야· 머리는 똑똑한데 그걸 쓸 줄을 몰라·”
대성은 아버지에게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수십 번도 넘게 들었지만 역시나 지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알아듣기는 하지만 실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아니야· 미안해할 것도 없다· 굳이 미안하려면 너 자신에게 미안해야겠지·”
“·······”
“직원이면 그냥 적당히 알맞은 곳에 쓰면 되겠지만 넌 내 아들이다· 그러니 내가 잔소리를 그만둘 수가 없어·”
“더 노력하겠습니다·”
“회사에 수많은 직위와 부서가 있고 그마다 사람의 쓰임이 다르다· 어느 부서는 몇 번만 봐도 줄줄이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찰떡이고 어느 부서는 살살 달래거나 어르고 뺨 때릴 정도로 능청스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찰떡이기도 하다· 그런데 넌 어떠냐?”
“전····”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럼 난 어떠냐?”
“시야가 넓어야 합니다·”
“또?”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맞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두 가지는 가지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물려준 이 회사를 이렇게 키웠다· 그럼 너는?”
“전····”
강재식 부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룹의 핵심 브레인을 이끌고 있는 너는 그 누구보다 사람을 잘 볼 수 있어야 해· 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은 국내 최고 엘리트들이다· 그런데 그 엘리트들도 성격이 다 다르고 마음에 품고 있는 야심이 달라· 누구는 한 달에 천만 원만 받아도 만족스럽고 누구는 한 달에 1억을 쥐여 줘도
더 큰 걸 바란다· 야심이 다르면 또 쓰임이 달라야 해· 넌 네 직원들 하나하나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해 놓은 게 있냐?”
대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없습니다·”
주어진 일만 하는 것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그런데 수십 명에 달하는 직원 모두 하나하나 평가해서 머리에 새겨 넣을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다·
“쯧쯧쯧···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네 형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가장 먼저 뭘 했을 것 같으냐?”
대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으니 답변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네 형이라면 직원들 하나하나의 경조사부터 외우는 걸 시작으로 그들 모두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 거다· 전략실 직원들이 언제까지 그 부서에 있겠어? 시간이 지나면 부서 이동이 있을 테고 누군가는 중요 임원 자리에 가 있게 되겠지· 자연스럽게 그룹 주요 보직에 자기 사
람을 심어 놓을 수 있게 될 테니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했을 게다·”
“아버지···”
대놓고 경영권을 향한 두 형제의 마음을 찌른다·
하지만 대성은 진즉 포기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을 테니 괜한 욕심 따위는 애초부터 부리지 않았었다·
그런 대성의 마음을 아버지가 흔든다·
“똑똑하기로 따진다면 네 형보다 네가 더 똑똑했다· 어렸을 때도 성적은 둘이 비슷했지만 넌 놀기를 좋아했지· 그래서 그런가? 계산도 빠르고 분석도 곧잘 하는데 그게 다야· 깊이 있게 들어가지를 못해· 그런 직원들 회사에 많지? 주로 어디에 가 있냐?”
“오성경제연구소나····”
“잘 아는구나· 오성증권에서 펀드매니저 하는 놈들도 그런 놈들이 대부분이지· 그중에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진 놈들은 연봉 백억을 넘게 받지만 그런 놈이 몇이나 돼? 넌 뭐가 좀 달라야 할 게 아니냐?”
“·······”
“이제 다시 묻겠다·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냐?”
대성은 침중하게 고민을 거듭하다 입을 열었다·
“지루해서 피곤하신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루하다?”
“네· 오성그룹을 위협할 만큼의 경쟁자가 없어서 지루하신 게 아닐까···”
“틀렸다· 네 말대로 경쟁자가 없다면 심심하기야 하겠지만 피곤하지는 않지· 오히려 반대다· 10년 전 5년 전 오성과 지금의 오성· 달라진 게 없어· 이제 날 뒷방 늙은이 취급해야 할 자식들은 아직도 나만 쳐다본다· 이러니 내가 피곤하지 않고 배겨?”
그는 아직 오십 대의 정정한 나이인지라 뒷방 늙은이 취급해야 한다는 소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두 아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다는 건 확실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딸내미 혼사 챙기려고 이 수모를 겪는 게··· 이게 말이 되는 게냐? 아들 두 놈이 날 기쁘고 흥분되고 신나게 만들면 내가 미쳤다고 사윗감 눈치를 봐? 그 근본도 없는 놈 데려오겠다고 남의 호텔까지 가서 왜 아쉬운 소리를 해!”
결국 벼락이 떨어졌다·
대성은 고성에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네 심중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어쩌면 그게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좀 달리해 봐야 할 것 같구나· 명심해라· 나 역시 둘째였다·”
“알겠습니다·”
“차 대기시켜·”
“지시하겠습니다·”
대성은 입술을 깨물고 부회장실을 나왔다·
*
강재식 부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리츠 칼튼 호텔에 나타난 건 5시가 되고도 10분이 흐른 직후였다·
이미 오늘 강재식 부회장이 방문한다는 걸 알고 있는 호텔 직원들은 바짝 긴장한 채 강 부회장 일행을 2층 식당으로 안내했다·
“오셨습니까·”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형준 대표 이사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강 부회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군· 경제인 모임에서 봤을 때는 신영의 미래를 이어갈 유망주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주전 자리에 앉을 줄은 몰랐네· 앉지·”
“네·”
강재식 부회장 뒤로 강대성 실장이 섰다·
그 광경이 어색해서 형준이 뭐라 하려 할 때 강재식 부회장이 말했다·
“아들 녀석이지만 오늘만큼은 전략실장으로 데리고 왔네· 업무 이야기를 하는데 전략실장이 감히 나와 동석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형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양반이 일 이야기가 아니면 안 만나겠다고 하니 이렇게 속 좁게 나오는 거구나 싶었던 거다·
“하하··· 그러시군요· 식사하기에는 조금 일러서 좋은 차를 대접할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그것도 좋지·”
형준이 직원을 불러 차를 주문했고 잠시 후 차가 들어왔다·
그런데 종업원 뒤로 영훈이 따라 들어왔다·
대성은 영훈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크게 당황했지만 감히 나서지는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강재식 부회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순간 영훈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HS그룹 기획조정실장인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저희 호텔에 방문해 주셔서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됐고 내가 오늘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으니 그만 나가도록 하지·”
단호한 축객령에 영훈은 가만히 미소짓다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 이유가 혹시 업무적인 문제입니까? 아니면 이형준 대표의 혼인 때문입니까?”
강재식 부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식의 건방진 질문이 날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영훈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물었다·
“최영훈이라고?”
“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훈이 고개를 내밀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 내가 너와 손을 잡느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우습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될 성싶은 건가?”
영훈은 멋쩍게 내민 손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아이를 물가에 내보낸 부모의 심정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괜히 걱정이 돼서요·”
“아이? 이형준 대표가 자네 아이라는 건가?”
“제가 먹이고 재워 키운 건 아니지만 저 자리에 앉도록 도와줬으니 다른 의미로 키웠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회장님은 다른 생각일 수 있겠죠·”
“맞아· 자네가 이형준 대표를 저 자리에 앉혔다는 것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설령 사실이었다고 해도 난 관심이 없어·”
“괜찮습니다 관심이 없으셔도· 그리고 이 호텔이 HS그룹의 것이 맞는지도 관심 없으셔도 되고 해주조선해양이 HS 계열사가 맞는지도 관심 없으셔도 괜찮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이형준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 같으면 저 말이 굉장히 기분 나쁠 것 같은데 자네는 어떤가?”
“저 역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던지라····”
“그래서?”
“하지만 아니라고 부인하기에는····”
형준의 뒷말을 영훈이 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고작 우리와 관계를 끊는다는 말에 이 자리까지 나왔으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무 자르듯 잘리는 게 아닌데 어디 기업 간의 관계가 그렇게 뚝 잘리던가요? 그만큼 다급한 심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흥! 자네가? 자네가 그렇게 받아들였다?”
영훈은 빙그레 웃더니 물었다·
“제가 다리가 약해서 그런데 이제는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제가 주인이고 오늘 오신 세 분이 손님인데 주인이 손님에게 안방을 내주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고는 강재식 부회장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리고 긴장해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종업원에게 차를 내려놓으라고 시키곤 직접 한 명 한 명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차를 들고 오기 전까지는 어떤 차인지 외워 왔는데 부회장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 다 까먹어 버렸습니다· 하여튼 비싼 차는 맞으니 입에 맞으실 겁니다·”
“송은채 회장이 제법 똑똑한 사위를 들여서 회사를 키웠다더니 그게 자네 맞지?”
당연히 모르면서 물어본 건 아니다·
“부회장님께서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운이 좋아 재벌 딸과 결혼해서 분에 겨운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영금융이 자네의 그 건방진 말 때문에 크게 곤란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네만·”
“자비로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겨우 저 하나 때문에 그런 소란을 피우실 것 같지는 않네요· 왜 요즘 그렇지 않습니까· 갑질 논란이니 뭐니 하면서 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 억압하면 국민들이 굉장히 싫어하니까요· 게다가 고작 저 하나 때문에 그동안 신영과의 관계를 끊으면
정치인들이 또 얼마나 걱정하겠습니까·”
강재식 부회장은 헛웃음이 나왔다·
“제법이군·”
그 말에 뒤에 서 있는 대성이 흠칫 놀랐다·
제법이라는 말·
어지간히 잘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저런 표현을 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논리가 옳고 그른 걸 떠나 지금껏 아버지 앞에서 저렇게 할 말 다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옆에 앉아 있는 이형준 대표조차 에어컨 바람이 불어 오는 이 시원한 곳에서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지 않은가·
제법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최영훈 상무는 그 듣기 어려운 칭찬을 받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성그룹이 가지고 계신 축구클럽이 있죠? 평소 축구를 좋아해서 구단에 애정을 많이 가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맞네· 그래서?”
“인천 오성의 스트라이커 유준학이 없었다면 작년 리그 우승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주 좋은 선수죠· 그런데 만약 성남 GK에서 50억에 유준학을 원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준학은 안 파는 선수네·”
“그렇죠? 안 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어로 Not For Sale이라고 표현하던가요? 팔지 않는 선수· 제게 이형준 대표가 그렇습니다· 이형준 대표는 NFS입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말 같지 않은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군· 그럼 이적 명단에 올릴 수 있는 건 뭔가?”
장난식으로 물어본 것이었지만 영훈의 대답이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음··· 예를 들어 천보윤 의원· 천 의원 정도면 어떻습니까?”
“뭐라고?”
“언제까지 썩은 동아줄 붙들고 계실 겁니까? 저한테 말만 잘하면 제법 튼튼한 동아줄에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어떤가요? 관심 있으십니까?”
피곤에 절어 있던 강재식 부회장은 정말 오랜만에 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 충돌(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