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1) >
강남역 인근의 한 오피스텔에 자그마한 철학관 하나를 오픈한 명우도사는 요즘 새로운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요즘 타로 사주를 취미로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덕에 한결 마음이 젊어진 듯했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사람 인생 곧 망할 것처럼 악담을 퍼붓지 않아도 됐고 돈 때문에 효과도 없을 부적을 그리지 않아도 됐다·
마음에 거리낄 게 없으니 가슴이 무겁지 않고 가슴이 무겁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없어지며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물론 그동안 벌어 두었던 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용신에 대해 배워 보았고 다음 시간에는 격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업을 마친 명우도사는 인터넷으로 아기용품을 검색했다·
그와 결혼했던 모로코 와이프가 얼마 전에 임신했기 때문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철없이 날뛰던 젊은 날 얻었던 자식은 귀한 줄 몰랐고 예쁜 줄 몰랐다·
그저 인생의 커다란 짐이었을 뿐·
이제 기운도 떨어지고 세상을 보는 눈에 여유를 가지게 됐을 때 자식을 얻게 된다는 소식은 그를 한없이 들뜨게 만들었다·
그저 건강하기만 했으면····
그 마음 하나로 육아용품을 검색하고 있을 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어느새 입에 붙어 버린 영업용 친절 말투가 그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에 들었다·
“오라버니····”
문을 살포시 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함께 얼굴을 보인 이는 놀랍게도 임복희였다·
“네가 웬일이냐?”
영훈이 그녀를 만나고 간 다음에 한풀이하듯 한바탕 쏟아 내고 간 그녀는 그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당연히 명우도사도 그녀에게 연락을 해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임복희는 과거의 악연이자 지우고 싶은 떼어 내고 싶은 마음의 짐이었다·
차마 먼저 쳐낼 수 없는 안타까운 인연이었기에 그녀가 스스로 떠난다면 모를까 다가오는 그녀를 내칠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는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듯 중얼거리더니 급기야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에 명우도사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후··· 무슨 일인데 그래?”
“나 간이 안 좋대·”
“뭐? 어디가 안 좋아?”
“간이 안 좋대· 작년부터 계속 피곤하고 요새 들어 윗배 쪽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글쎄 간암 초기라는 거예요·”
“초기라니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암이라는데!”
“초기니까 나을 수 있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명우도사가 달래 주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릴 때 그녀는 푹 숙였던 얼굴을 홱 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얼굴이 살짝 누렇게 보이기도 했다·
“나을 수야 있겠지· 밀레니엄하고도 이십 년이 흘렀는데 그깟 간암 초기 못 고치겠어요?”
“그거 걱정하는 게 아니었어?”
“오라버니··· 생각해 봐요· 병원에 그거 고친다고 들락날락하고 몸도 다 망가질 거 아니야· 게다가 나 간암 걸린 거 알면 누가 나한테 점 보러 와요? 난 망한 거야·”
그녀는 그렇게 한탄을 하더니 엉엉 울었다·
명우도사는 어이가 없었다·
다른 병도 아니고 아무리 초기라지만 암인데 암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손님이 떨어질까 봐 울고 있으니 그녀의 욕심은 정말 끝을 몰랐다·
“이놈아 넌 어떻게 변하질 않았어?”
“오라버니 아들··· 오라버니 아들이 그랬잖아·”
명우도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아들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
“그 끝이 머지않았다고· 내 명궁을 보면서 말했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래 그랬었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었는데 잊고 싶어서 잊어버렸으리라·
“오라버니 아들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안 된다·”
“나 이대로 끝나는 걸지도 몰라요·”
그녀의 끝난다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돈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안타까운 마음에 아들에게 연락해 봤을 테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절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다·
“사람 사는 일에 어찌 절대적인 게 있어? 노력하면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다·”
“내 말이면 죽고 못 사는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그년도 연락 한번 없어요· 오라버니 아들과 엮인 이후부터 도대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어찌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겠어?”
“그딴 생불 같은 소리 그만 해요! 이 나이에 내가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해요? 나 화옥신녀야· 내 말 한마디면 기와집을 싸 들고 바칠 사람들이 한 무더기였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랬지· 옛날이야기다·”
“나 죽을 때까지 화려하고 싶어요· 비참하게 늙긴 싫어·”
“아프다고 그 이름 어디 안 간다· 네 이름이면 죽을 때까지 배곯지 않아·”
“의심하겠지요· 자기가 암에 걸릴지도 몰랐던 점쟁이를 뭘 믿고 재산을 들고 와?”
“재산 한 무더기 들고 와야만 점쟁이로 먹고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명우도사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 화옥신녀예요· 내가 왜 한 시간에 5만 원짜리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한 시간에 5만 원도 못 버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천지다·”
임복희는 빽 소리를 질렀다·
“왜?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내 아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든? 들었지 않니?”
“그러니 만나 보고 싶어서 그래요· 명궁을 보고 내가 이리될 줄 알았다면··· 혹시나····”
“혹시나 기대하지 마라· 그 아이 생각보다 냉정하다·”
“날 싫어하는 거 알지만 그래도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잖아요·”
명우도사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이것아 지금 신기가 많이 죽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넌 아직도 신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도 네 미래를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고 싶으냐?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부끄러울 때는 지갑에 돈이 없을 때고 통장 잔고가 비었을 때예요·”
“말했듯이 그 아이는 냉정한 놈이다·”
“오라버니도 그 아이 잘 모르잖아요·”
“잘 몰라도 내 아들이야· 그 눈빛과 입술만 보고도 성정을 알 수 있다· 내가 왜 그놈에게 연락을 안 하는지 알아? 내가 아비 노릇을 못 해서 그래· 아비 노릇 못 했는데 아비처럼 굴면 그 아이는 한 가닥 남은 선도 끊어 버릴 놈이다·”
“·······”
“일단 병부터 치료하고 그다음에 돈 소리 해라·”
“오라버니가 나 꼭 좀 도와줘요·”
“정신 차려· 네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이다· 가· 가서 일단 치료부터 하고 와· 그럼 그때 봐서 내가 물어보기나 할 테니·”
“약속하는 거예요· 꼭 약속하는 거예요?”
“알았어· 얼른 가·”
임복희는 그렇게 눈물을 찔찔 흘리고는 명우도사의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지 채 1분도 되지 않았을 때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명우도사가 짜증이 올라와 문을 벌컥 열었더니 임복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여자·
“안녕하세요·”
모델처럼 늘씬하고 예쁜 여자·
재벌 중에서 저 정도 외모를 가진 여자는 아마 며느리를 제외하면 없으리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누?”
한주연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더니 강남에 이런 곳을 여셨더군요· 제자들을 받고 점은 보시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니 입 아프게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구나·”
“도와주세요·”
명우도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신당을 접은 후로 매일 아침마다 운세를 보는 짓을 관뒀는데 만약 오늘 운세를 봤다면 사방에서 잡것들이 몰려들어 크게 곤란한 운세였을 게 분명했다·
왜 그렇게들 도와달라고 하는지····
“가· 난 이제 점 안 봐 줘·”
한주연은 잠시 망설이더니 아예 반쯤 열린 문을 비집고 들어와 학생들이 앉는 책상에 떡하니 엉덩이를 붙였다·
“뭐 하는 거야?”
“저 좀 도와주세요·”
“뭘 도와줘?”
“얼마 전에 남자를 만났어요·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단 한 번도 곤란을 당해 본 적 없는 가문이었다고요· 그런 남자랑 선을 봤는데 그 남자 아버지는 감방에 들어가고 그 남자는 가진 걸 홀랑 날렸어요· 알거지가 된 건 아니지만··· 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한주연도 눈물을 뚝뚝 흘려 댄다·
명우도사는 혀를 쯧쯧 찼다·
“남자를 만나면서 배경을 안 볼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돈만 보고 남자를 만나는 건 다르지· 네 사주에 좋은 남편이 있다면 어떻게 고르든 상관없겠지만 넌 이미 글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혼인 시기를 놓쳤다는 말이야· 결혼 운이 들어오려면 최소한 3년은 지나야 할 것인데 이제 와서 남자를 찾아 달라고 하면 어쩌겠어?”
“3년이요?”
한주연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느긋하던 집안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올 초부터 그룹은 전체적으로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었고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결혼 말고는 답이 없어 보였던 거다·
세영 정도면 그저 단순한 신문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주무르던 거대 언론 권력이니 크게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진짜 신문 방송 말고는 남은 게 없는 기업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그룹 총수는 감옥에 가고 남은 장자 역시 검찰에서 수사를 받고 있으니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제는 자신의 팔자가 왜 이런지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결혼할 수야 있지· 운이 없다고 못 하던가?”
“결혼운 없이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합이 안 맞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겠지· 내 전에도 말했지? 사람과 사람 간에는 궁합이라는 게 있다· 궁합이 안 맞는 사람과 사업하면 사업이 일어날 수 없고 궁합이 안 맞는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 자식이 원수지간이 된다· 하물며 남녀 사이라면 어떻겠어?”
“그럼 전 3년 간 남자를 쳐다보지도 말라는 건가요?”
“그래· 내가 볼 때는 그게 정답이다·”
“말도 안 돼····”
혹시나 다른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찾아왔지만 절망스러운 대답만 듣고 말았다·
“알았으면 가서 열심히 살아·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썩 꺼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다·
저렇게 말하니 그의 말을 더욱 신뢰할 수밖에····
악담을 하면 당연히 그걸 막아 줄 부적이나 굿 따위를 하자며 돈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인데 잡귀 보듯 쫓아내려고 하니 그녀에게는 더욱 진실처럼 느껴졌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도사님 예전에는 굿도 하셨다면서요?”
“이젠 안 해· 신빨이 딸려서 효과도 없어· 그리고 이건 굿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악귀가 들러붙은 것도 아니고 인연이 없는 데다가 성격이 그렇게 타고난 걸 백날 굿해 봐야 뭐 해? 공부 못하는 놈 굿해 주면 수능 만점 맞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명우도사는 말이 길어지기 전에 그녀를 내보내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밖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와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도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떨어졌다·
“어··· 여긴 어떻게····”
“물어볼 게 있어서····”
영훈은 대답을 하다 안에 있는 눈이 빨개진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명우도사를 바라보았다·
해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명우도사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점을 봐준 게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그때 이후로 나 싹 정리했어· 여기는 그냥 일종의 아카데미 같은 거야 사주 아카데미· 사주 가르쳐 주고 수업료만 받는 거라서 점을 봐 주거나 하지는 않아·”
“그런데 왜 울고 있습니까?”
“예전에 점을 봐 준 여잔데 또 찾아와서 그냥 몇 마디 해 준 거야· 돈 받을 생각도 없어· 그쵸? 아가씨가 말 좀 해줘 봐·”
한주연은 명우도사가 갑자기 나타난 청년에게 쩔쩔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아! 그 여의주!”
연희와 결혼한 남자·
명우도사가 여의주라고 했던 그 남자가 분명했다·
“여의주?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게····”
명우도사가 난처해지려는 찰나 한주연이 눈물을 닦고 일어나며 말했다·
“두 분이 아는 사이였어요?”
“네·”
영훈이 담담히 수긍했다·
“언제부터요?”
이번 질문의 대답은 명우도사가 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내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이상하잖아요· 그때 5천만 원이나 주고 물어본 거였는데·”
“그 돈 돌려줬잖아·”
“그랬긴 했지만····”
처음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욱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생각해 보니 명우도사가 그걸로 자신에게 뭘 얻어 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훈이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일단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미안해요· 아 저 한주연이에요· 예전 김태민 회장과 결혼하려다가 헤어졌어요· 연희 결혼할 때 찾아갔어야 하는데 미처 못 갔네요·”
“아··· 그랬군요· 반가워요·”
영훈은 그녀와 악수한 뒤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관상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 우연(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