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와 쥐(4) >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출근한 최일곤 사장이 부하직원들과 회의를 시작하려 할 때 일단의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뭐야?”
“죄송합니다· 감사실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일곤 사장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다·
오성에서만 근무한 햇수가 20년을 넘어가는데 그동안 실수했던 걸 트집 잡고자 하면 안 걸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트집 잡아야 할 게 아니었기에 넘어갔던 것이지 대놓고 규정을 들먹이고 파고 들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하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대성 실장이 부회장님에게 존재감을 보여준 이후 문제가 될 만한 게 있는지 미리 주변 정리부터 했던 그였다·
적당히 처리할 수 있는 건 처리했고 입막음을 할 수 있는 건 했다·
그럼에도 손이 닿지 않았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
이제 강대성 실장이 해결해줘야 한다·
자신의 사람을 지킬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줘야 그에게 사람들이 따를 터·
이건 강대성 실장의 첫 시험대임이 분명했다·
“핸드폰 주십시오·”
최일곤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줘도 감사실장에게 직접 주겠어· 그러니 감사실로 먼저 가지·”
직원은 뭐라 하려다 그만 두었다·
아무리 심각하고 결정적인 제보가 있었다고 한들 상대방은 평소 일개 직원이 말도 붙이기 힘들었던 사람이니까·
그가 가진 권력은 퇴직하기 전까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최일곤 사장은 감사실 직원을 따라가며 글로벌사업지원팀 직원에게 급히 눈짓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직원은 감사실 직원들을 피해 전략실로 뛰어 올라갔다·
한창 회의중인 게 분명함에도 그 직원은 사태가 다급해 일단 문부터 열어 젖혔다·
“죄송합니다·”
“응? 뭐예요?”
“글로벌사업지원팀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사장님이 방금 감사실로 불려가셨습니다·”
강대성 실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알겠어요· 가 봐요·”
회의실 문이 닫히자 그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가지고 있는 핸드폰에 문제가 될 만한 게 있으면 전부 지우고 하드 정리해· 그리고 감사실에서 무슨 이유로 최 사장님 데리고 간 건지 알아보고 감사실에서 전략실까지 노리고 있는지도 확인해봐·”
“설마 전략실까지 노릴까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직원의 물음에 박치웅 과장이 대신 대답했다·
“탈탈 털릴 수 있어· 어쩌면 너도 감사실에 불려갈 수 있으니까 가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미리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하고 있어라·”
그렇게 겁을 준 그가 강 실장에게 물었다·
“어떤 혐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일곤 사장님은 그룹의 핵심 임원입니다· 어지간한 일은 적당히 넘어갈 텐데 그걸 알면서도 감사실에서 움직였으면 쉽게 풀기는 어렵습니다· 적당히 무마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겠지?”
“이건 풀려면 위에서 끊어줘야 합니다·”
적어도 강재식 부회장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오케이 일단 박 과장 빼고 다 나가봐·”
직원들이 나가자 대성이 물었다·
“박 과장은 뭐 걸릴 만한 거 있어?”
“그게···”
“뭔데?”
“실은 5년 전에 오성섬유쪽에서 러시아로 재고 처리하고 받은 자금을 비자금 통장으로 만들면서 그중 10%를 제가 챙겼습니다· 물론 부회장님도 아시는 건입니다·”
“흔적 남았어?”
“장부상 기록은 없지만 당시 이월 재고 처리된 점퍼 상당수를 제가 가지고 갔다는 걸 아는 직원이 있습니다·”
“오성섬유 임재훈 사장이 형 라인인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아··· 일단 알겠어·”
“방법 있으십니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일단 오성섬유 임재훈 사장 뒤 파보고 우리도 반격 준비하자고· 서둘러·”
“알겠습니다·”
대성은 생각보다 빠른 공격에 입술을 깨물었다·
*
강대성 전략실장이 부회장실에서 폭탄을 터뜨린 이후 회사 내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오성전자 글로벌사업지원팀 최일곤 사장이 감사실로 불려간 이유가 강만성 사장의 노림수일 수 있다는 말은 임원 뿐만이 아니라 일개 대리까지 알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은의 귀에도 들어갔다·
사실상 작은 오빠와 공동운명체나 다름없는 그녀였기에 작은 오빠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대통령의 며느리가 된다고 해도 내부에서 자신을 도와줘야 할 작은 오빠가 그룹에서 쫓겨나게 되면 결국 얼굴만 팔리고 실속은 못 챙기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바로 외출을 준비했다·
혼자 고민해봤자 답도 안 나올 것이고 이럴 때를 대비해 조언자를 포섭해 놓았으니까·
하지만 조언자를 만나는 과정은 신중해야 했다·
언제 어느 때고 자신을 따라붙을 기자들과 큰 오빠 눈을 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콜택시를 불러 타고 가다 마치 비밀요원처럼 중간에 다른 택시로 갈아타고 HS물산이 소유한 을지로의 호텔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업무중이라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민희의 말에 결국 호텔에서 몇 시간을 보낸 그녀는 저녁 6시 반이 되어서야 민희를 만날 수 있었다·
“전에 조언 고마웠어요·”
“내 말 맞지?”
“그러게요· 설마 손 잡는다고 넘어올 줄은 몰랐는데 그 전까지는 날 독이 든 사과를 가진 마녀라도 되는 것처럼 경계하더니 손을 딱 잡으니까 동공이 확 풀어지던데요? 내가 다 당황스러웠다니까요·”
“그래도 그 친구가 그렇게 독한 남자는 아니었나보네·”
“언니는 연애를 많이 해봤나 봐요? 어쩜 그렇게 잘 알아요?”
“모쏠하고 사귀어 본 적이 있었을 뿐이야· 그리고 너와는 다르게 사람을 잘 파악하는 거지·”
“그럼 주변에 연애 코치도 많이 해줬겠네요?”
“아니 그때는 나 살기 바빠서··· 내 판단에 확신도 없었고· 뭐 설마 감사 표하려고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또 무슨 부탁할 일이 있니?”
다은이는 조금 당황하다가 대답했다·
“못 속이겠다· 그런데 고맙다고 언제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요· 나 그렇게 재수없는 애 아니에요·”
“재수없을 거라는 건 아니야· 다만 그런 쪽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
“하아··· 언니 무섭다· 왠지 형준 오빠가 언니랑 결혼한 이후의 삶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좀 잡혀 살아도 돼· 지금까지 많이 놀아봤을 테니까·”
“하긴···”
“그럼 이제 본론을 꺼내 봐·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기다린 거야?”
다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작은 오빠가 지금 곤란하게 됐어요· 작은 오빠의 행동이 눈에 거슬린 큰 오빠가 작은 오빠 사람들을 잘라내려고 하고 있거든요· 벌써 작은 오빠 사람인 최일곤 사장이 감사실로 불려갔다고 해요·”
“으음···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요· 작은 오빠 나름대로 뭘 하려고 하기는 하겠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회사생활은 큰 오빠가 훨씬 오래 했고 그만큼 그룹 핵심 임원진의 마음도 큰 오빠가 쥐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빠가 큰 오빠를 그룹 후계자처럼 대해 왔으니 권력싸움이 벌어지면 일단 큰 오빠 편을
들 수밖에 없어요· 아빠의 의중이 큰 오빠를 향해 있다고 믿을 테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면 될지 물어보려고 온 거야?”
“네·”
민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 보스가 일할 때 보면 참 특이한 점이 있어·”
“네?”
갑자기 딴 소리를 하니 다은이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일을 진행할 때 보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보면 무릎을 치게 돼· ‘아 이런 뜻이었구나’하고 말이야·”
“그런데요?”
“신기한 게 말이야· 우리 보스는 일을 잘 모르거든·”
“일을 모르신다구요?”
“응· 배 한 척을 만드는데 어떤 노력이 들어가는지 회사를 인수하는데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호텔을 운영하는데 어느 정도의 유지비용이 들어가는지 직원들의 의사결정과정이 어떤 식인지 잘 모르셨어·”
“그런데 어떻게 일하셨어요?”
“그 모든 일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계셨거든· 보스는 디테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보다 모든 일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일을 진행할 때는 일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셨던 거야·”
“조금··· 어렵네요·”
민희는 당황스러워하는 다은을 보며 피식 미소지었다·
“그렇지? 나도 최근에야 그걸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난 어떤 문제로 최일곤 사장이라는 분이 감사실로 불려 갔는지 몰라· 설사 안다고 해도 내가 아는 지식과 인맥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거야· 다만 한 가지는 알지· 결국 이 문제는 강재식 부회장님이나 너의 큰 오빠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것·”
“그렇죠·”
“난 너의 아버지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은 모르겠어 내 보스라면 또 모르지만· 그런데 네 큰 오빠는 알 것 같아·”
드디어 다은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떻게요?”
“네 큰 오빠가 저러는 게 네 아빠에게 후계자는 강만성 하나라고 확신을 심어주기 위함 아니겠어?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지· 자꾸 그렇게 하다가는 아빠의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멈출걸?”
“말은 쉬운데 그걸 어떻게 해요?”
“왜 어렵게 생각해? 진짜 아빠의 마음을 돌리라는 게 아니라 네 큰 오빠가 그런 경각심만 가지게 되면 끝인 일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바로 하나 떠오르는데?”
“어떤 거요?”
민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툭 내뱉었다·
“당장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서 오성테크놀로지 분식 회계를 검찰에서 조사하고 있잖니· 넌 대통령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고· 설마 이 카드를 쥐고서도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다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작은 오빠가 문제를 제기할 수 없을 거다·
오성전자 직원이고 이 문제에 전략실이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됐네· 근데 나 같으면 아마 그렇게 무거운 일 말고 사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질 것 같은데 여자라던가··· 너희 큰 오빠 마약 같은 거 하니?”
“아니요···”
“아쉽네· 그런 거라도 하면 일이 쉬울 텐데· 회사 일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치는데 그동안 20년 넘게 큰 오빠랑 살면서 그 정도 약점 하나 못 잡고 뭐했니?”
다은은 억울했다·
“큰 오빠 약점을 잡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쯧쯧··· 어쨌든 난 알려줬다·”
다은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지금껏 재벌이 아닌 사람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한 건 그녀가 생각해도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옛말에 감사는 돈으로 하라고 했는데 말이야·”
“네?”
민희는 스윽 앞으로 다가오며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거든·”
“축하드려요·”
다은은 기분이 묘했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자기와 결혼 이야기가 오갔던 상대와 결혼하려는 여자를 축하해줘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고 그 정도로 속이 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휴 재벌이랑 결혼하려니까 여러모로 힘드네· 어찌나 따지는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은지···”
다은은 그제야 민희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씨익 웃더니 손뼉을 치며 상체를 기울였다·
“잘됐네요· 돈 많은 사모님들 취향 어렵죠? 생각보다 비싼 브랜드에다 어떤 건 들어본 적도 없는 브랜드고···”
“내 말이···”
“이게 대중들이 쓰는 브랜드는 어딜 가나 쉽게 살 수 있는데 재벌들이 선호하는 하이퍼 럭셔리 브랜드는 돈 있다고 쉽게 구할 수도 없는 것들이 많아요· 특히 신영그룹 사모님이면 엄청 깐깐할 건데?”
“정말?”
“그분이 또 우리 엄마랑 친하거든요· 내가 선 자리 나간 것도 다 언니 시어머니 될 사람이 그렇게 만든 거였어요·”
“어머··· 그랬구나···”
좋은 걸 알았다는 민희의 표정에 다은이 손을 휘저었다·
“잊어버려요· 나도 잊었는데요 뭘··· 어쨌든 요구하는 주방 가전 브랜드에 쥬얼리까지 맞추려면 가격도 가격인데 구하기도 쉽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시누이들에 친척들까지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누이까지만···”
“아··· 거기 사정이 좀 그렇죠?”
“응 제사는 안 지내도 될 것 같아서 그건 좋아 보이긴 해·”
“호호호! 언니 웃긴다· 어쨌든 걱정마세요· 주소랑 평수만 알려주면 내가 책임질게요· 시누이 나이도요·”
다은의 눈웃음을 보며 민희는 말 한마디에 천금의 값어치가 있을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 고양이와 쥐(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