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투(4) >
하루가 지나고 서울로 돌아온 영훈은 바로 송은채 회장에게 보고하러 들어갔다·
그녀는 마침 연희와 차를 마시고 있다가 영훈을 반겼다·
“왔어? 고생했어·”
“아닙니다· 하루 갔다가 온 건데요·”
연희가 웃으며 묻는다·
“혼자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왔어?”
영훈은 피식 웃으며 대답하곤 송 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별거 없었어· 우따마 장관이 마무리를 잘해줬습니다·”
“그래?”
“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쉐브론 측에서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더라구요· 우따마 장관은 하루 빨리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어하는 걸 억지로 앉혀놓고 있었더니 아예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송 회장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사업을 진행할 만큼 그녀는 모질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영훈도 극구 거부할 일이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이 다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영훈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인드였기 때문이다·
“일을 마무리하고 아예 태국을 뜰 작정을 하고 있더라구요· 저도 걱정돼서 일단 사설 경호원을 구해 가족들에게 붙여줬습니다· 그리고 사직하면 거처를 프랑스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왜 하필 프랑스야?”
“마음 같아서는 한국으로 오고 싶은데 우리를 지원한 게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라 그걸 피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으로 가는 것도 안심이 안 되는지 딸이 유학하고 있는 프랑스로 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거기서 자리를 잡으면 한국으로 올 예정입니다·”
“최 상무가 써먹는다고 했지?”
“네 발이 넓고 눈치가 있습니다· 협상이 뭔지 아는 사람이라 로비스트로 이용하면 밥값은 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송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 상무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우따마 장관이라는 사람에게 거쳐간 돈은?”
“제 3국 은행을 통해 안전하게 전달했습니다·”
“잘했어· 고생했어· 이제 남은 건 오성인가?”
“그럴 것 같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이 최 서방을 엄청 찾았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강 부회장이 그렇게 급해 보이는 건 처음이던데?”
“만나셨나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지· 항상 날 눈 아래로 깔보던 양반이 나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최 서방을 찾을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야?”
“급하긴 급했나보네요·”
“어쩔 거야?”
영훈은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연희가 결혼할 때 영훈에게 어울릴 것 같다며 스위스에서 직접 주문한 바세론 콘스탄틴·
이제는 영훈도 무척 아껴서 무심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일부러 손목시계로 확인하고는 했다·
“아직 연락이 안 왔습니다· 강대성 측에서 포기하면 강재식 부회장과 협의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럼 그냥 기다리지 말고 강재식 부회장하고 거래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강대성은 어리고 힘도 없잖아· 게다가 지금까지 뭐 보여준 것도 없고· 싹수가 있긴 한 거야?”
“싹수는 없습니다· 욕심이 없는 건 아닌데 태생적으로 간이 작아 보인다고 할까요? 지금이야 호기롭게 나서보려고 하고 있지만 강재식 부회장이 호통 한번 내지르면 꼬리 말고 입도 뻥끗 못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강재식 부회장 때문에요·”
“그 사람이 어떤데?”
연희가 끼어들었다·
영훈은 미간을 찡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느낌인데 그냥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 싫었습니다·”
“느낌이라고?”
“네· 확실히 뭐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그랬습니다·”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는 건 거짓이었지만 원하는 대로 해주기 싫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사주를 봤다면 확실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그의 관상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코나 턱 등 전형적으로 재복을 타고난 그의 상 중에 가장 눈길을 끈 건 다름 아닌 눈이었다·
큼직하고 누런 빛깔이 언뜻 보이는 그의 눈은 호안(虎眼) 즉 호랑이 눈이라 하는데 인색하고 자비가 없는 사람이다·
인색하고 자비가 없으니 지금 당장은 궁색해 손을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제고 기회가 찾아오면 한입에 집어 삼키려고 달려들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대로 둘 수 있을까·
“그럼 어쩌게?”
“비록 강대성이 배짱이 없고 소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닐 겁니다· 게다가 그 혼자서는 무리라고 해도 그를 지원해주는 수많은 엘리트들을 생각하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강재식 부회장한테 얻어 터지고 쫓겨나는 거 아닐까?”
“글쎄요· 만약 그럴 것 같으면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위인입니다· 자기 살길은 알아서 찾아갈 겁니다·”
막다른 골목에서도 개구멍을 파고 살아 나올 사람이 강대성이었다·
그의 사주를 보면 건강도 크게 문제가 없고 남들은 그렇게 피해야 하는 물도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재복 있고 눈에 띄는 흉살도 없으니 어쩌면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사주라고 봐야 했다·
“우리도 이제 클 만큼 컸으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사실 난 Nodri Clare만 해도 배가 불러서 후식도 사양할 지경이거든·”
“후식은 제가 아니라 연희가 차려줄 분위기던데요?”
“얘가 하는 사업 난 불안해· 그래도 최 상무가 굳이 거부하지 않으니까 나도 그냥 두고 보는 중이야· 그게 달콤한 디저트가 될지 입맛만 버리고 체하게 될지는 모르지·”
“엄마는 꼭 시작도 하기 전에 초부터 쳐야 해?”
연희가 입을 삐죽 내민다·
“불안해서 그렇지· 그게 한두 푼 들어가는 거니? 게다가 우리 물산 직원들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건설사 직원들에다 패션쪽 인력까지 써야 하니까 사방에 손 다 뻗어놓고 괜히 너 욕먹게 할까봐 그래·”
“실패하면 욕 먹는 게 당연하지· 그 돈 쓰고 실패하면 욕 먹어도 싸·”
“너 되게 자신감있다?”
“히히··· 나 솔직히 이번에 쫌 자신 있거든·”
그 자신감이 더 올라가게 된 원인이 대성의 아내 때문일 것인데 만약 대성과의 거래가 틀어지게 되면 연희도 조금은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영훈은 더더욱 대성이 이번 거래 대금을 잘 지불해주길 바랐다·
*
을지로 리츠 칼튼 호텔·
전에 자리했던 그 자리에 앉은 강재식 부회장의 옆에는 대성이 아니라 만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늦는군요·”
만성이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강 부회장은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제 5분 지났다·”
“감히 아버지를 5분이나 기다리게 한 것만 해도 충분히 건방집니다·”
“그게 신경쓰인다면 마음에 담아 두거라· 그래서 언제고 상황이 바뀌면 그때 꺼내놓으면 될 일·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네· 그런데 전에 대성이하고 왔을 때도 늦었습니까?”
“그때는 최영훈 상무를 만나러 온 자리가 아니었지· 나중에야 우리를 만나고 싶어 불렀다는 걸 알게 됐지만· 심기가 깊은 자이니 늦었다며 섣부르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명심해야 해· 우린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그거야 언제 어디서든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을 살 때야 할 수 있는 말이다·
희소성이 있는 물건을 살 때는 항상 구매자가 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걸 잊는 순간 거래는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성이 대답한지 10분이 지나도록 영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열 받은 만성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려 할 때 문이 열리고 영훈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니네· 자네가 HS그룹 일을 총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안 바쁘면 그게 이상하지·”
“전에는 부회장님께서 곁을 내주지 않으셔서 악수도 못했습니다·”
영훈이 손을 내밀자 강 부회장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그때는 내가 당황해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그리고 이쪽은···?”
“내 아들이네· 그때 봤었던 놈은 둘째인 대성이· 여기는 첫째인 만성이네·”
“반갑습니다· 최영훈입니다·”
“강만성입니다·”
영훈은 그렇게 둘과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안 했네· 그때 짬뽕 맛이 괜찮아서 오늘은 일부러 식사를 하지 않고 왔네·”
“잘 됐군요· 일단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왜?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하면 체할 것 같아 그러나?”
“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강재식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농으로 치부하는 듯했지만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자네를 만날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어· 그때도 그렇고 오늘도 쉽게 갈 것 같지는 않아·”
“벌써부터 압박을 팍팍 주시는 걸 보니 저도 가슴이 떨립니다·”
“그럼 식사는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봅세· 내 자네의 이적명단에 올라가 있는 천보윤 의원을 사려고 하네· 가격 좀 잘 쳐줄 수 없을까?”
“그때는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강 부회장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느긋하게 물었다·
“이유를 좀 들어보세나·”
“제가 전에 경고했지 않습니까· 제 물건에 흠집 내려고 하시면 안 된다구요·”
“그게 무슨 소린가?”
강 부회장이 전혀 모른다는 투로 말했지만 영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모르는 척 하실 겁니까? 천보윤 의원에 대한 기사 소스가 전부 오성에서 나왔다는 거 알고 있는데요?”
만성은 영훈의 말하는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오성그룹 총수인 아버지에게 동네 아저씨 면박주듯 말하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 조심하시죠?”
그런데 영훈은 만성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고개를 모로 꼬며 비웃었다·
“그래요? 천보윤 의원에 대한 소스가 오성디지털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아들이 나서서 한 일이었습니까?”
그는 당황했다·
직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허술하게 일처리를 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당황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휴··· 진짜 왜 이렇게들 상도의를 어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할 만큼 해보다가 결국 안 될 것 같으니까 이러시는 거··· 다른 사람들은 넘어가줄지 모르지만 전 아니에요·”
“이 봐··· 지금···”
흥분하려는 만성을 강 부회장이 가만히 잡았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가 입을 다물자 강 부회장이 말했다·
“아들놈이 제 나름 대로 뭘 해보려다가 안 됐나보네· 젊다 보니까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기는 하는데 아직 실속이 없어· 그러니까 자네가 이해하게·”
“이해는 해드릴 수 있는데 가격표가 달라졌다는 건 인지하고 계시겠죠?”
“그건 우리가 감수해야겠지· 그래도 말이 통하는 자네이니만큼 인정을 베풀어줄 거라고 믿네·”
천하의 오성그룹 총수가 인정을 베풀어달라니···
그 말 그대로를 믿으면 안 된다·
말 한마디로 수백억을 깎을 수 있다면 그깟 립서비스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니까·
“그런가요? 그럼 어디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오셨는지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어디까지 생각하시냐는 말·
영훈이 게임으로 아이템을 사고자 할 때 가장 빡치는 물음이 이거였다·
이 물음을 현실에서 하게 될 줄은 영훈도 알지 못했다·
“자네가 물건의 주인이니 적정한 가격을 생각해놨을 게 아닌가?”
“옛말에 고려청자를 앞에 두고도 가치를 모르면 한낱 항아리나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물건의 가치를 어느 정도나 보시는지 알아야 저도 서로 간의 의견을 좁혀갈지 아니면 서로의 생각이 많이 다르니 그냥 접을지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강 부회장은 또 한 번 난감함을 느꼈다·
같잖은 대가를 입에 올리면 그냥 자리를 엎고 나가겠다는 말이다·
이런 협상은 절대적으로 갑이 을에게 또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을 평가할 때 할 수 있는 질문이다·
배짱과 안목 그리고 구매하고자 하는 이의 주머니 사정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니까·
“자네는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드는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남의 물건에 흠집을 내려고 했으면 그 만한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만성은 더는 참지 못했다·
“아버지 그냥 가시죠· 없으면 그만입니다· 이딴 허풍 듣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뭐? 물건을 팔아? 대통령을 팔아? 웃기고 있네· 그걸 살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니가 뭐라도 된 듯이 말하는데 너 인마 오래 못 가·”
영훈은 화내는 대신 강 부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이렇게 됐네요·”
강 부회장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들 녀석이 판을 깨버렸지만 사실 그도 내심 분노를 조절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린 녀석과 놀아주는 것에 한계가 왔다고 할까?
“아들 녀석이 흥분했나보네만 나도 궁금하기는 하군· 그 물건 어떻게 간수하고 어떻게 팔려고 그러나? 자네가 제법 이형준 대표를 잘 단속하기는 해도 끝까지 지키지는 못할 것인데? 이 대표는 결국 우리 딸과 결혼하게 될 거야·”
“글쎄요···”
그때 영훈의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문자를 살펴본 영훈이 빙그레 웃었다·
“뭔데 그러나?”
문득 궁금해진 강 부회장이 묻자 영훈이 만성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거래를 지속했어도 아마 깨졌을 겁니다· 그러니 돌아가셔서 아드님을 혼내지는 마십시오·”
“뭐라고?”
“물건이 팔렸거든요·”
순간 강 부회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구에게?”
“그건 대선 경선이 끝나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영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만성에게 고개를 돌리고 미소지었다·
“오래 가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당신? 나? 아니면 다른 사람? 궁금하네요·”
다른 사람···
강 부회장은 문을 닫고 나가는 영훈의 뒷모습을 보며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암투(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