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호스(1) >
“아버지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늦은 시간 오성케미컬 사장과의 면담을 끝낸 아버지를 찾아온 강만성이 불만을 내보였다·
“뭘 말이냐?”
“최영훈 말이에요· 아버지를 면전에서 그렇게 농락한 놈을 두고 보실 생각이세요?”
강재식 부회장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말 한번 잘했다· 내 앞에서 그런 짓거리를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지·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HS그룹이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면서 상당히 무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산조선소도 무리하게 얻었구요· 정치권을 조금만 움직여주시면···”
“고작 그거야?”
아버지의 눈빛에 책망의 빛이 깃들자 만성은 입술을 깨물다 항변했다·
“저대로 두면 오성그룹을 우습게 알 겁니다·”
“우습게 여기지 못하게 하려면 정치권을 움직일 게 아니라 네가 눌러주면 될 게 아니냐? HS건설이 인도 신공항 수주를 또 목전에 두고 있다던데 오성건설이 이걸 뺏어보는 게 어떠냐?”
“그건···”
“안 되겠지? 단순 건설 수주도 아니고 PM(Project Management)으로 통으로 받아 낸 걸 어찌 따낼까 싶지?”
“···”
만성은 할말이 없었다·
아직 오성건설은 해외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PM 계약은 해본적이 없었다·
오성건설의 시공능력이야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뿐 PM은 아직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 인식을 깬 것이 작년 우명건설과 HS건설의 인도 신공항 수주였고 그건 오성건설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럼 오성중공업은 어떠냐? 카타르가 곧 추가 LNG선을 발주할 테고 그 양이 60여 척에 이르는데 해주조선해양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겠어?”
“해주조선해양이 군산조선소를 추가로 가지게 되면서 그들이 가진 도크가 오성중공업 보다 많아졌습니다·”
카타르가 백여 척에 이르는 LNG선을 발주한다고 하지만 그걸 한번에 발주하는 건 아니었다·
각 조선사의 도크를 선점해 물량을 미리 확보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 기술력이 비등하다는 전제 하에 누가 많은 수주를 받아내는가는 조선소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그것도 힘들겠구나· 호텔은 이길 수 있겠어?”
“··· 죄송합니다·”
만성은 고개를 숙였다·
정치인을 움직이지 말고 실력으로 부딪쳐 깨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만성은 억울했다·
오성의 주력은 오성전자고 HS그룹의 주력은 전자가 아니니까·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부딪친다면 얼마든지 박살내줄 수 있는데 그깟 얼마 되지도 않는 공항 건설 따위에 밀려 야단을 맞는 건 정녕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 말대로 정치인 몇 움직이면 곤란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움직인 놈들한테 그냥 수고했다는 말로 퉁칠게냐? 종놈도 일을 부리면 삯이라도 줘야 하는데 벼슬아치를 부리려고 하면서 얼마나 줘야 할지 계산도 안 해봤어?”
“···”
“게다가 그 벼슬아치 움직여서 HS그룹 망하게 할 수는 있는 게 맞아? 고작 해야 조금 귀찮게 하는 정도 아니야?”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민구상이를 경선에서 이기게 만들면 그게 바로 제대로 엿먹이는 게다· 그럴 수 있겠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놈이 어디 있어? 됐고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데?”
“일단 언론을 움직여 민구상 대표의 치적을 중점적으로···”
만성은 미리 준비한 내용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각 신문사에서 일제히 민구상 대표를 띄우는 건 물론이고 그동안 그가 발의한 법안과 그의 개인사까지 부풀려 띄워주려는 것·
그리고 천보윤 의원의 의혹을 계속 부풀려 보도하며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민구상 대표의 조직원들을 은밀히 지원하고 경선 과정에서 국민들의 관심사인 경제 부동산 관련 공약을 추가 제시하며 지속적으로 민구상 대표를 민생 대통령으로 부각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그 모든 사항을 듣고도 강재식 부회장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거다’ 할 만큼 가슴에 와 닿는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그건 그렇고 다은이는 어찌 하고 있어?”
뜬금없는 다은의 소환에 만성이 당황했다·
“네? 그건 저도 잘···”
“다은이 결혼 때문에 지금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는 거 몰라? HS그룹하고 관계가 틀어졌으니 이제 다은이를 신영금융 대표에게 붙여야 할 게 아니야!”
강만성은 정신이 확 들었다·
“신영금융에 먼저 거래중지 통보하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거래는 신영은행이 아닌 다른 곳과 하겠다고 하면 혼비백산해서 달려올 겁니다·”
“언론부터 움직여라·”
“네· 기자들 불러 신영금융이 경영권 분쟁으로 신뢰도가 하락하고 언제든지 경영권 분쟁을 또 겪을 수 있다는 점을 보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신영금융이 오성그룹과 결별했을 때 겪게 될 파장을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구나· 진작에 그렇게 했어야지·”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다· 시간이 많지 않을 테니까·”
“네? 대선 경선이 끝나더라도 아직 대선까지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까요?”
강재식 부회장은 만성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아니다· 나가 봐·”
만성은 뭐라 입을 열려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부회장실을 나왔다·
*
“이 새끼들이 아주 미쳐가지고···”
형준은 경영지원본부 최윤석 전무의 보고에 욕설을 내뱉었다·
다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뭔가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기자들까지 움직였고 오성공장이 밀집된 화성지점에는 벌써부터 섹터단위로 자동이체 해지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냥 허풍이 아닌 것 같습니다·”
“허풍 아니겠죠· 두 번씩이나 저 지랄하는 거면 병신들도 아니고 이번에는 마음먹고 저 지랄하는 걸 겁니다· 하아···”
형준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냥 당장 결혼식을 올려버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건 괘씸죄가 적용된 거다·
여기서 결혼해버리면 괘씸죄에 개념없음죄까지 붙어 치도곤을 당할 게 뻔하다·
“대표님 이렇게까지 됐으니 그냥 생각을 바꾸심이 어떠신가요?”
“저한테 지금 고무신 거꾸로 신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오성이 여기서 그치면 다행일 겁니다· 하지만 사라진 이세준 전 부회장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만약 이세준 전 부회장과 오성이 손을 잡고 대표님을 몰아내려고 마음먹으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겁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니 형준도 덜컥 겁이 났다·
안 그래도 대주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와중에 오성과 손을 잡는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처리할 수 있으신 겁니까?”
“그냥 하는 말 아닙니다· 내가 처리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영 못 미더워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최윤석 전무가 대표실을 나가자 형준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수신자는 영훈이었다·
[기사 봤습니다· 전화할 것 같았어요·]
영훈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여보세요’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야· 나 여기서 결혼해버리면 강재식 그 인간이 나 갈아 마시려고 할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고··· 빨리 이거 어떻게 처리 안 돼?”
[농담이 아니라 결혼하겠다고 하세요·]
“뭐? 너 진심이야? 너 사람이 왜 그래? 민희 네 비서야! 네 비서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말만 그렇게 하시라구요· 어차피 며칠 뒤에 저쪽에서 결혼하자는 말 쏙 들어갈 겁니다·]
“어? 진짜?”
[네· 경선 끝나면 제가 무슨 말한 건지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민희 씨한테는 내가 이야기해둘 테니까 오성에다가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하세요·]
“그런 내가 너만 믿는다· 잘못되면 안 돼·”
[언제는 잘못됐습니까? 새삼스럽게···]
“크흠··· 말이 그렇다 그거지· 하여튼 알았어·”
전화를 끊은 형준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오성에서 결혼하자는 말이 쏙 들어갈 거라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수작을 해놨길래 오성에서 신영금융을 포기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도깨비 같은 놈의 속은 여전히 알기 어려울 뿐이었다·
*
[천보윤 자유행복당 대선 후보 확정· 경선 누적 득표율 52·4%]
강재식 부회장과 만성은 양손을 치켜 들고 환호하는 천보윤의 얼굴을 보다 TV를 꺼버렸다·
“죄송합니다·”
강만성은 경선이 마무리되기 근 이틀 여 동안 세 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만큼 민구상 대표를 다방면으로 밀었지만 천보윤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그간 천보윤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고 각종 비리를 저질러온 아내와 단호하게 이혼하며 깨끗하고 공정한 이미지를 마련했다·
악재가 오히려 호재가 된 셈이었다·
게다가 야당에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으며 품 안에 날아든 도수연 의원을 곱게 품어 야당 지지자들에 대한 확장성이라는 무기까지 손에 쥐니 무슨 짓을 해도 그의 지지율은 크게 고꾸라지지가 않았던 거다·
아무리 대기업이고 언론을 움직인다고 해도 이제는 SNS가 모든 걸 팩트체크하는 시대라 국민들을 조종하기는 어려웠다·
완벽한 패배·
강만성은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어영부영하는 대성을 비웃으며 대신 민구상 대표를 지원하는 자리에 앉았건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되고 말았다·
“후··· 됐다· 신영 이형준 대표는?”
“다음주에 시간 내서 다은이랑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만나는 여자는?”
“그 전까지 정리하겠다고 합니다·”
강 부회장의 입가에 그제야 한 줄기 미소가 머금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철용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제법 덩치도 크고 주먹도 매서워서 나쁜 짓을 일삼던 놈이었지· 하루는 그 놈에게 돈을 뺏기고 너무 억울해서 선생님에게 고자질을 했었단다· 어찌 됐을 것 같으냐?”
“오히려 더 곤욕을 치르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선생님은 같잖은 말 몇 마디로 훈계하고 그 녀석을 타일렀지만 어디 말 몇 마디로 사람이 바뀐다더냐? 난 그 녀석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단다· 어찌나 맞았는지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내가 어찌했을 것 같으냐?”
“어버지는 가만 있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그 때까지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동네 건달을 찾아갔지· 그리고 철용이 녀석이 다시는 날 때리지 못하도록 두들겨 패달라고 했다·”
“그 뒤는 안 봐도 뻔하네요·”
“흐흐···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짜릿한 쾌감이 들고는 해· 철용이 녀석은 그 다음부터 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거든· 이게 사람이다· 적당한 훈계와 설득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곤 하거든· 강한 몽둥이가 답일 때가 있는 법이다·”
“이형준 대표도 이렇게 몽둥이 한 번 드니 꼼짝을 못 하는데 괜히 어렵게 돌아왔습니다·”
“아니야· 최영훈 그놈이 먼 길을 돌아오게 만들었지· 그러니 대단한 게다· 사람의 마음을 조석지간에 변하게 만든다는 건 깊은 심계와 언변 그리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강재식 부회장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밖에서 똑똑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비서실장은 급히 들어와 핸드폰을 건넸다·
“다스패치라는 곳에서 다은 양 열애설 기사를 10분 전에 올렸습니다·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성그룹 영애 대선후보 아들과의 은밀한 연애]
만성은 옆에서 핸드폰에 뜬 기사 제목을 보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미친새끼들이··· 야! 이거 당장 막으라고 해! 절대 올리지 말라고 해!”
“그게··· 지금 다스패치 쪽은 모조리 먹통입니다· 사무실로 직원들을 급파하긴 했는데 아마 이 정도로 마음먹고 기사를 올렸으면 사무실에는 당분간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성은 강재식 부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이거 다은이가 수작 부린 거죠? 당장 다은이 찾아서···”
“찾아서 어쩌게?”
“네?”
“천보윤 아들을 꼬셔서 사진까지 찍어 뿌렸는데 찾아서 어쩌려고? 천보윤 아들한테 헤어지라고 협박이라도 할 셈이냐?”
“···”
“다은이 오면 대화를 해봐야겠다· 무슨 생각인지·”
“무슨 생각이긴요· 뭐라도 하나 가져가려고 저 수작을 부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나면 다행이지! 몇 개를 원하는지 들어봐야 결혼을 시켜줄지 훼방을 놓을지 판단할 게 아니냐! 쯧쯧쯧··· 네가 가진 것도 제대로 간수를 못해서는··· 네 동생이 저 짓거리를 하는 동안 넌 뭘 하고 있었어?”
아버지의 호통에 만성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 다크호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