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수심을 재다(1) >
조사를 지시한다고 해도 영화나 드라마처럼 몇 시간 만에 개인정보가 줄줄이 흘러나올 수는 없다·
강재식 부회장도 그걸 알고 있기에 회사에 도착해서 최영훈 상무에 대한 내용을 알아오라고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대성에게 맡겨 놓았던 일에 직접 관여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대성에겐 무척 힘겨운 시간이 될 것임이 자명했다·
“기껏 알아낸 게 이거야? 자식새끼 과외 시킨 거?”
강 부회장의 싸늘한 눈빛에 대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메인 타깃은 아닙니다· 아직 더 알아보는 중입니다·”
“뭘?”
“네?”
“그러니까 어떤 부분을 알아보는 중인데?”
여기서 ‘전부 다’라고 말하는 순간 또 바보 취급을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대성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실 천보윤 의원에 대해 전부 다 알아오라고 시킨 건 맞지만 아버지는 무언가 다른 걸 더 원하고 있었다·
“가족들 비위 사실 위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만 고작 자식놈 과외 시킨 거로는 큰 타격을 주진 못해· 옛말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하게 넘어가고는 해· 이건 조잡하다·”
“알겠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아들 과외 건에 관한 보고서를 툭 던졌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나름 괜찮은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드롭 당했다·
더욱 가슴이 무거워진 대성이 눈을 껌뻑이며 강 부회장의 입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대성이 머뭇대고 있자 강재식 부회장은 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일곤이 자리에 있나?”
“네 부회장님·”
“들어와 봐라·”
잠시 후 오성전자 글로벌사업지원팀 최일곤 사장이 들어왔다·
최일곤 사장은 강대성이 전략실장으로 발령받기 전 전략실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다·
“부르셨습니까·”
“니 예전에 HS 송은채 회장 잘 안다고 했지?”
“네 잘 압니다· 제 여동생하고 절친이라서요·”
“작년 결혼식에도 다녀왔다고 했나?”
“맞습니다·”
“현진중공업 임 회장이 쓰러지고 회사가 둘로 쪼개졌을 때 말이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알아?”
당시 현진물산이 현진관광을 인수한 시점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많은 곳에서 그 이유를 알아내고자 달라붙었다·
하지만 현진중공업이나 현진물산 어느 곳에서도 경영진 불화에 관한 정확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현진관광 인수를 끝으로 더 이상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계열사를 분리하고 건설 조선을 연이어 합병하며 HS그룹으로 거듭났을 때도 가장 처음 어떻게 해서 현진물산이 계열사 분리를 시도했는지 왜 신영금융이 인수에 도움을 줬는지에 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전략실 애들이 알아보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했는데 딱 한 부분에서 계속 막혔었습니다·”
“막히지 않았던 것부터 말해 봐·”
“당시 현진물산 송은채 사장은 상당히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경영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쓰러진 임 전 사장의 자리를 대신하기에는 그 능력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현진물산을 현 현진중공업 김태현 회장이 차지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 현진중공업이
가진 지분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김태현 회장의 모친이 소유하고 있던 현진관광을 도리어 뺏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째서?”
“그게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던 하나의 이유입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이유로 현진물산과 신영금융이 손을 잡았나 하는 겁니다· 신영이 가진 현진물산의 지분을 헐값에 내주면서 현진물산의 경영권을 견고하게 만들고 현진관광의 인수를 보좌하면서 사실상 인척 관계가 아닐까 싶
을 정도로 손발을 맞췄습니다· 신영금융을 예상하지 못했던 김태현 회장은 결국 손도 못 쓰고 현진물산과 알짜배기 캐시 카우인 현진관광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자질구레한 기업 인수 합병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당시에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라고 할 걸 그랬군· 너무 무신경했어·”
“아닙니다· 우리와 겹치는 사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회장님 말씀대로 오성그룹에 비하면 자질구레한 기업에 불과했습니다·”
“현진관광을 인수했을 당시에는 그랬겠지· 하지만 어느샌가 건설에 조선까지 얻었잖아? 이제는 꽤 덩치가 커졌지?”
“내년에는 10대 재벌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거라는 보고서가 오성경제연구소에 올라오긴 했습니다·”
“쯧쯧쯧···· 이래서 사람이 하늘만 쳐다보다간 자그마한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야·”
그렇게 말한 강재식 부회장은 대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여동생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가족이라고 해도 돈 때문에 살인이 벌어지곤 하는데 신영금융 대표와 최영훈 상무가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다은이의 짝은 신영금융 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자세다· 난 또 네가 포기했을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대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은의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질문을 꺼내는 아버지의 의도를 생각해 원하는 대답을 해 준 것이었다·
“아닙니다 포기는요·”
강 부회장이 최일곤 사장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HS그룹 최영훈이라는 어린놈한테 한 대 제대로 얻어맞고 왔어· 뒤통수가 얼얼해·”
“부회장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는 젊은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무척 궁금합니다·”
“흥! 벌써부터 재밌나?”
최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재밌는 건 아니지만 흥미롭기는 합니다·”
“그놈 입이 제법 맵다· 내가 신영금융 대표를 우리 다은이랑 엮어 주려고 반협박할 생각으로 만났는데 글쎄 그놈이 신영금융을 자기 물건 취급하면서 거래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거야·”
“물건이요? 신영금융 대표를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놈이 대신 다른 걸 내밀었는데 이걸 내가 받을 수도 없고 안 받을 수도 없어·”
“그게 뭡니까?”
“차기 대선주자·”
최 사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마 지금 여당의 당 대표인 민구상이 차기 대선 경선에서 떨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하던가요?”
“그렇다네·”
“하하····”
최일곤 사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풍이라면 허풍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허풍이 너무 적절한 타이밍에 찔러 들어왔다·
하필 대선 경선 전에 그것도 막상 여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대선주자가 없어 더욱 시야가 혼잡한 상황에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진실 여부를 떠나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해?”
“그 어린놈이 거짓말했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나 보고 계십니까?”
“거짓이라···· 난 그놈이 진실을 말했다는 데에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어·”
그제야 최일곤 사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안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알겠는데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공짜가 아니었거든· 제법 가격이 비싸·”
최 사장이 대성을 돌아보았다·
그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 것인데 대성이 고개를 저었다·
“숫자로 드러난 가격이 아닙니다·”
“그렇군·”
최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 부회장이 재차 물었다·
“의견을 내 봐· 내가 어찌해야겠어?”
“가격이 비싸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죠· 물건이 어떤 건지는 아십니까?”
“그래· 어이가 없게도 그 정치인 이름을 비밀로 하지도 않았어·”
“이름을 말했다고요?”
“그래 천보윤 의원이라고 하더군·”
“천보윤 의원····”
최일곤 사장은 혼란스러워졌다·
오성그룹이 어디 시장에서 전파상 운영하는 장사치도 아니고 대한민국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는 재벌인데 그 인간은 눈 뜨고 코 베일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정치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강재식 부회장이 전 재산을 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강 부회장의 확신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 그냥 그놈 제안을 들을까? 괜히 그놈 말대로 선수에 흠집을 냈다가 된통 손해를 보지는 않을까···· 그런데 결국 결론은 하나였어· 남들이 하자는 대로 너 조금 먹고 나 많이 먹고 했으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어?”
“아닙니다· 오성은 최고여야 하니까요·”
“그래· 손을 안 대면 모를까 일단 손을 댔다면 최고여야 해 우리가 독점해야 하고 우리가 선도해야 해· 인텔 구글도 아니고 고작 재계 10위에 닿을락 말락 하는 하빠리한테 말릴 수 없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강 부회장은 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한테 맡기다간 죽도 밥도 안 될 듯싶어· 이 녀석 옆에서 민구상이 이번에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게 만들어 봐· 그래서 그 최영훈이 그놈 콧대를 콱 꺾어 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최영훈이라는 놈 제대로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놈 좀 잘 가르쳐 봐· 영 쓸모가 없어· 사람 구실 좀 하게 만들어·”
대성은 화들짝 놀랐다·
사람 구실을 못 하기에 오히려 그룹이 평안한 거다·
양녕대군이 사람 구실을 했다면 어찌 세종대왕이 왕위에 쉽게 올랐을까·
최일곤 사장 역시 강 부회장 말의 무게감을 느꼈는지 흠칫 놀라면서도 별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차 준비시켜 여의도로·”
“민구상 의원에게 연락 넣을까요?”
“그래· 파주에서 그 일 때문에 심통이 났을 테니 다시 만나서 풀어 줘야 힘을 내겠지·”
“준비시키겠습니다·”
대성은 얼른 비서실에 이야기하고 강재식 부회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배웅했다·
강 부회장이 사라지자 최일곤 사장은 대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강만성 사장이 곧 알게 될 텐데 자신 있냐?”
오성디지털 강만성 사장은 대성의 형이었다·
“자신 없습니다·”
“네 얼굴 보니 그럴 것 같았다·”
“저 이제 어쩝니까?”
“어쩌긴? 이겨야지·”
“저 그러다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럼 나는? 날 네 옆에 붙였으니 나도 이제 목 날아가지 않으려면 죽으나 사나 네가 이기게 만들어야 한다·”
“휴···· 미안할 뿐입니다·”
“미안하지 않으려면 이기면 돼·”
“흠····”
“왜? 자신이 없냐?”
“솔직히 형을 이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겁부터 났는데 이제는 그냥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형보다 그 최영훈이라는 사람을 이겨야 한다는 게 더 부담스럽습니다·”
“고작 HS그룹의 인물인데?”
대성은 머쓱하게 웃었다·
“사장님은 아직 겪어 보지 않으셔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형이 그냥 상대하기 싫은 상대라면 그 사람은 뭔가····”
“·······”
“뭔가 가늠할 수 없거든요·”
평생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던 대성이고 그건 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형은 상대하긴 싫지만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영훈이라는 그 인간은 조금 달랐다·
오성그룹의 최고 경영자를 앞에 두고도 돈 없는 손님 취급하듯 거리낌 없이 행동하던 모습은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미친놈이라면 그저 미친놈이겠거니 하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의 머릿속에 어떤 계획이 들어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상대방을 얕보지 않는 건 좋은 자세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겁먹는 모습도 그리 좋지 않다· 고쳐·”
탐탁치 않아 보이는 그의 눈빛·
“네 알겠어요·”
최일곤 사장은 대성을 이끌고 전략실로 들어오며 황급히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대충 손을 들어 인사를 받고는 겉옷을 아무 의자에나 휙 던졌다·
그리고 넥타이를 풀어 슥슥 감아 던져 버리곤 말했다·
“오늘 집에 들어가긴 글렀구나·”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언제고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니까·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지·”
최일곤 사장은 뛰어난 머리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형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언제고 형이 그룹 핵심 위치로 올라서는 순간 내쳐질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정말 제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아시잖아요· 저렇게 말씀하셔도 마음속으로는 저를 형의 페이스 메이커로 볼지도 모르는데·”
“그게 자존심 상하지 않냐?”
대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왕 부회장님이 날 네 옆에 붙여 줬으니 한마디만 하자· 너 부처님이냐? 하나님이냐?”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 욕심 없는 성인 아니잖아· 근데 뭘 아닌 척이야·”
최 사장은 대성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이기고 싶잖아· 다 가지고 싶어 죽겠잖아· 그러니까 하나씩 하자 하나씩· 하나를 끝내고 또 하나를 끝내다 보면 이 오성이 전부 네 것이 돼 있을 거다·”
번들거리는 최일곤 사장의 눈빛이 대성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 눈으로 수심을 재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