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투(3) >
[천보윤 의원 아내의 의심스러운 투자행적]
[아내의 투기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몰랐던 것일까?]
[양파 같은 천보윤 의원의 아내· 이혼하면 끝일까?]
[천보윤 의원 조카 한국원자력공사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불거진 의혹]
이혼한 아내의 투기행적에 관해서는 오히려 천 의원이 이혼으로 대처를 잘했다고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세영일보에서 낸 천보윤 의원 조카 정규직 전환 의혹이 올라왔을 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천보윤 의원에게 이런 큰 악재가 나올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그 기사가 나오고 1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반박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천보윤 의원 조카 김씨 입사기록 공개한다·]
[한국원자력공사 김씨 채용점수 공개· 문제 없어·]
“씨발 이거 뭐야?”
강만성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사장님 부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인터폰으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이 기사 쓴 기자 조져서 어떻게 작성된 건지 확실히 조사해· 어디에서 누구한테 받았고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얼마나 받았고 어떤 새끼 지갑에서 나왔는지도 확실히 알아내·”
“알겠습니다·”
“차 대기시켜·”
직원을 내보낸 만성이 인상을 팍 쓰고는 차를 타고 강남 사옥으로 향했다·
“왔냐?”
집에서 보는 아버지와 회사에서 보는 아버지는 어투 하나에서부터 풍기는 냄새가 다르다·
집에서 보는 다른 가정처럼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자지간이기에 약간의 공간을 내어주는 느낌이라면 회사에서의 아버지는 노련한 사냥꾼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냥꾼이 기르는 사냥개의 느낌이랄까?
“네·”
“기사 봤다· 예상했던 일이냐?”
“아닙니다·”
“흐음··· 저쪽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구나·”
만성은 속이 쓰렸다·
상대편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걸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뭐겠는가?
상대방에게 졌다는 뜻이다·
“정보가 새어 나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보가? 어떤 경로로?”
“이번 천보윤 의원 뒤를 캐면서 전략실과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전략실에서 의도적으로 흘렸다고? 왜?”
“예? 그거야···”
“전략실을 지목했다면 네 동생을 지목한 거야· 그렇다면 이유가 합당하거나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해·”
“전략실이 아니라면 상대방에서 이렇게 빨리 대응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지· 네가 내보낸 기사 이후로 천보윤 의원측 반박기사가 나온 건 대략 12시간 정도가 지난 후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확신하려면 더 빨리 나왔어야지·”
그제야 만성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논리를 원하고 있었다·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논리·
그 이야기는 동생과 자신을 공정한 경쟁 상대로 보겠다는 뜻이었다·
만성은 그게 참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 앞에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천천히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뭐든지 급한 건 좋지 않아· 밖에 상대해야 할 적이 있는데 명확하지 않은 증거로 내분이 일어나는 건 자멸하는 행위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천 의원 대책이 나쁘지 않아서 오히려 지지율이 더 올라간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어· 이미 여의도에서는 도수연 효과에다 부정하고 탐욕이 심한 아내와 이혼하는 결단력을 지닌 천보윤이가 대선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는 구나·”
“···”
“이렇게 되면 난 최영훈 상무를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말만으로는 안 돼·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지켜볼 때가 아니다· 그 어린 녀석 말대로 이건 이적 마감 시한이 명확하게 나와 있는 상황이야·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면 점점 가격이 올라간다· 이번 너의 공격이 실패하면서 아마도 우리가 사야 할 가격은 배로 올랐을 게다·”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첫째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명확하게 대답해라· 차후 계획은 있는 거니?”
“아직은···”
“HS물산 최영훈이에게 연락 넣어라·”
“아버지!”
“이쯤 됐으면 서로 간은 볼 만큼 봤다· 아니 어쩌면 그 어린 놈은 내 간을 벌써 봤을 수도 있겠지· 우리가 졌고 주도권은 그놈에게 있어· 안됐지만 우린 아직 천보윤이가 이적명단에 올라와 있을 때 구매할 수밖에 없다· 연락해라·”
“··· 알겠습니다·”
만성이 죽상을 하며 부회장실을 나와 비서실 직원에게 HS물산 최영훈과 약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만성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부회장실로 들어왔다·
“아버지·”
“왜?”
“그 새끼가 지금 한국에 없다는데요? 방금 전에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대선 경선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태국으로 나갔다고?”
이번만큼은 강재식 부회장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하루 이내로 해결하세요· 하루 이내로 해결 못하면 거래는 없었던 겁니다· 명심하세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하루입니다·]
최영훈이 태국으로 떠나며 대성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대성은 피가 바짝 말랐다·
설마하니 다은이 남자에게 까이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도 당황했지만 다은은 너무 큰 충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오성유통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남자에게 까이다니···
그것도 그렇게 아니길 바라던 못생긴 남자에게 까였으니 그 충격이 오죽 심할까·
평생을 공주님처럼 대접받으며 살아왔던 그녀이기에 요 근래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아마 그녀가 받아들이기 힘들 게 분명했다·
대성은 상상도 못한 전개에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어설프게 억지로 만남을 이어가다가 경선 전에 형이나 아버지에게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
“일단 기자는 섭외했습니다· 입이 무겁고 돈의 무게를 아는 자라 나중에 문제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박치웅 과장이 물었다·
“일단 스톱해·”
“네?”
“스톱하고 있어· 하루 안에 결판날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강만성 사장님이 부회장실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형이? 표정은?”
“비서실 직원 말로는 상당히 굳어 있었답니다· 그리고 최영훈 상무에게 만나자 하려고 했는데 국내에 없어서 만남이 불발됐다고 합니다·”
“하···”
대성은 최영훈 상무가 자신을 위해 하루의 시간을 벌어준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태국에 할 일 없이 놀러나간 건 아니고 현지 직원들과 가스전 사업을 단도리하는 겸해서 출장간 거라고 들었다·
“만나자고 했으면 아버지가 마음을 정했다는 거겠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최영훈 상무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최영훈 상무가 어떤 걸 원할까?”
“HS물산이 투자한 펩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회사가 있습니다·”
“어딜 투자해? 반도체 회사에 투자했다고?”
“네·”
“걔들이 반도체에 대해 뭘 알아서 투자해?”
“당시 회사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초기 투자 금액이 400억 정도였고 이후 지속적인 투자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알아보니 기술력이 상당했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AMA시스템입니다·”
“그게 HS물산 거라고?”
대성은 깜짝 놀랐다·
올해 초부터 자동차 인공지능 기술로 해외에서 주목하고 있는 회사였고 당연히 강대성도 알고 있었다·
“네· 아마 AMA시스템과 오성전자와의 파트너쉽체결을 원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끌어 줄 만하다고 생각해?”
“지금은 아직 부족한 감이 있지만 우리가 도와주면 꽤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부터 인수를 고려하고 있는 ARX는 그 가격이 최소 35조가 넘어갑니다· 어쩌면 AMA시스템이 더 저렴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남의 회사 먹여 살려주는 것일 수도 있지·”
“맞습니다· 하지만 AMA시스템을 인수하기에는···”
“우리가 AMA시스템을 인수하겠다고 하면 HS물산에서 팔까?”
“이미 오성전자에 명함을 내밀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1 2조 정도로는 이빨도 안 들어갈 겁니다·”
“그럼 손을 잡는 게 맞는 거네· 뭐 그렇고 그게 끝일까?”
“그것 말고는 또 어떤 걸 원할지 예상하기 힘듭니다·”
“흐음··· 알겠어·”
대성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차피 HS물산으로서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와 직접 거래해서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
민희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하면 다시 자신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찾아온 게 의외인가요?”
“응· 당시 네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보였거든·”
화가 많이 난 거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고 미워 죽겠어도 오성유통과 대통령의 며느리가 된다는 타이틀은 그저 미움 하나만으로 퉁치기엔 너무 아까웠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아 죽어도 오기 싫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은은 생각을 바뀌는 걸 느꼈다·
다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사람인 이상 화가 안 날 수는 없죠· 태어나서 그런 모욕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럼 오늘 복수하려고 온 거야?”
“저 그렇게 나쁜 애 아니에요· 화가 나긴 했지만 그때 언니 말 듣고 많이 생각해보니 뭐 하나 틀린 말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상황 어떤지 아시죠?”
민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니한테 많이 배우고 많이 느꼈어요· 내가 부모 잘 만나서 가진 건 많은데 그걸 지키려면 머리가 똑똑해야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아빠도 그렇고 큰오빠나 작은오빠도 그렇게 자기 사람들을 모아서 의견을 물어요· 더 좋은 선택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구요· 그런데 난 주변에 아무도 없
더라구요· 언니한테 당하고 와서 달래줄 사람은 있는데 어떻게 복수해줘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설마 그걸 나한테 바라는 거니?”
“난 친하고 기댈 수 있는 언니 한 명 있으면 좋겠어요· 이 사람은 나한테 뭘 원할까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 내가 언제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언니도 나 같은 동생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나 돈 많은데· 그리고 아시죠? 저 잘하면 대통령 며느리까지 될 수 있어요· 나도 언니 이용하고 언니도 날 이용하는 거예요· 어때요?”
민희는 피식 웃었다·
“얘 나름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그러면 더욱 날 선택하면 안 되는 거야· 나보다 똑똑한 사람 많아· 심지어 이 판은 우리 보스가 깔았어· 나도 보스의 생각을 다 모르는데 나 같은 걸 옆에 둔다고?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거지·”
“그럴지도 몰라요· 머리 좋은 사람··· 구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아빠가 대한민국에서 최고 똑똑한 사람을 옆에 붙여주겠죠· 그런데 그 사람을 내가 못 믿어요· 그런데 언니는 적어도 우리 아빠 끄나풀은 안 될 사람이잖아요·”
“너··· 생각보다 진짜 꿈이 크구나?”
“언니가 날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해요· 난 나 대로 언니를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할게요· 대신 서로 배신하지 않기·”
“난 보스가 널 배신하라고 하면 배신할 건데?”
“칫···”
다은이는 불을 부풀리며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선을 다해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계속 자신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표현인 듯했다·
민희는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하하 좋아· 적어도 널 배신할 땐 경고는 해줄게·”
“좋아요· 그럼 나 하나 도와줘요·”
“뭐? 미래 대통령 아들한테 까였다는 거?”
다은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언니는 언니 보스한테 모든 걸 전부 듣는 거예요?”
“보스가 말해주면 아는 거고 안해주면 모르지· 그런데 마침 그 이야기는 들었어·”
영훈이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에 없는 상태라 최소한 민희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은 처리해야 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깐깐한 언니 보스가 하루밖에 시간을 안 줬다는데?”
“남자가 어땠는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니?”
다은이는 한숨을 푹 쉬며 천승모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런데 민희는 그 이야길 다 듣더니 깔깔깔 웃었다·
“하하하! 너 진짜 웃긴다· 하하하!”
“이게 웃겨요? 지금 얼마가 걸려있는데?”
민희는 웃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딱 봐도 모솔이잖니· 손 한번 잡아줘· 손 한번 잡아주고 사귀자고 해봐· 아마 거절 못할걸?”
“네? 그게 다예요?”
“너 예쁘잖아· 그렇게 했는데도 거절하면 네가 뭘 해도 안 되는 거야”
다은이는 가벼운 민희의 조언이 아무래도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조언에 따라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암투(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