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와 쥐(3) >
늦은 저녁 강남의 유명 갈비집·
땅값 비싼 강남에 위치해 있음에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그곳에 일단의 인물이 모여 있었다·
갈비로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나자 오성전자 글로벌사업지원팀 최일곤 사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거 참 대선 앞두고 눈앞이 오락가락합니다· 그쵸?”
최일곤 사장의 능청스러운 말에 다들 어색한 웃음만 짓는다·
그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들 강만성 사장이 갑자기 OTT사업 진출하겠다고 하니까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반대할 명분도 없고 반대할 이유도 없고··· 강대성 실장을 그쪽으로 보내기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알고 있기는 했지·”
오성상사 윤지호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일곤 사장보다 두 해 먼저 입사했던 그는 회장의 신뢰를 듬뿍 받았던 그룹의 중추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룹 회장이 쓰러져 병원에서 생사의 사투를 벌인지 벌써 10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제는 언제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자연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라고 할까?
알게 모르게 필사적인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지금 모인 사람들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강대성 사장이 부회장님의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전략실장직을 고수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사장님은 어떻게 되리라고 보십니까?”
윤지호 사장이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한모금 마시곤 말했다·
“예전에 강만성 사장이랑 골프를 친 적이 있었어· 알지? 오산에 2공장 완공하고 나서 다 같이 광주에 내려갔었잖아·”
“알죠· 기억합니다·”
“그때 거기 광주공항 옆 가까운 골프장에서 강 사장이랑 처음 골프를 쳤었는데 말이야· 골프를 치기 전부터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는 거야· 왜 그런고 하니 오인주 프로라고 아주 미인인 프로 골퍼가 있는데···”
“저도 압니다·”
쭉쭉 뻗은 몸매와 시원한 이목구비 때문에 상당한 팬들을 이끌고 있는 그녀였다·
아마 실력이 외모의 반만큼만 되었어도 훨씬 팬이 많아졌을 거라는 건 골프를 좀 치는 사람들 중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렇지? 흐흐··· 미인이지· 그때 마침 오인주 프로랑 클럽에서 마주쳐서 같이 치게 됐단 말이야· 3번 홀이었던가? 4번 홀이었던가? 자신만만하게 때렸는데 그게 OB(Out of Bound:경계선 바깥으로 나감)가 됐어· 허풍을 그렇게 떨어놓고 민망하게 됐는데 골프 치다보면 그런 경우야 흔
하게 있는 일 아니야? 그래서 적당히 위신 세워주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강 사장이 갑자기 가만히 있던 캐디의 뺨을 후려치는 거야·”
“예? 왜요?”
“난 못 봤는데 자기를 보고 비웃었다네? 나나 오 프로나 다들 당황해서 일단 말렸지· 당연히 캐디는 웃은 적 없다고 했고··· 그때 강 사장이 자기가 실수했다면서 사과하고 나중에 위로금도 줘서 잘 마무리한 줄 알았어·”
“마무리하지 않았으면요?”
“놀란 오 프로를 달래고 게임을 끝낸 다음에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씩씩거리면서 나타나더라고·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캐디가 전치 6주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구만·”
“허··· 그런···”
“이거 아는 사람 몇 없어· 오 프로도 그냥 거기서 끝난 줄 알고 있을걸? 나랑 그룹 비서진들 몇몇만 아는 거지·”
“···”
“그때 말이야· 그때··· 씩씩거리면서 나타나 날 보며 씨익 웃는데 강 사장의 그 눈빛이 난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그런 적이 있었군요·”
“아마 나보다 강대성 실장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저렇게 나왔다? 어쩌면 우리는 강대성 실장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강만성 사장은 당장 강 실장을 그룹에서 쫓아내려고 달려들 게 불 보듯 뻔한데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나왔다면 뭔가 방책을 세워뒀겠지·”
그렇게 말한 그가 눈을 위로 치켜 뜨더니 슬쩍 웃는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야 그렇다치고 자네는? 강재식 부회장이 자네를 강 실장 옆에 붙여줬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붙여줬다기보단 그저 실수하지 않게 도와주는 정도입니다·”
“빼지 말고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불렀는데?”
최일곤 사장은 호기심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사장단을 스윽 둘러보았다·
자못 긴장했는지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강대성 실장을 처음 본 건 강 실장이 중학교 때인가? 그때지만 머리에 깊게 인상이 남았던 건 입사 때였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강만성 사장은 처음 입사할때도 사실상 임원 급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그랬었지·”
“그렇다고 귀족 특유의 특권의식이나 사람을 깔아보는 투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뭐라고 할까··· 상대방의 경험과 노력을 인정해준다고 할까요?”
“요약하자면 사람 취급을 해준다는 건가?”
“하하 그렇네요· 그 말이 정답입니다·”
“사람 취급은 해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지만 전 그렇게 봅니다· 강재식 부회장님 역시 둘째였고 두 형제 중에 권력다툼이 일어나면 마지막에 살아남는 놈을 후계자로 둘 거라구요·”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자네 괜찮겠어? 이제 본격적으로 가지를 쳐내려고 할 텐데?”
강만성 사장이 이를 악물었으니 이제 강대성 실장의 사람들부터 정리를 시작할거라는 말이었다·
“어차피 오래 가봐야 내년이었습니다· 조금 일찍 정리된다고 해서 제 인생 무너지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역베팅을 노려본다? 괜찮네 괜찮아·”
“흐흐··· 한잔 받으시죠· 다들 한잔 하자고·”
최일곤 사장은 그렇게 술을 돌리며 분위기를 돋구었다·
*
천보윤 의원 사무실·
김우섭 보좌관이 어두운 얼굴로 보고했다·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민구상 대표가 소속된 오성회를 중심으로 도수연 의원 무용론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치겠네··· 대표가 분란을 조장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일이 커져서 언론에서 물기 전에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정리를 하긴 해야겠는데···”
천보윤이 결심한 눈빛을 보이자 김우섭 보좌관이 다급히 말했다·
“혹시 민구상 대표와 결판을 내려고 하시는 거면 생각을 달리 하셔야 합니다·”
“응? 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거야·”
“압니다· 그런데 그냥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뭐가?”
“어쩌면 일부러 의원님을 도발하고 있을 수도 있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 의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제 생각보다 말이 가볍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굳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가까이 있다보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천 의원이 무릎을 쳤다·
“나와 이 문제로 다툼이 생긴 걸 언론에 흘려 도수연을 흔들 작정이구나!”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이 문제가 언론에 흘러가면 도수연 의원이 가만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 도수연 입장에서는 내가 민 대표와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는 게 연기일 수 있고 내가 써먹을 만큼 써먹고 버린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
김우섭 보좌관은 의혹어린 눈빛이 되었다·
“의원님은 도수연 의원이 오해하지 않을 거라고 보십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민구상 대표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대선을 앞두고 내분을 일으킨다는 발상을 할 줄이야··· 그 정도로 도수연을 내보내야 할 이유가 있나?”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다음 대선만큼은 꼭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여길 테니까요·”
“흐음··· 그럼 일을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할까요?”
이런 상황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최영훈 상무에게 전화 넣어· 만나자고 해·”
“알겠습니다·”
김우섭 보좌관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문제 해결을 다른 사람에게 미뤄도 되니 말이다·
*
김우섭 보좌관이 HS물산 기획조정실에 전화를 걸었을 때 영훈은 외국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온 우따마 전 장관이었다·
“한국에 온 느낌이 어떻습니까?”
“전에도 몇 번 왔었습니다· 여전히 활기차고 여전히 바쁘군요· 어떨 때는 조금 정신없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통역은 연희가 옆에서 도와주었다·
“우리 HS그룹이 가스전 사업에 진출하는데 있어 우따마 장관님의 도움이 무척 컸습니다·”
“이제는 장관이라고 하지 말아요· 그 직함에 걸린 무게는 털어버렸으니까·”
“알겠습니다· 우따마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미스터 우따마라는 어감이 괜찮은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우리 가족에게 베푼 혜택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그대의 배려에 나의 가족들도 감동 받았어요· 특히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써준 점은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긴요· 한국이 또 하나의 가스전 사업에 진출하는데 있어 그대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맞아요· 내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사업인데··· 내 도움을 받았던 다른 회사들은 왜 그걸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을까요· 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나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우따마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광경을 슬쩍 바라보다가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당신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을 불러 일을 맡기는 것·”
“다른 방법은요?”
“우리의 직원이 되는 겁니다·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하나의 프로젝트를 해결할 때마다 보너스를 받는 거죠· 둘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지만 회사와 회사로 상대하는 것이기에 모든 법적 책임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비용 그리고 실패했을 때의 손
실은 우따마 씨가 부담해야 하겠죠·”
“당신네 회사의 직원이 되면 훨씬 안정적이라는 거겠군요?”
“맞습니다· 모든 책임은 회사가 질 테고 각종 복지혜택을 누리게 되는 대신 돈은 적게 벌게 될 겁니다·”
우따마는 의외로 크게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당신네 회사가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그 복지혜택이라는 것도 무척 궁금하군요·”
“좋습니다· 하루 더 머무시고 내일 오전에 오시면 인사팀에서 영문으로 된 고용계약서를 제시할 겁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결정을 내리면 그 고용계약서에 싸인하시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다음 프로젝트는 뭡니까?”
“벌써부터 일하고 싶으십니까?”
“평생 한 곳에서 발전도 없고 미래도 없는 일에 매달려 왔어요· 이제 내가 주도적으로 원해서 하는 일을 하고 싶군요·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저도 기대되는군요· 다음 프로젝트는 당신도 익숙한 곳입니다·”
“태국?”
“네· 태양광 사업 프로젝트에 진출할까 합니다·”
우따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 입을 열려다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쉬운 일이었다면 당신들이 날 찾지 않았겠죠· 어려운 일을 해결해달라고 날 찾은 거 아닙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본래 역마살을 타고 난 사람이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그 시기가 언제가 되었든 그 사주가 말을 할 때가 오는 법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 타고난 팔자를 따라가는 것이니 꼭꼭 감춰두었던 그의 능력이 더욱 크게 펼쳐질 것이다·
“그럼 내일 다시 방문하도록 하지요·”
“호텔은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좋더군요· 아 그리고 한국에 있을 곳을 알아봐야 할 것인데···”
“우따마 씨가 이곳에 있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오피스텔을 하나 잡아드리겠습니다· 만족하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그가 나가자 연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태양광? 우명솔라 말하는 거야?”
“어· 언제고 김창훈 상무한테 하나 넘겨줘야 할 거였으니까·”
“후··· 그래 엄마가 아직도 현진중공업에 미련 있을 때 우명이 인수해버리게 도와주는 게 맞겠다· 그런데 이거 넘겨주면 진짜 지지부진한 현진중공업 인수가 마무리되는 게 맞을까?”
“잘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이때 민희가 내려와 말했다·
“상무님 천보윤 의원이 뵙고 싶어합니다·”
“언제요?”
“최대한 빨리요·”
“오늘 저녁에 호텔로 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이형준 대표랑은 어때요?”
민희가 살짝 주저하다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결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먼저 올라가요· 우리는 천천히 올라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민희가 올라가자 연희가 말했다·
“이제 결혼하면 신영그룹 대표이사 사모가 되는 거잖아·”
“그렇지· 결혼하면 그만 두게 해야지·”
“아쉽지 않아? 오빠가 거의 키운거나 마찬가진데?”
영훈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 있는 거야· 민희 씨는 고난을 잘 이겨냈고 한 회사의 비서로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니 이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보내줘야지·”
“그래도 아쉽다·”
“난 안 아쉬운데? 당신이 옆에 있잖아·”
영훈은 미소 짓는 연희를 꼬옥 끌어안았다·
< 고양이와 쥐(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