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2) >
그녀는 전형적인 목(木)의 체형을 타고났다·
얼굴이 갸름하고 몸매가 길쭉하다·
나무는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데 얼굴이나 체형 모두 순수한 나무를 닮아 부귀를 누릴 상이었다·
이마가 반듯하고 코가 살아 있으며 입이 시원해서 여자치고 이보다 좋은 관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딱 하나 그녀의 눈이 문제였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영훈은 단번에 눈동자가 황적색으로 탁한 기운을 띠는 걸 알아보았다·
저런 눈을 타고나면 박복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간다·
한마디로 그녀의 다른 부분과 눈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일단 명우도사에게 중요한 사람이 온 이상 더 물어볼 수 없음을 알고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크흠··· 뭐 내가 말한 거 명심하고·”
“네·”
말로는 알았다고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도 미련을 품고 있는 게 확실했다·
명우도사는 혀를 차며 그녀를 내보내고 아들에게 얼른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앉아·”
영훈은 그가 가져다준 의자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저 의자일 뿐인데 그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는 것 자체가 왠지 그와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훈은 그 의자가 아닌 다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명우도사는 그런 아들의 행동에 약간 서운했지만 이내 웃으며 물었다·
“뭔데?”
“어머니 묘는 어디에 했어요?”
곧 명절이 다가오는데 영훈은 문득 성묘할 곳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묘할 조상이 없다는 것·
어찌 보면 홀가분할 수 있지만 마음 한구석조차 기댈 곳이 없다는 건 무척이나 쓸쓸하고 외로운 법이다·
“혼자서 찾아가기 어려운 곳인데?”
“이상한 곳인가요?”
“아니 아니··· 좋은 곳이다· 풍수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해서 잡은 명당인데 차로는 들어가기 힘들고 30분 정도 산을 타고 올라야 한다· 내가 길을 안내해 주마·”
“한 번만 그렇게 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지만 산속을 혼자 헤맬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말만 해라· 그게 끝이냐?”
“혹시 임복희 또 만난 적 없어요?”
명우도사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오늘 아침에 점이라도 봤어?”
“오늘 만났어요?”
“점 본 거 아니었어?”
영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내가 점을 왜 봅니까? 내 사주도 잊어버렸구만·”
“왜? 왜 자기 사주를 잊어버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요· 매일매일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아요·”
명우도사는 뭐라 항변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저 정도로 신기를 타고났다면 미래를 보는 게 두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죽은 아내 역시 아침마다 점을 본 적도 없었고 자신의 미래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댄 적도 없었다·
손님들에게는 조심해야 할 것과 노력해야 할 것을 그렇게 알려 주었으면서도 자신이 조심하고 노력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걸 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돈 버는 것에만 관심 있었고 어떡해서든 아내가 신기를 유지하고 더 유명해지기만 바랐으니····
“그랬구나··· 네가 오기 얼마 전에 복희가 다녀갔다· 난 그걸 알아맞혔으니 네가 아침에 점이라도 본 줄 알았다·”
“뭐라고 하던가요?”
“네가 복희의 명궁을 가리키며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후 놀랍게도 간암 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간암 초기라고 했어·”
영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암이라····”
“그게 보였던 게냐?”
“네· 금극목이라 간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간암일 줄은 몰랐네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연히 간암을 생각한 게 아니고?”
“인생의 끝이 꼭 죽음이란 법은 없습니다· 성냥에 불을 붙일 때는 활활 타오르다가 바람이 불어 꺼지면 미처 타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처럼 불같이 타오르던 인생이 끝나면 남은 건 껍질뿐입니다· 생은 끝나지 않았지만 실은 끝이나 다름없습니다·”
“허··· 그렇구나·”
명우도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평생 점쟁이로 살았음에도 아들의 깨달음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물어본 거야?”
“난 당신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영훈은 마음속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지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번 넘게 고민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 그럼··· 걱정하지 마·”
“그 여자는 아마 죽을 때까지 죄를 짓고 살 거예요· 입이 쉬지 않는 한····”
“그럴 거야· 그럴 만하지·”
“행여 또 찾아와서 뭘 하자고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주지 마세요· 그 사람은 독을 품고만 있는 여자가 아닙니다· 원하는 걸 가지기 위해 사방에 독을 퍼뜨리는 여자예요·”
“알았다· 내가 명심하고 있으마·”
본래도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지만 아들이 이렇게 말하니 아예 그녀와 인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까 한주연 씨 왜 온 겁니까?”
“아··· 예전에 남자를 찾아 달라고 했었어· 저 여자 재벌인 건 알지?”
“네 알고 있어요·”
“저 여자가 욕심이 많은데 효심이 깊다고 해야 하나? 자기네 회사를 위해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현진중공업 김태현도 그렇고 얼마 전에 만난 남자도 그랬나 봐· 남자 아버지는 감방에 가고 그 남자는 가진 걸 홀랑 날려 버렸다는 거야·”
영훈은 누군가가 생각났지만 설마 그 남자가 한주연과 만나려 했던 남자일까 싶었다·
“그런가요?”
“응 한탄을 하더라고· 자기 인생이 왜 그러냐고· 오죽하면 굿을 하거나 부적을 써 달래·”
“해 준다고 한 건 아니죠?”
“아유 그럼··· 이제 그런 거 안 하지· 돈 싸 들고 와서 해 달라고 해도 안 해 준다고 하니까 엉엉 울더라고·”
“으흠··· 안 되는 건데 집착하네·”
“그렇지? 네가 봤을 때도 그렇지?”
명우도사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이 있는데 설마 자신이 잘못 보지는 않았을 거라는 걱정도 섞여 있었다·
“사주를 보지 못해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사주? 사주는 내가 알지 기다려 봐·”
명우도사는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서둘러 그녀의 정보를 찾았다·
보통 점쟁이들은 손님이 오면 손님의 사주를 적어 놓거나 요즘에는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는 한다·
예전에는 다들 자신의 사주를 기억하지만 요즘에는 자신의 사주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점집에 갈 때는 자신의 사주가 적힌 종이를 다시 찾아본다거나 부모님에게 묻곤 하는데 즉흥적으로 가게 될 때면 사주를 몰라 곤란해할 때가 있다·
이렇게 사주를 저장해 놓으면 그저 사주 한 번만 봐 주는 게 아니라 궁합을 봐 줄 때도 좋고 나중에 택일을 하거나 자식의 이름을 지어 줄 때도 같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점집 입장에서는 적어 놓는 게 유리했다·
컴퓨터를 잠시 뒤적이던 그가 물어보지도 않았던 한주연의 사주를 읊었다·
그런데 영훈은 명우도사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손님 사주는 왜 안 지웠어요?”
“어? 아니 그냥····”
“그거 가지고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손님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알았어· 지울게· 안 그래도 컴퓨터 용량이 부족하기도 했어· 지울 거야· 크흠····”
지운다고 하니 영훈은 마음이 놓였다·
신당을 정리한 것부터가 어지간한 결심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었으니 고작 이걸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관상으로 보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네요· 복이 없는 여자예요·”
“복이 없다고?”
“네· 자꾸 결혼을 하려고 하니 어쩌면 저 여자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저 여자가 집을 나가야 일이 풀리기 시작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랑 비슷하기도 하네요·”
지금이야 사주를 잊어버렸지만 어찌 자신을 절로 이끈 이유를 잊었을 리 있겠는가·
되는 일이 없고 가업이 몰락하며 타고난 욕심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부를 빼앗고 힘들게 할 팔자라는 것을·
20년 넘게 절에서 타고난 업을 씻고 욕심을 버렸기에 잘되고 있을 뿐이지 그 사주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너? 네가 왜?”
“저도 그랬거든요· 하여튼 저 여자는 타고난 미모와 재산을 제대로 활용 못 할 팔자입니다· 아무리 좋은 남자를 알려줘 봤자 본인이 싫어하든 남자가 싫어하든 이어지지 못할 겁니다·”
명우도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저 여자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거냐?”
“이미 과한 부와 미모를 타고났는데 좋은 남편과 자식까지 얻을 수 있겠어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가진 부를 모두 포기하면 누가 소개해 주지 않아도 아주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가진 부는 그만큼 크니까요·”
“허허··· 그렇구나· 어찌 보면 간단하지만 불가능한 일이겠지·”
“글쎄요· 어쨌거나 내가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복희 걱정은 하지 마· 내가 단호하게 끊어 버릴라니까·”
“알겠어요·”
영훈은 잘 지내라는 말을 하려다 그냥 문을 닫고 나왔다·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
요즘 들어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재숙이었다·
좋은 사윗감 잡아서 시집 잘 보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세 자식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중 누구의 손도 들어 줄 수 없었다·
만성이는 장자였고 대성이는 항상 형에게 치여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은 아이였다·
다은이는 막내딸이라 그런지 뭘 하든 눈에 밟히는 아이였다·
그러니 이런 숨 막히는 집구석 분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그녀였다·
“너 이리 와 앉아 봐·”
결국 재숙은 외출 준비로 거울 앞에 있는 막내딸을 불러 앉혔다·
평소에도 엄마 말을 그리 잘 듣는 편이 아니었던 딸이지만 요즘 들어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재숙이 다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 진짜 그 남자랑 결혼할 거야?”
“응·”
“사진 보니까 인물이 영 아니더라· 그런 남자랑 한 이불 덮고 살 수 있겠어? 너 결혼할 남자는 일반인 아니야· 적어도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눈치 보여서 이혼도 못 해·”
그 떠들썩한 소란을 피우며 결혼한 아들 내외가 결혼한 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혼한다고 하면 대통령 위신에 좋지 않은 영향이 가리라는 건 어린아이들도 알 만한 사실이다·
사실상 대통령 자리에 있는 5년 동안은 이혼 불가능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왜 벌써 이혼할 생각부터 해?”
그런 면에서 다은의 질문이 재숙의 입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혼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저런 말이 딸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 그럼 그 인물 데리고 평생 살려고?”
“모르지· 이혼할 수도 있고· 그런데 결혼 전부터 그걸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
“너 말 이상하게 한다· 누가 들으면 요즘 나오는 기사처럼 진짜 걔랑 2년은 연애한 줄 알겠어·”
다은의 표정이 굳어진다·
“엄마 왜 이래?”
“뭐가?”
“나 떠보는 거야?”
“내가 널 왜 떠보니?”
“아니면? 솔직히 대통령 아들이면 대단한 거 맞잖아· 아무리 5년 계약직이라고 하지만 그 계약직 권한이 재벌 기업 한두 개 해체할 만큼 대단하다고· 그리고 심지어 영부인도 없어· 그럼 내가 주목받게 되겠지· 엄마가 날 생각한다면 지금 나한테 그 기회를 통해 뭘 얻을 수 있는지 신나게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 그거 좋기만 한 거 아니야· 온 국민들이 다 너 지켜보는 거라고· 부담되지 않니?”
“솔직하게 말해 줘· 엄마는 내가 큰오빠 걸 뺏을까 봐 이러는 거지?”
재숙은 다은의 날카로운 표정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다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엄마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계속 쏘아붙였다·
“너무하다· 지금이 조선 시대야? 장자만 사람이고 나머지 자식들은 들러리 취급하는 거잖아·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어?”
재숙이 흥분한 그녀를 달래 주려 할 때 일하는 아줌마들과 조용히 점심을 준비하던 만성의 아내이자 첫째 며느리인 여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그럴 수 있죠· 기업이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저는 아가씨가 갑자기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다은이 욱하는 마음에 맞받아치려고 할 때 이번에는 대성의 아내인 새롬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형님 아가씨도 엄연히 상속자예요· 그렇게 말하면 아가씨가 서운하죠· 누가 보면 오성이 형님 거인 줄 알겠어요·”
재숙은 머리가 아파 와 이마를 짚었다·
이제 서로 이빨을 드러내 놓고 힘겨루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 우연(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