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수심을 재다(5) >
“선거를 앞두고 어려모로 많이 힘드시죠?”
천보윤 의원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없이 맞은 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강만성 사장·
오성그룹 강재식 부회장의 장남이자 오성의 황태자인 그는 감미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천 의원에게 말했다·
“제가 찾아와서 불편하십니까?”
“불편할 건 없어요· 그저 오성이 왜 날 찾아왔는지 그게 의문이라서 그럽니다·”
“말 편히 하세요· 나이가 한참 어립니다·”
“오성을 대표해서 온 거니 말을 놓기는 어렵네요· 오성 측에서 계속 만나자고 해서 이 자리에 나오긴 했는데 왜 날 만나자고 했습니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기업인이 정치인을 만날 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서요· 천 의원님에게 드리는 말씀도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조심스럽습니다·”
“그럼 오해하지 않게 말해보세요·”
“우리 오성은 의원님의 정책에 진실로 공감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의원님의 4차 산업 지원 정책과 각종 개발 계획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발의해 오신 법안들을 검토해봤을 때 오성그룹이 생각하는 올바른 나라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름칠이 심하군요· 오성에 불리한 법안들도 있었을 텐데·”
“오성은 큰 기업입니다· 때로는 오성에게 불리한 법안이 마련될 때도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올바른 국가와 미래지향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처리된 법안보다 앞으로 발의될 법안이 중요하다?”
“하하 이렇게 또 오해를 하십니다· 오성은 의원님을 진실로 지원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대통령이 되면 뭘 얻고자 합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훌륭한 정치를 해주시면 그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그래요? 그럼 오성은 나에게 어떤 지원을 해줄 생각입니까?”
“법적으로 클린한 선거자금이 의원님에게 제공되도록 도울 것이고 선거 과정에서 흑색선전의 불필요한 논란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한 경제 정책 만큼은 그 어떤 후보보다 완벽한 플랜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경제 관련 공약을 돕겠다·
한마디로 차기 5년 경제 계획을 오성의 플랜으로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이걸 노골적으로 봐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순수한 마음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요?”
“이런··· 또 오해하시는군요· 우린 해드릴 수 있다는 걸 알려드렸을 뿐이지 절대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의원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경제 관련 공약에 점 하나 올려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다른 건 몰라도 선거를 앞에 둔 국회의원인 이상 선거자금에 관련되어서는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 의원은 강만성의 말이 완벽히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어떤 대가도 필요 없다는 말·
기업인은 할 수 없는 말이다·
벌써 여기서부터 HS와 차이가 난다·
적어도 그들은 원하는 걸 숨기려 했던 적이 없으니까·
“우리가 의원님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시죠·”
“아닙니다·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이건 아닌 것 같군요·”
영훈은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 했지만 천 의원은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강만성이 명확하고 적절한 대가를 내놓았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큰 압박을 받게 만들었다·
이건 천 의원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다·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HS그룹은 의원님과 아주 가깝다고 알고 있는데···”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HS그룹의 최영훈 상무와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은 있지만 HS그룹에게 후원을 받고 있지는 않아요· 궁금하다면 그대들이 잘하는 뒷조사를 해보면 될 겁니다· 물론 자신 있다면 말이죠·”
만성은 순간 당황했다·
아예 부인하거나 아니면 곤란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약간의 친분을 인정했을 뿐 어떤 후원도 없다고 했다·
저 자신감이라면 애초에 정치자금 후원은 없다고 봐야 했다·
정치자금 후원 없이 대선후보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는 게 틀림 없다고 판단했다·
“최영훈 상무가 의원님을 팔았던 걸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몰랐습니다·”
“일개 기업인이 정치인을 팔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보군요?”
“그런 일 종종 있습니다· 사진 한번 찍었다고 세상 죽마고우인 척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하나 찾아가서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중에 그로 인해 피해가 생기면 내가 적절히 조치하겠습니다·”
만성은 능구렁이 같은 천 의원 태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오성은 항상 의원님에게 마음이 열려있으니 조금이라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신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돌아서서 나가는 만성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
대성은 자못 긴장한 채 새롬에게 받은 주소로 이동했다·
서울도 아니고 부천역 인근의 한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행여 따라온 사람은 없는지 뒤를 돌아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나쁜짓 하는 기분이 들어 쫄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영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상무님이 사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의 집은 맞는데 이 집 주인이 최영훈 상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허름했다·
영훈은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면서 대답했다·
“거기 소파에 앉으세요· 그리고 집주인은 우리 회사 직원이에요· 우리 호텔로 부르면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해서 여기로 모셨습니다· 괜찮죠?”
“네·”
“위치가 있는 분이시라 근사하게 와인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집에 쥬스밖에 없네요· 이거라도 드세요·”
“뭐든지·”
영훈은 쥬스와 컵 두 개를 가지고 와 탁자에 내려놓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는 정신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못했는데 정식으로 인사하죠· 나 최영훈입니다·”
“아 그래요· 난 강대성입니다·”
“처음엔 동생 일 때문에 어리둥절하셨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동생하고 친한 것도 아니고 동생 남편감을 찾아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형준 대표가 너무 매력적인 사윗감이긴 합니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재벌은 많지만 그 재벌 총수가 총각인 경우는 없거든요· 솔직히 우리 아버지가 군침 흘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고 할 수 있어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컵에 쥬스를 따랐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오성에서 이형준 대표를 사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나와 이형준 대표는 만난 기간은 짧아도 사연이 꽤 깊은데다가 내가 이 대표에게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거든요· 받아들일 수 없는 걸 원하니 저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전 그에 버
금갈 만한 차선택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버금간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 그건 오성에게 이인자 자리밖에 허용 못해주겠다는 제안 아닙니까?”
영훈은 피식 웃었다·
“웃기네요· 도대체 한 게 뭐가 있다고 일인자를 원하시는 겁니까?”
“뭐요?”
“천보윤 의원에게 오성그룹이 지금까지 뭘 해줬습니까? 이형준 대표에게 오성이 지금까지 뭘 해줬죠? 없어요 아무것도· 그래놓고 이인자 자리에라도 공짜로 올라탈 기회를 준다니까 그것도 부족하다고 거부해요? 오만한 것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닙니까?”
오늘 자리는 싸우려고 온 게 아니라는 걸 서로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감히 자신에게 저렇게 비웃음을 날리면서 비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성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오성입니다· 최고여야만 해요·”
“최고이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건 우리 없는 곳에서 하시면 됩니다· 남의 집 마당에 들어와서 힘자랑 하시면 볼썽사납습니다·”
“하··· 당신 뭐 믿고 그렇게 당당해요?”
본래 대성은 유한 성격이 아니다·
집안에서야 형에 눌려서 기죽은 모습이지 외부에서는 냉혹하고 오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 며칠간 영훈의 압도적인 포스에 기를 못 편 것 뿐이라 반발심에 욱하는 본래 성격이 슬쩍 튀어나왔다·
“나· 나를 믿습니다·”
“대단한 양반이시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당신과 쥬스를 마시고 있지만 사실 실무적 능력은 이 집 주인에 비하면 형편없어요· 다만 내가 잘하는 일 그걸 믿는 것 뿐이죠·”
“···”
“이제 우리 솔직해집시다· 원하는 게 뭐예요?”
대성은 평소 마시지도 않는 쥬스가 담긴 컵을 강하게 잡고 입으로 넘기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말했다·
“형이 천보윤 의원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걱정 안 됩니까?”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우리 형을 무시하는 겁니까? 아니면 오성을 무시하는 겁니까?”
“둘 다 아닙니다· 천 의원을 믿는 거죠·”
“그가 그렇게 믿음직한 인물인가요?”
“그걸 떠나서 아무리 규모가 큰 회사라고 해도 고작 기업 하나가 흔들어 젖힌다고 그걸 못 견디고 내려올 인물이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겠죠· 그럴 인물이라면 일찌감치 내려오는 게 우리에게도 이익입니다·”
“진심입니까?”
“네· 그런 인물 굳이 끌고 대통령 자리에 앉혀놔 봐야 여기서 흔들면 휘청 저기서 흔들면 휘청··· 우리가 써먹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그런 인물이 대통령 되면 국민들한테 죄 짓는 거예요·”
대성은 그의 말이 허풍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럽에 입이 닫힌다·
“···”
“어쨌든 위험을 경고해주는 거면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제가 이야기를 해볼게요·”
“해봐요·”
“그룹 총수는 차마 감당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그냥 물러서자니 코딱지만한 계열사 하나 얻어서 나오는 것도 마음에 안 차고··· 맞죠?”
“···”
대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은 양은 어때요?”
“갑자기 내 동생 이야기는 왜 꺼냅니까?”
“궁금하니까· 남매 간에 우애는 있습니까?”
“별로···”
“그래요? 형과 당신 중에 다은 양과 더 가까운 사람은 누굽니까?”
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훈의 되도 않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도 형보단 내가 조금 더 가까울 겁니다· 형은 다은이를 없는 사람 취급하니까요·”
“아··· 그렇군요· 대개 힘은 돈과 권력에서 나옵니다· 당신은 돈을 가지고 있지만 온전히 당신의 돈이라고 할 수 없어요· 아버지의 돈이고 회사의 돈이죠·”
“그래서요?”
“내가 당신을 내 옆에 서게 만들어준다면? 당신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대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의 세포들이 짜릿하게 솟아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오성을 말입니까?”
“알아들었으면서 딴소리 하지 말아요· 난 분명히 오성에게 내 옆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드렸습니다· 이적시장 마감은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 오성은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금액을 제시하지 않는 오성은 내 거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날 말하는 겁니까?”
영훈은 어두워진 창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부천역 주변의 상권에서 발산하는 현란한 불빛이 눈을 어지럽혔다·
“내 옆에 선다고 오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애초부터 내가 당신을 그렇게 해줘야 할 의무도 없고 당신은 그것에 비견되는 댓가를 나에게 지불할 수 없어요·”
“마치 그런 게 있다면 해줄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글쎄요· 그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 댓가를 지불할 수 없는데·”
“그럼 이형준 대표는요? 그는 어떤 조건을 제시했기에 대표에 앉을 수 있었습니까?”
“당시 현진물산은 상당한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또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도와주게 될 겁니다· 그만하면 서로 윈윈인 계약이었다고 생각해요·”
“···”
“그러니 이제 당신한테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천보윤 의원을 원합니까?”
“만약 원한다면···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영훈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금액은 두 곳에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고 또 다른 한 곳은 천보윤 의원· 우선 우리에게 지불해야 하는 건 한 가지입니다· 미래 HS그룹과의 최선을 다한 협력·”
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인데요? 그러다 내가 나중에 협력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 옆자리를 주겠다는 건 언제라도 파트너를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되는 겁니다·”
“하··· 그러니까 저 가격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최선을 다한’이라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보윤 의원 측에는요?”
“강다은· 당신 동생·”
대성은 충격적인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내 영훈의 의도를 파악하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신영금융 대표 와이프에서 대통령 며느리라··· 씨발 이제 동생 발닦아 주게 생겼네·”
“이제부터라도 친해져 보세요·”
영훈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는 표정으로 쥬스를 마셨다·
< 눈으로 수심을 재다(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