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투(1) >
음악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한 차 안·
혹시나 자신의 동선이 알려질까 두려워 수행기사도 없이 운전대를 잡았던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집에 도착해 차고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일 수 있는 최영훈 상무의 제안에 사실 운전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동생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젊은 총각 재벌이 아닌 아버지가 대선후보일 뿐 평범한 일반인과 결혼할 생각이냐고 물어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어떤 답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동생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HS그룹과의 대금은 협상이 가능했지만 이건 협상이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한참 생각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온 그와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다름아닌 형이었다·
“왔냐?”
“어··· 일찍 왔네?”
“회사에서 만나려고 전략실 갔더니 퇴근했다더라고·”
“전화하지·”
“어차피 집에 있으면 만날 텐데 뭘 전화해· 그건 그렇고 너 나 좀 보자·”
“잠깐만 나 좀 씻고·”
“그래· 씻고 내려와·”
대성이 위에 올라오자 방금 전의 모습을 목격한 새롬이 다가와 물었다·
“아주버님이 뭐래?”
“이야기 좀 하자는데?”
“뭐 때문이지··· 하여튼 오늘 최영훈이라는 사람 만나서 무슨 이야기했어?”
“일단 나 씻고 형하고 이야기 먼저 하고 나서 말해줄게·”
대성은 복잡한 심경으로 샤워를 하고 나온 후 지하로 내려갔다·
엄청난 크기의 와인냉장고와 다양한 술이 비치된 지하실은 세 부자가 즐겨 찾는 곳이었다·
“왔어? 한잔 할래?”
“아니야· 머리가 아파서 오늘은 쉬려고·”
“네가 머리 아파서 술을 안 마실 때도 있냐?”
“별로 안 땡겨· 아버지는?”
“지금까지 안 들어오셨으면 뻔하지· 그건 그렇고 너 최영훈이라는 HS물산 기조실장 만나봤었지?”
“어·”
“어때?”
“다짜고짜? 왜? 천보윤 의원하고 잘 안 됐어?”
만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표정한 표정의 그가 기계처럼 능숙하게 와인을 따고는 시선을 대성에게 고정한 채 와인을 따랐다·
“너 요즘 변했다?”
대성은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너 나한테 보통 질문 잘 안 하잖아· 그것도 일적으로는··· 안 그래?”
그제야 대성은 지금까지 형이 시킨 일은 대개 이유를 묻지 않고 처리해 왔다는 걸 떠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한정적이라고 생각했고 그 반발심에 일을 해도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만 처리했다·
“그냥 궁금해서· 내가 만나본 사람이니까· 아버지도 같이 만났었고·”
“오호··· 그럼 꽤 인상 깊었나보네?”
“응 그랬지·”
“어땠는데?”
“내가 봤을 땐··· 잘 모르겠어·”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
오늘 만나고 왔지만 여전히 그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모르겠다고?”
“응· 심기가 깊은 건 알겠는데··· 내가 측정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극찬이네? 한방 제대로 얻어맞았나봐?”
“한방 제대로 얻어맞았지· 그리고 그 펀치에 아버지까지 같이 휘청거렸어·”
만성의 눈빛이 험악해진다·
“아버지까지?”
“응·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언제고 우리 형제 목을 물어뜯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최영훈 상무가 될 거라고·”
“아이 시발 술맛 확 떨어지네·”
그는 잔에 따른 와인을 단번에 들이키곤 새 위스키를 땄다·
고작 와인 정도로는 화를 가라앉히기 부족하다는 것 같은데 대성은 그 모습이 괜히 웃겨 보였다·
“그러니까 나보단 아버지가 느낀 게 정확할걸?”
“··”
“천보윤 의원은 뭐라고 하는데?”
“넌 알 거 없어·”
싸늘한 대답에 대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알려줘도 크게 관심 없다는 태도에 만성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다 말했다·
“그동안 천보윤 의원 약점 모아놓은 거 있지?”
“어· 아버지가 크게 도움 안 된다고 평가하셨는데 줄까?”
“모아서 나한테 보내·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래· 근데 아버지가 형한테도 맡겨 놓으셨지만 나는 또 나대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래서?”
“그냥··· 이해해 달라고·”
“새끼··· 너 나랑 붙어보자는 거냐?”
“무슨 소리야? 그냥 일이라니까· 형이야 말로 조금 이상한데? 요즘 무슨 일 있어?”
만성은 언더락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키곤 입가를 슥 닥았다·
“아니야· 내가 조금 예민했어· 가 봐·”
“쉬어·”
대성은 몸을 돌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연기자가 된 것처럼 혼신의 연기를 다 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이 흥건히 밴 상태였다·
대성은 화장실에 들러 다시 세수를 하고 나와 다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있냐?”
“왜?”
다은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문을 연다·
옷입은 걸 보아하니 밖에 외출하고 돌아온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보였다·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할까?”
“들어와서? 그래···”
평생 진지한 이야기 한번 건네지 않았던 오빠가 방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겠다니 다은은 생뚱맞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에 문을 열어두었다·
방 한켠에 쌓인 수북한 쇼핑백·
대성은 그 쇼핑백들을 힐긋 쳐다보다 말했다·
“저거 다 한번씩 입어보기는 하는 거냐?”
“내가 할 일 없이 수집하려고 사는 줄 알아? 뭐 몇 개는 안 입기도 하는데 그건 몇 개 안 돼· 그런데 그거 이야기하려고 들어왔어?”
다은이 쌍심지를 치켜 뜨자 대성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니야· 너··· 꼭 신영금융 대표 아니라도 상관없지?”
“그건 무슨 말이야?”
“어차피 이형준 대표가 좋아서 하려는 결혼은 아니잖아·”
“당연하지· 조건 보고 괜찮다고 한 거고 아빠랑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그럼 만약에···”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만약에 재벌은 아닌데 네가 더 많이 가지게 될 결혼이라면 어때?”
다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야? 좋은 가문이 아닌 일반인하고 결혼?”
“응·”
“오빠 미쳤어? 내가 그런 결혼을 왜 해?”
“신영금융 대표랑 결혼하는 게 베스트야· 그건 나도 인정해· 그런데 그거 힘들게 됐다는 거 너도 알지?”
“아빠가 그거 해결하라고 오빠한테 부탁한 거 아니었어?”
“그래· 그런데 힘들어· 다른 걸 다 떠나서 이형준 대표랑 그 여자 보통 가까운 게 아니라서 떼어놓기 불가능하다고 봐·”
“아이 씨··· 그래서 날 일반인하고 결혼시키겠다고? 아빠도 알아?”
“아니 몰라·”
“오빠···”
“내 이야기 끝까지 들어봐· 재벌 가문하고 결혼하면 좋기야 좋지· 그런데 자유가 없잖아· 너 새롬이 봤지? 걔 결혼하고 이 집 들어와서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아무것도 못해· 스트레스 푸는 거라고는 쇼핑 정도? 그것도 자기 카드 못 쓰고 우리 카드 써서 뭐 사는지 전부 다 파악 돼· 얼마
나 답답할지 이해 가지?”
“그건 그렇지만···”
“그냥 일반인이 아니야·”
“그냥 일반인이 아니면?”
“만약 결혼할 남자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면 어때?”
다은은 입을 딱 벌렸다·
적어도 그냥 일반인으로 퉁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그래·”
“그렇지만··· 그래봐야 5년 지나면 어차피 그냥 일반인 되잖아·”
“그렇지· 그만큼 넌 자유로워지겠지·”
“그게 다야?”
“아니 그건 부가적인 거에 불과해· 만약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오성유통은 네가 가지게 될 거야·”
이번에는 다은도 크게 놀랐다·
“오··· 오성유통을 나 준다고? 그게 확실해?”
“아니 확실하지 않아· 이건 내가 너에게 하는 약속이지 아버지나 형이 하는 약속은 아니거든·”
“그럼 안 되는 거잖아·”
“너 잘 들어· 아버지가 어떤 성격인지 알지? 우리 아버지는 형제들한테 공평하게 하나씩 나눠주실 분이 아니야· 너도 애초에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
“당연하지· 욕심내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잖아·”
“내가 대통령 옆에 설 거야· 그리고 5년 간 오성의 절반을 내가 가져올 거야·”
강다은의 눈동자가 커다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아버지가 그냥 두고 보실 것 같아?”
“난 아버지와 척지려는 게 아니야· 오성의 일원으로 서겠다는 거지· 아니 내가 비유하느라 어렵게 들렸나 본데 공무원이 되겠다는 게 아니야· 오성을 대표해서 권리를 주장할 사람이 나라는 거야· 오성의 사업 방향은 내 입을 통해서 대통령에게 전달될 거라는 의미지· 이해 돼?”
“그것 역시 아버지가 두고 보실까? 큰 오빠에게 맡기지 않을까?”
“아니· 그건 안 돼· 그건 아버지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 그리고 그건 아버지도 알아·”
“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해시켜줄게· 급한 일은 아니니까· 다만 넌 결정해야 해· 이대로 다른 재벌가문에 시집가서 새롬이처럼 살든지 아니면 오성의 일부를 가져갈 것인지·”
“그럼 오빠가 오성의 절반을 가져간 다음에 유통을 떼서 날 주겠다 라는 거지?”
“맞아·”
다은이는 손톱을 깨물었다·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해?”
“하루 정도 시간은 줄 수 있어 다만 방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는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엄마한테도·”
“알아· 엄마는 큰 오빠 편이잖아·”
“그러니까·”
“그럼 내가 만날 남자는 어떤 사람이야?”
“어?”
“어떤 사람이냐구· 나이는? 직업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데?”
순간 대성은 눈알을 굴리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그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알아볼게·”
“뭐야?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동생을 넘기려고 했어?”
“넘겼다고 하지 말자· 너도 좋아서 하는 거잖아·”
“못생긴 남자는 싫단 말이야·”
“그럼 이거 엎을까?”
다은이는 입을 다물고 원망의 눈초리로 오빠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뭐 지금까지 잘생긴 남자 많이 만나 봤으니까 한 번 쯤은 특이한 생김새를 가진 남자 만나도 될 것 같긴 해·”
“그렇지?”
“이제 나 기도하면 되는 거야? 제발 기본만 해달라고?”
“최선을 다해서 빌어라· 그건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대성은 여동생 방을 나왔다·
*
천보윤 의원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내가 오성그룹 여식을 며느리로 들이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대기업하고 야합한 정치인으로 볼 게 아닌가?”
일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 영훈이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맞습니다· 그렇겠죠·”
“그렇겠죠라니? 그게 끝인가?”
영훈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의원님께서 사모님과 이혼하신 건 참 잘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의원님께 사모님과 이혼하라고 말씀드렸던 건 사모님 그 자체로 큰 악재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였습니다·”
“그건 인정하네· 나도 당시 마누라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크게 놀랐었지·”
“어차피 지난 일이고 그걸 알아낸 의원님이 단호하게 이혼한 건 아주 잘한 일입니다· 만약 이 건이 외부에 알려지더라고 국민들은 그 부분을 참작해서 의원님을 평가할 겁니다·”
“···”
“제가 걱정하는 건 하나입니다· 하필 오성이 민구상 대표를 밀고 있다는 겁니다· 오성이 애초부터 대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오성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민구상이라는 말뚝을 박고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고 있다 믿고 있는 상황에서 의원님이 대두된 겁니다·
오성은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이혼한 사모님과의 일도 파내 있었던 일은 더 크게 부풀리고 없었던 일은 만들어 낼 겁니다·”
“그렇겠지·”
“사실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그저 평범한 유권자였을 때 사실보다는 그 이슈자체에 관심을 가졌으니까요· 나중에 조그맣게 스쳐지나가는 정정보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국민들을 욕하지 마세요·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오성을 사돈으로 두면 대통령에 당선되고 임기가 끝난 후에도 존경받으며 살 수 있을 겁니다·”
“흥! 대기업하고 야합한 정치인이라는 조롱을 받지 않으면 다행 아닌가?”
“얼마 전에 기사를 봤는데 그저 좋은 부모님 만나서 살다가 아버지에게 그룹을 물려받은 강재식 부회장이 존경받는 부자 1위라고 하네요·”
“허 참···”
“저 역시 이 상황이 크게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HS그룹이 더 크고 힘이 있었다면 우리 혼자만으로 의원님을 지켜드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 여기서 한손 빌리고 저기서 한손 빌리게 됩니다· 의원님이 싫다고 하시면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입니다· 꼭 이 방법이 아니라고 해도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천 의원은 영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정말 더 좋은 방법이 생길까?”
“미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찾아보고 또 찾아봐야죠· 다만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크게 보시죠· 5년의 임기생활이 끝나면 그 다음은요?”
며느리가 물고 올 오성그룹 계열사·
군침이 돌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리라·
“후··· 이거 참··· 언론에서 엄청나게 물어뜯을 거야·”
“아닐 겁니다· 오성에서 준비되면 아마 이 상황을 오성에서 통제하려고 들 겁니다·”
“통제한다?”
“그저 기사를 막거나 뉴스 앵커의 입을 막는 수준이면 가장 하책입니다·”
“그럼?”
“지켜보시죠· 저도 그 대단한 오성그룹 능력 좀 감상해볼 생각입니다·”
“오성그룹만 신났겠군·”
“아니요· 아마 진통 꽤나 있을 겁니다 아주 크게요·”
“진통?”
“네· 그리고 진통이 끝나면 아마 쌍둥이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저런 엄청난 이야기를 하면서도 영훈의 표정은 마치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 암투(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