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3) >
“죄송해요 어머님· 싸우려는 게 아니라 그냥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나섰어요·”
새롬은 이마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인 재숙에게 사과했다·
“세상에 집안에서 두 며느리가 날을 세우고 싸우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이 변한건지···”
“죄송해요 어머님·”
재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난 모르겠다· 지긋지긋해· 누가 가지든 너희 마음대로 해라·”
재숙은 그렇게 말하곤 가방과 옷을 챙겨 집을 나갔다·
아마도 병원으로 갔으리라·
시어머니가 화를 내고 나가는 걸 보면서도 두 며느리는 그저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재숙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여진이 입을 열었다·
“동서 아까 그 말은 조금 당황스럽네· 누가 보더라도 내 남편이 강가의 첫째 아들이고 지금 그룹에서도 핵심기업을 운영하고 있어· 첫째가 물려받는 게 당연한 거야·”
“그래요? 이상하네요· 내가 알기로 시아버님도 둘째라고 알고 있는데···”
여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방금 굉장히 위험한 말을 한 거 알아? 동생이 형 뒤통수를 치겠다는 거야? 뭐야? 동서 그 생각으로 결혼한 거였어?”
“흥분하지 마세요 형님· 아가씨를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사실을 말씀드린 것 뿐이에요·”
“내가 가족 취급하지 않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엄연히 아버님 딸인 아가씨를 재산 한푼 욕심내면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할 리가 있어요?”
여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새롬을 쏘아보았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도 새롬이나 다은이나 별다른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롬은 다은의 옆에 앉아 마치 들으라는 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형님이 저렇게 말해도 아버님이 설마 아무것도 안 주시겠어? 근데 기사 보니까 피부가 너무 좋게 나왔더라· 요즘 피부과 어디 다녀?”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전 이만 일어날게요·”
다은은 일이서서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서늘한 기세로 눈빛을 쏘아내는 여진에게 말했다·
“탐나는 것도 이해하고 내가 꼴보기 싫은 것도 이해해요· 그런데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이해하세요· 이해해야지 어쩌겠어요· 내가 우리 아빠 딸인 걸· 그러니 내가 뭐라도 가져보겠다고 설치는 게 보기 싫으면 언니가 이 집을 나가면 돼요· 솔직히 요즘 시부모님 모시고 사는 집이 어
디 있나?”
다은이는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새롬이 입술을 깨문 여진을 보며 말했다·
“성격이 보통 아니네요· 형님이 이번엔 머리 좀 아프겠어요·”
“동서는 이 상황이 재밌니? 그렇게 여유 부리면서 재밌어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요? 난 충분히 즐겨도 될 것 같은데· 아시죠? 전 이 집에 시집오면서 뭐 가지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욕심이 없으니 남들 싸우는 게 재밌어 보여서···”
여진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거짓말은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면서 하지? 그래 그렇게 재미있어 해· 어디 그 즐거움이 오래 갈지 두고 볼게·”
새롬은 무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면서 들리는 여진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
민구상 대표는 차를 타고 출근하는 내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수행기사와 잡다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인 그도 이번 경선에서 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던 거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도착한 사무실·
민구상 대표는 도착했음에도 내리지 않고 잠시 꾸물거렸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또 하루를 보내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다려 봐·”
“네·”
민 대표는 핸드폰을 열어 주소목록을 검색하곤 화옥신녀를 찾은 뒤 전화를 걸었다·
“날세·”
[민 대표님? 요새 연락 한통 없으시더니 웬일이세요? 손자 이름 짓고 아예 신당과는 인연을 끊으신 줄 알았더니?]
“내가 끊기는 왜 끊나?”
[그렇지 않고서야 대선 경선을 앞두고 어떻게 연락 한 번 없으실 수가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그래? 무슨 이야기?”
[이미 다 지났잖아요· 지금 말해봐야 죽은 아이 불알 만지기지· 민 대표님 솔직히 나 이번 경선 뉴스 보고 너~무 안타까웠잖아요· 하··· 참 진짜··· 어떻게 질 수가 없는 싸움을 지세요?]
“크흠··· 거 날 놀리는 겐가?”
[놀리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랬다는 거죠· 으이그···]
“내가 좀 바빴어야지· 서울에서 거기까지 좀 머냐고·”
[저 이사했습니다· 문자까지 보내드렸었잖아요· 서울 삼청동이면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린데!]
“이사했다고? 아··· 그래· 문자···”
민구상 대표는 예전에 그녀에게서 왔었던 문자를 기억해냈다·
앞 부분만 슬쩍 보고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해 그냥 지워버렸는데 그게 신당을 옮겼다는 거였다니···
[그래서 지금 오신다구요?]
“그래· 내가 좀 갈까 하는데 주소 좀 알려줘·”
[보내드릴게요· 그런데 나 바쁘니까 한 시간 뒤에 오세요·]
“알았어·”
잠시 후 문자로 주소가 도착했고 그는 그걸 수행기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로 가는데 도착해서 바로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 근처에 요기할 만한 곳 있는지도 알아봐·”
“알겠습니다·”
민구상 대표는 주먹으로 자신의 다리를 툭툭 때렸다·
왜 화옥신녀를 찾을 생각을 못했을까?
대선 경선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그런 용한 점쟁이를 찾지 않았다는 게 이제 와 크게 후회되는 그였다·
*
임복희는 전화를 끊고 황급히 거울을 보며 화장을 가다듬었다·
간암에 걸렸다고 바로 손님이 끊길 리 없다·
그녀 정도로 유명한 점쟁이는 몇몇 유명인이 발길을 끊었다고 금방 생계에 곤란을 겪을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명우도사를 찾아가 애원한 건 그녀가 바라보는 목표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번에 수억 수십억을 벌지 않으면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고 통장에 몇 천만 원이 들어있는 걸 보면서 이것밖에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러니 하루에 몇 백을 벌 수 있음에도 더 벌지 못해 안달하는 그녀였기에 방금 민구상 대표의 전화는 그녀를 구원해주는 신의 목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오늘 신령님이 피곤하시다고 하니까 손님 받지 마·”
“그럼 전부 돌려보낼까요?”
“그래· 하루에 다 몰지 말고 골고루 분배시켜놓고·”
그렇게 제자에게 말한 그녀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그녀가 돈을 밝힌다 한들 신과의 소통에는 정갈한 마음이 필요했고 이번 손님은 특히 중요한 사람이니 잡념이 끼어들어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제자의 목소리가 들린 이후 후덕한 인상의 민구상 대표가 들어왔다·
“인상 좀 펴·”
대뜸 들어오자 마자 한 소리를 들은 민 대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상황에 얼굴이 좋으면 그게 미친놈이거나 부처 아니야?”
“얼굴이 운을 불러오는 거야· 거지도 죽상으로 다니면 밥도 못 얻어먹어·”
“웃으면서 동냥하기에는 내가 너무 가진 게 많아· 지켜야 할 게 많다고·”
“이번에 왜 졌는지 알아?”
민구상 대표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왜 졌는데?”
“그렇게 뒷짐만 지고 서 있어서 그래·”
“그 이유라고?”
임복희는 눈을 감고 중얼중얼 입을 놀리다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부채로 탁자를 내려치며 호통을 질렀다·
“이런 멍청한 놈! 전장의 장수가 발에 진흙 묻히기를 두려워 하면서 무슨 전투를 해!”
놀랍게도 그녀에게서 나온다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늙수그레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소름이 끼칠 만했다·
“···”
민 대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신령님의 호통에 자신이 너무 몸을 사리면서 이번 경선을 치렀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오성그룹이 자신을 도와주는 상황에 너무 의지했던 것도 변명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적어도 이런 중요한 싸움에서는 전면에 나서서 유권자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인식시켜야 했지만 뒤에서 천보윤 의원을 향한 흑색선전을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지지율이 오르기만을 바랐었다·
그게 잘못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던 임복희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령님이 너무 분하시대· 너무 안타까우시대· 왜 그렇게 배짱이 없냐고·”
“그럼 난 이제 어찌 해야 하나?”
“기운이 안 맞아·”
“무슨 기운?”
“집에 사위나 며느리를 들일 때는 항상 신중해야 하는 거야· 잘못 들이면 집이 패가망신하는 거야·”
민구상 대표는 퍼뜩 누군가를 떠올렸다·
“도수연?”
“내보내· 당신이랑 궁합이 안 맞아· ”
민구상 대표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궁합이 안 좋다고?”
“그래· 내가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니까· 그 여시를 왜 받아?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가 당신 잡아먹으려고 들어왔는데 자기 잡아먹으려는지도 모르고 집에 들인 꼴이라고·”
“이런···”
“내보내· 내보내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
민구상 대표는 입술을 깨물었다·
*
자유행복당 당대표 사무실·
“천보윤 의원 왔습니다·”
“응 그래· 들어오라고 해·”
비서관의 말에 민구상 대표가 상념을 끝내고 상석에 앉았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천보윤 의원이 들어와 공손하게 허리를 반쯤 숙였다·
“대표님·”
“왔나? 앉아·”
“네·”
천보윤 의원이 자리에 앉자 눈을 꿈뻑이며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축하하네·”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데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으이··· 나도 속물인가 보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해해주면 고맙고· 그래서 말인데 내 하나만 물어봄세·”
“네·”
“도수연이를 어디까지 쓰려고 그러나?”
천보윤 의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어디까지 쓰려고 하냐니요? 버려야 할 패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통평당 얼굴마담이었던 도수연이를 계속 끌고 가려고? 언제 내부 총질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할 셈이야?”
“그녀는 지금 완전히 우리 쪽으로 전향했습니다· 오히려 보듬어주고 전장에 선봉으로 내세워야 할 자원입니다·”
“물러· 무른 생각이야·”
“네?”
“잘 써먹었으면 칼같이 버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이제 곧 대선인데 대선에서 말 한번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 이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 이거 순진한 거야? 어리석은 거야? 그 나이 먹고 그렇게 순수하면 어리석은 거나 마찬가지야· 도수연이 배신 안 한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그럼 배신할 거라고 장담할 근거라도 있습니까?”
“그야 모르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나? 만약 이번 대선에서 자네와 우리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다시 야당으로 돌아가면? 야당이 대선판을 먹고 도수연이 금의환향하는 광경이 안 그려지나? 그게 안 그려지면서 대통령은 어찌 하려고 그래?”
천보윤은 답답함에 민 대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양반이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는 건지 대선 경선에 져서 훼방을 놓기 위해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거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수연은 결코 자신을 배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를 민 대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같은 당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한 진영에 몸담고 있을 뿐 서로 바라보는 곳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거 참··· 말 안 듣네· 그러다 나중에 후회할 수 있어·”
“일단 도수연 의원을 만나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든 뭘 하든 알아서 정리하게· 그렇지 않으면 당 대표로서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위험요소를 잘라낼 수밖에 없네·”
천보윤 의원은 뭐라 항변하려다가 참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난 오로지 당을 생각하고 승리만을 생각하네· 자네도 그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이 굳은 얼굴로 사무실을 나가자 민구상 대표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 나왔다·
“씨발놈이··· 어디서 말대답 따박따박 하고 있어? 건방진 새끼···”
그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도수연이를 지금 쳐내지 않으면 앞으로 더 주목받게 될 것이고 결국 다음 대선 역시 자신이 대선후보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다음 대선마저 놓치게 되면 이제 정계를 은퇴해야만 하는 나이였기에 지금 그의 마음은 초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우연(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