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호스(2) >
한강 변 주차장에 세워진 포르쉐 카이엔 안에는 두 명의 남녀가 무거운 표정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강다은은 조수석에 앉은 천승모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요?”
승모는 불안한 표정으로 핸드폰에 뜬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은은 그런 그의 어깨를 쓸어내려 주며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아버지가 많이 곤란해하실 텐데····”
“이미 알고 계셨고 허락까지 하셨잖아요· 이 보도 역시 우리 회사에서 낸 거예요·”
“진짜요?”
“그럼요· 이건 1단계· 다음 단계를 준비 중에 있어요· 지금이야 승모 씨 아버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단계가 지날수록 여론은 반전될 거예요· 날 믿어요·”
“오성그룹에서 내가 사위가 되길 원한다는 거죠?”
“솔직히 우리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요·”
“오성그룹에서 낸 기사라면서요?”
“정확히는 작은오빠가 낸 기사거든요· 이제부터 잘 들어요 승모 씨·”
다은은 불안해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미리 알려 주는 기자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인터뷰를 해서는 안 돼요· 우리가 결혼하기 전까진 승모 씨 가족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믿지 말아요·”
승모는 결혼이라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재벌에 외모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자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했다·
“그 그럴게요·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당신이 변태거나 폭력적인 남자라면 후회할 것 같아요·”
“난 그런 남자 아닙니다·”
“그럼 됐어요· 적당히 사치스러워도 괜찮고 적당히 욕심을 부려도 괜찮아요·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어요· 난 돈 때문에 청승 떠는 거 별로거든요·”
“·······”
“아빠하고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지레 겁먹고 사고 치지만 말아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승모는 그녀의 박력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은은 그렇게 그를 안심시키고 그를 집 근처에서 내려 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는데도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만성과 마주치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오냐?”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그 난리를 쳐 놨는데 기다리고 있었지· 너 요즘 뭐 하고 다닌거야? 무슨 꿍꿍이야?”
“작은오빠는?”
“왜? 대성이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거야? 그런데 걔 지금 못 들어와· 지금 평택 공장에 문제 생겨서 내려가 있거든·”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오버하고 그래?”
다은의 반발에 만성은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마 그녀가 찍은 남자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천보윤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한 대 후려갈기고도 남았을 거다·
“그래? 어디 아버지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보자· 따라와·”
다은은 입술을 깨물고 만성을 따라 아버지가 계신 서재로 들어갔다·
묵묵히 책을 보고 있던 강재식 부회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은을 보며 말했다·
“어딜 다녀왔니?”
“누구 좀 만나고 오느라고요·”
“천보윤이 아들?”
“네·”
“앉아라·”
다은이 서재 가운데에 자리한 응접 소파에 앉자 강 부회장이 일어나 다가왔다·
상석에 앉은 그는 마치 다은의 생각을 읽어 내려는 듯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냐?”
“·······”
“말 안 할 테냐?”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아빠가 나한테 샤넬 백을 선물해 줬어요· 기억나요?”
다은의 뜬금없는 질문에 강 부회장이 미간을 찌푸린다·
왜 저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기억나지·”
“지금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 당시엔 되게 비싼 선물을 받아서 엄청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아빠가 나한테 그 선물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만 절대 회사는 눈독 들여서는 안 된다고· 오성그룹은 네 것이 아니라
고 하셨어요·”
“·······”
“받아들였어요· 난 딸이고 머리도 특출나게 좋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즐기며 살다가 결혼할 남자 만나서 오성그룹에 도움 좀 되는 거로 내 할 일은 다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게 맞아· 그게 네가 할 일이다·”
“하지만 여자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라는 건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였어요· 차라리 다른 가문에 붙여 줬어야죠· 그럼 납득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여자 있는 남자잖아요· 이형준 대표 그 여자 많이 좋아해요· 나도 여자고 사랑받고 싶어요·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평생 어떻게 살아갈
지 너무 뻔한데 딸을 그런 곳에 시집보내고 싶으세요?”
“그럼 말을 했어야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천보윤이 아들을 만나?”
“천보윤 아들 정도면 괜찮죠· 아빠도 며칠 전까지 천보윤 의원에게 끈을 대고 싶어 했잖아요· 그거 내가 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네가 그걸 잘할 수 있을까?”
“저 다른 건 몰라도 예쁨 받는 거 하나는 자신 있어요· 예쁨 받아서 시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든 오성그룹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도록 할게요· 그러면 되는 거잖아요·”
강재식 부회장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만성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구나·”
“아버지·”
“다은이는 제 나름대로 일을 벌여서 천보윤이를 끌고 오겠다고 했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냐?”
“·······”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대선 경선에서 민구상 대표를 전력으로 밀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뤄 낸 것이 없으니까·
강 부회장은 다시 다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성이는?”
“작은오빠는 왜요?”
“대성이 머리에서 나온 생각 아니었어?”
“아니요·”
“흥!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라· 네 머리에서 그 생각이 나왔다고?”
“조언을 받기는 했지만 내 선택이었어요·”
강만성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조언을 받았냐고!”
“말하기 싫은데?”
“뭐?”
다은은 등을 쭉 펴고 아버지인 강재식 부회장에게 말했다·
“나도 곁에서 조언해 줄 사람이 있어요· 내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부하는 아니에요· 아빠는 내가 오성그룹 일에 끼어들지 않기를 원하셨고 오빠들처럼 회사에 내 자리를 비워 놓지도 않으셨죠· 그러니 이 사람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말아 주세요·”
강 부회장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막내딸을 바라보았다·
“넌 내 딸이고 지금까지 누려 온 것들은 전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알아요· 그래서 지금 효도하고 있잖아요·”
“하하하! 이게 효도라는 거냐?”
“그럼 아니에요? 자기 발로 대통령 될 사람 며느리가 되겠다는데?”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불안한 만성의 눈빛과 마음을 졸이는 다은·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눈이 떠졌다·
“뭘 가지고 싶으냐?”
“무슨 소리세요?”
“그만하면 됐다· 내가 널 잘못 보았어· 이만하면 너한테 기회를 줄 만하다고 생각하니까· 생각한 게 있을 거 아니야? 말해 봐·”
다은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애매한 대답이고 절묘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러려무나·”
강 부회장은 상관없었다·
뭐가 됐든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
이번 일로 다 알지 못했던 세 남매의 능력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성이 말고는 마음에 차는 놈이 없었는데 그동안 눈에 차지 않던 둘이 생각지도 못한 능력을 보여 주어 한편으로는 흡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만성은 달랐다·
아예 경쟁자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다은이 갑자기 치고 올라와 뭘 뺏어갈지 고민한다는 개소리를 눈앞에서 지껄여 댔으니까·
하지만 그 개소리를 응징할 수 없다는 게 그가 처한 현실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다은을 노려보았고 다은은 그런 큰오빠의 시선을 무시했다·
아버지의 시험에서 통과한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쁘기 때문이었다·
*
영훈이 여느 때처럼 연희와 같이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뜻밖에도 오성전자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회사 근처 조용한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지금 만나자고 했고 영훈은 궁금함에 바로 회사를 나왔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해장국집·
점심시간도 아닌지라 손님도 없는 그곳에 영훈이 들어서니 정장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여 보이곤 안쪽을 가리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안쪽으로 들어가니 신발을 벗고 앉을 수 있는 자리에 강재식 부회장이 앉아 있었다·
국밥 두 개와 소주 한 병이 자리하고 있어 영훈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제가 늦으면 국밥이 식었을 텐데요·”
“늦지 않을 것 같았네· 늦으면 다시 달라고 하면 그만이지· 들게· 이 집 할매 솜씨가 아주 괜찮아·”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돼지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결한 영훈이 휴지로 입을 닦을 때 소주잔에 술을 따르던 강 부회장이 말했다·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영훈은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네·”
“힘들었겠구만·”
“어릴 땐 힘들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나름 있을 만했습니다· 놀고먹고··· 하는 일이 없었거든요·”
“왜 절에 들어간 건가?”
“고아였습니다·”
“그렇구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왜 우리 애를 부추겼나?”
이미 다 알고 있는 눈빛이다·
영훈도 그가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내딸의 사랑 공작이 누구 손에서 진행됐는지도 모르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회장님보다 더 적합한 파트너라고 생각했거든요·”
“대성이가 나보다 더 좋은 파트너다? 어째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까요·”
“하하하!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관상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사주를 보고 나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며 언제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이라는 걸·
“부회장님과의 대화 이후에 곰곰이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성그룹은 거대한 기업이고 솔직한 말로 굳이 이것저것 조건을 재면서 거래를 하기보단 좋은 마음으로 협력한다면 서로 마음 상할 일도 없고 더없이 좋은 일일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할 거라는 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어째서?”
“신영금융 이형준 대표 포기 안 하실 거잖습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영훈을 보고 강재식 부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신영금융은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부회장님이 그걸 포기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그냥 육감이라고 해 두시죠·”
“그럼 그 육감 때문에 내 아들을 부추겼다?”
“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제 육감이 틀렸다고 보십니까?”
무표정하게 물을 들이켜는 영훈을 보며 강재식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난 자네가 천보윤 의원을 꺼낸 순간부터 신영금융에 대해서는 관심을 껐다네· 얼마 전에 신영금융을 압박한 건 거래가 깨졌기 때문이었지· 밥상을 엎었으니 남은 거라도 주워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훈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럼 제 실수였군요· 죄송합니다·”
“끝인가?”
“진심 어린 사과였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걸 원하시는 건가요?”
“난 장사꾼이니 가식적인 사과도 괜찮네· 그에 버금가는 대가가 있다면 말이야·”
“뭘 원하십니까?”
“뭘 줄 수 있나? 그것부터 들어 보세·”
영훈은 빙그레 웃었다·
얼마 전 영훈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강다은 양의 결혼을 묵묵히 응원하겠다는 말입니다·”
강재식 부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마디로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면 다은의 결혼까지 깨 버리겠다는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간 신영금융이 또 흔들리지 않겠어?”
“이제는 늦었습니다· 천보윤 의원이 경선에서 이기기 전이었다면 그 협박이 꽤 강력했을 텐데 이제는 그게 그렇게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네요· 그러지 마시고 제가 하나 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십시오·”
“자네 지금 장난하나?”
“장난이 아닙니다· 부회장님 지금 걱정하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얼 걱정해?”
“두 아들 중에 누가 부회장님께 위협이 될 만한 놈인지 살펴보는 중 아니셨습니까? 전 그런 줄 알았는데요?”
강재식 부회장의 눈빛이 거대한 파도를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영훈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성그룹처럼 거대한 제국은 자고로 내부의 적이 가장 위험하죠· 일단 전 부회장님의 적이 아닙니다·”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건가?”
“아무것도··· 전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점심 잘 먹었습니다· 언제 제가 다시 한번 대접하도록 하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일어난 영훈을 떨리는 눈동자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 다크호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