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수심을 재다(4) >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형이 주인공이었고 모든 혜택은 형이 먼저 받았다·
그걸 당연하게 여겨 왔고 크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냉정함과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집안에 분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병신같이 아무것도 못 받고 서민들과 부대껴 살 생각은 없었다·
나름 착실하게 자산이 될 만한 것들을 챙겨 왔고 계열사 지분에 부동산 미술품까지 생각하면 여느 재벌그룹 회장 저리 가라 할 만큼 모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봐야 형이 가진 또 형이 가지게 될 자산의 십 분의 일도 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걸 알고도 만족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자신 때문에 회사에 분란이 생기고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덤벼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아버지가 형에게 보여 준 믿음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후우····”
결국 방에 돌아와 앉아 있던 대성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형이 이번 일을 보란 듯이 해결한다면 진심이든 아니든 처음으로 밀어주려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완전히 닫힐 게 분명했다·
당연히 형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새롬이 들어왔다·
방금 외출했다 돌아온 것처럼 집에서 입는 편한 옷차림이 아닌 그녀는 앞치마를 단정히 하고 있음에도 그 앞치마가 그리 잘 어울려 보이진 않았다·
“저녁 먹어·”
“어····”
“왜? 고민 있어?”
“아니야 됐어· 나 씻고 내려갈게·”
대성이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자 새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 요즘 너무 힘든 거 알아?”
“어?”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눈치 보여서 내 마음대로 친구랑 놀러 다닐 수도 없고 말 한마디 나눌 사람도 없어· 그래 봐야 마당에 돌아다니는 개새끼나 내 말을 받아 주지· 그런데 당신마저 날 무시하면 난 입 꾹 다물고 애만 낳으라는 이야기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러니까 대화를 하자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대성은 자신이 바빠서 아내를 잘 못 챙겨 왔음을 인정했다·
“미안해· 그런데 이게····”
“뭔데?”
대성은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근래 벌어졌던 일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들은 새롬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
어떻게 보면 상당히 놀란 표정에 가까웠다·
“나 당신한테 시집올 때 전혀 기대 안 했어· 그래도 오성그룹 차남이니까 못해도 중간은 가겠지 이런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야망이 대단할 줄이야·”
“야망이 아니야· 그냥··· 그냥 너무 바보 같아서 그래·”
“솔직히 바보 같긴 했지·”
“뭐?”
“그런데 이젠 좀 봐 줄 만해·”
“흥! 그러냐?”
“내가 도와줄까?”
“네가 뭘 도와줘?”
대성은 코웃음을 쳤지만 새롬은 어깨를 으스대며 말했다·
“그 최영훈이라는 사람 와이프랑 잘 알아· 연희 결혼식에도 갔었는데?”
대성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사실 그것만 모르는 건 아니었다·
원체 결혼 전부터 그녀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결혼하고 나서도 와이프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았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녀의 취미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주버님이 보기 좋게 실패해야 하는 거잖아· 그럼 내가 미리 가서 조심하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더 도움 되지 않겠어?”
“우리 형이 어떤 짓을 할 줄 알고?”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지켜보는 것 말고 무슨 방법이 있을까·
“없지·”
“나 연희랑 잘 알기는 해도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야· 그런데 이 기회에 친해지면 좋은 거 아니야? 친해질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래 보든지·”
새롬은 빙그레 웃으며 대성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제 씻고 내려와· 표정 관리 잘 해·”
“너 신난 것 같다?”
“응 신나· 남편이 바본 줄 알았는데 바보가 아니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딨어?”
대성은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그녀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연희는 오랜만에 점심 시간에 회사 동료들이 아닌 사람과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화문의 레스토랑에 앉아 있던 그녀는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의 등장에 손을 흔들었다·
“여기·”
“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그런데 너 결혼하더니 더 예뻐졌다?”
“네가 더 예쁘지· 넌 어쩜 지금도 그렇게 연예인 같니?”
연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새롬은 연희가 유학 갔을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지금껏 이렇게 먼저 다가와 살갑게 군 적이 없었다·
재벌집 자식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하나같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인데 새롬 역시 그런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도도함의 대명사는 연희였다·
“어~ 그래· 아무튼 새롬아 오랜만이다· 결혼식 때 보고 처음이지?”
“응·”
“그래 어떻게 지내?”
새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로야· 심심하고 지루해· 혼자 쇼핑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 돈 쓰는 기계 같아·”
“외롭겠네·”
“넌 아니지? 회사도 다니고 들어보니까 남편하고 같은 부서라며? 부럽다·”
“난 일하는 게 좋아서·”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몰라· 회사 일을 배우면 골치 아프다고만 생각했지 감옥 같은 집에 처박혀서 인형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건 생각을 못 했던 거야· 생각이 짧았지·”
“자학이 심한 거 아니야? 대 오성그룹 사모님이신데?”
“그 오성그룹 사모님 될 사람은 우리 형님이지· 어찌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 계신지 나 쳐다볼 때도 이렇게 눈을 내리깔면서 쳐다보잖아·”
새롬은 고개를 치켜들고 흉내 냈다·
그런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던 연희는 하고 싶은 말을 뒤로하고 일단 식사를 시켰다·
자리에 앉자마자 왜 만나자 했냐고 물어볼 수 없으니 일단 입에 뭐라도 넣으면서 물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식사를 시키자마자 새롬이 먼저 용건을 꺼냈다·
“실은 말이야· 너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용건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
“뭔데?”
“나도 이제 결혼을 해서 예전처럼 나만 생각하고 살 수는 없잖아· 남편이 생겼고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우리 남편이 연희 네 남편 때문에 조금 곤란해해·”
연희는 침중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이야기는 얼핏 들었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오성그룹하고 엮여 있다고· 그런데 어쩌지? 내가 손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나도 내 남편이 주도하는 사업에 의견을 낼 수는 있어도 가로막지는 못해·”
“알아· 네 남편이 너희 엄마 제외하면 그룹 최고 실세잖아· 그런데 너한테 엄청 부담스러운 부탁을 하러 온 건 아니야·”
“그럼?”
“내 남편이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아버님이 아주버님한테 그 일을 맡기셨어· 둘째가 못 한 일을 첫째한테 맡기신 거지· 지금 내 상황 어떤 건지 짐작하지?”
짐작 못 할 리 없다·
그런데 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결혼할 때부터 알고 간 거 아니었어? 설마··· 욕심 생긴 거니?”
“나 알고 갔지· 욕심 버렸었어· 그래서 쇼핑이나 실컷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남편이 조금 화가 나나 봐· 그렇다고 아주버님을 제치고 그룹을 다 먹겠다는 그런 생각은 아니야· 그저 아버님한테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뭐 그런 정도지·”
“너도 변했다· 네가 그렇게 남을 생각해 주는 모습 처음 보거든·”
“그랬나? 하긴 내가 좀 내 위주로 살긴 했지· 그렇게 살아도 문제없기도 했고· 어쨌든 지금 내 상황이 이래·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고·”
“그렇구나····”
“들어줄 거지?”
“음···· 일단 먹고 생각해 보자·”
“그러자·”
연희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남편에게 물어보겠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싫은 게 연희의 마음이었다·
이건 친구가 하는 부탁을 남편에게 전해 주는 단순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직업 군인의 아내를 보면 남편의 계급에 따라 아내들 사이에서의 위치도 달라진다·
남편이 중위면 아내도 중위고 남편이 대령이면 아내도 대령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재벌집 자제들도 마찬가지다·
오성그룹 자제들과 30대 재벌의 겨우 말석을 차지하는 자제들과의 격차는 거의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그룹의 격차에 따라 돈 없다고 무시당하거나 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국내 최대 미디어 재벌 그룹인 TS그룹의 새롬은 그동안 은근히 연희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들을 해 왔고 알게 모르게 그 감정이 연희의 밑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이 나오자 연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도와줄게·”
“정말?”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응· 내가 그냥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잖아·”
“좋아·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수 있는 거야· 내가 하남에 프리미엄 패션 타운을 조성하려고 하거든·”
“프리미엄 패션 타운?”
“응· 조금 규모가 커· 명품 아울렛처럼 명품 숍을 들여오는 건 비슷한데 조금 달라· 패션과 관련된 클래스를 열어서 유명 디자이너나 장인들을 초청하고 패션쇼도 열 생각이야·”
“아울렛과 사교 모임을 동시에 겸하는 거구나?”
“맞아·”
“재밌겠네·”
“맞아· 돈 많은 사모님들이 안 찾아오고는 못 배기게 만들 생각인데 네 도움을 받으면 더 좋을 것 같아·”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지를 가지고 공사에 들어가려고 해· 설계도 나왔고 자금도 컨펌 났거든· 그런데 요즘 공사 금방이잖아· 못해도 2년이면 오픈해야 하는데 그럼 최소 1년 전에는 각 명품 브랜드에 입점 제안을 넣어야 한단 말이거든· 네가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
국내 유명 브랜드 백화점이라면 모르겠지만 HS그룹은 패션 유통 사업이 처음이었다·
최고급 브랜드는 유통업체의 이미지와 매출 그동안 거래해 온 신뢰를 보고 입점할지 말지 판단하는데 HS는 첫 시작이니만큼 입점 제안서가 거절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했다·
그런 면에서 새롬은 연희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로비스트였다·
TS그룹이 가진 연예 기획사들과 소속 연예인들 그리고 방송국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가 상당한 도움이 될 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좋아·”
새롬이 선뜻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연희가 눈빛을 반짝였다·
“의외네·”
“뭐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회사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겠다는 거잖아· 그냥 아버님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지·”
흠칫한 그녀가 대답을 못 하자 연희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이해해· 그리고 난 네가 이겼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그게 너에게 더 이득이 되니까?”
“당연하지· 그게 마음에 안 드니?”
“아니 그럴 리가· 내가 요즘 자주 가는 마사지 숍 있어· 언제 시간 되면 같이 가 보자·”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한 새롬이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저 마사지 숍의 회원권은 아마 새롬이 대납을 해 줄 거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자신의 돈을 들여 함께할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것·
재벌들 사이에서 급이 낮은 사람이 윗급의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을 때 하는 수법이다·
연희는 이미 다니고 있는 숍도 있고 바쁘기도 해 굳이 다른 곳을 갈 이유는 없지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공주 대접을 해 주겠다는데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바로 회사로 돌아온 연희는 영훈에게 새롬과 만나서 나눴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영훈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재밌게 됐네·”
“그때 강재식 부회장 사주를 못 봤다고 했지?”
“응·”
“아쉽다·”
“아버지 사주를 모르면 아들 사주를 한번 보지 뭐· 그 와이프 통해서 강대성하고 약속을 잡아 줘 아무도 모르게·”
< 눈으로 수심을 재다(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