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와 쥐(5) >
다은은 자기사 한턱 쏘겠다며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고 9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난 그녀는 마치 선이라도 보는 것처럼 빡세게 꾸미고 난 뒤 강만성이 근무하는 오성디지털로 향했다·
열심히 꾸민 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오성디지털 사옥 앞에 도착한 그녀는 보무도 당당하게 1층 로비로 걸어갔다·
“어디서···?”
방문 목적을 물어보려던 직원은 그녀의 얼굴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어 멈칫했다·
“오빠 만나러 왔어요·”
“오빠분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기 사장이요·”
그제야 로비의 직원은 화들짝 놀랐다·
로얄패밀리의 얼굴을 미리 익혀놓는 거야 직원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건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못한 막내딸의 얼굴까지 포함하는 건 아니었던 거다·
게다가 뉴스로 그녀의 얼굴이 자주 나오긴 했어도 멀리서 기자들이 포착한 사진이 주였지 대놓고 기자와 1:1 인터뷰를 하는 식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을 한번에 알아채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직원은 황급히 비서실에 이 사실을 통보했고 비서실은 어떤 용건인지 물어보지 않고 바로 그녀를 통과시켰다·
다은은 주변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걸 무시하고 사장실이 있는 꼭대기까지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왜 왔어?”
다은이 사장실로 들어가자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만성은 귀찮다는 듯 앉으라는 말도 없이 물었다·
그녀는 일단 응접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그냥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뭔데?”
“작은오빠랑 나랑 예전에 하나 약속한 게 있어· 내가 천보윤 의원 며느리로 들어가면 오성유통을 넘겨주기로·”
다은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큰오빠가 이미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다·
“미친 새끼··· 뭐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만· 그래서?”
“큰오빠가 작은오빠 대신 그거 나 줄래?”
대성이 들으면 기함하겠지만 다은의 입장에서는 누가 주든 오성유통을 받기만 하면 만족이었다·
작은오빠를 도와주려는 것도 결국 오성유통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일 뿐 큰오빠가 주기만 한다면 굳이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
큰오빠와 가끼운 사이가 아니라고 작은오빠와 가깝지도 않은 그녀인데 굳이 작은오빠가 잘 되기를 바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남매 사이가 그리 좋았다고 모르는 곳에서 챙겨줄까·
“너 미쳤냐? 제정신 아니지?”
“믿기 힘들겠지만 나 제정신 맞아·”
“흥! 미친년··· 네가 뭘 했다고 오성유통을 받아? 대가리에 뭐 든 게 있다고·”
만성이 자기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린다·
원래 저런 사람인 줄 알고 있기에 다은은 크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생각이 굳어졌을 뿐·
“그래? 알겠어· 지금 검찰에 오성테크놀로지 분식회계 관련해서 조사하고 있다며?”
순간 만성의 얼굴이 싹 굳어버렸다·
“뭐?”
“명심해· 나 천보윤 의원 며느리 될 사람이야· 게다가 영부인도 없어· 청와대 행사라든지 각종 영부인이 참석해야 할 자리에 내가 갈 수도 있는데 그럼 제법 인맥도 생기지 않을까?”
“···”
만성은 대답하지 못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 민정수석이 검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민정수석이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랑 꽤 친해질 것 같은데 만약 민정수석이 오성그룹 불법 상속 조사에 대해 물으면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야? 무조건 아니라고 오빠 편 들어줘야 하는 거야?”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오성유통·”
“미친년···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지분 관계가 복잡해서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럴 줄 알았어· 복잡하겠지· 그럼 최일곤 사장 엮은 거나 그만 풀어줘·”
“너 그 이야기 하려고 찾아온 거냐?”
“아니 말했잖아 오성유통 달라고· 근데 못 준다며?”
성질 급한 만성이 버럭 소리질렀다·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힘들다니까!”
“소리지르지 마· 알아들었으니까·”
아무리 요새 마음가짐을 바꿔 먹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그녀는 큰오빠가 무서웠다·
떨리는 가슴으로 벌떡 일어선 그녀는 아직도 얼굴이 벌게진 큰오빠와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말한 거 해줄거라고 믿어· 그렇지 않으면 방금 내가 말한 거 아빠도 똑같이 듣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아빠가 그때도 큰오빠를 계속 후계자로 밀어줄까? 잘 생각하기를 바래·”
그렇게 다은이 후다닥 문을 닫고 나가자 만성이 옆에 놓였던 유리잔을 잡고 던져버렸다·
“씨발!”
유리컵이 박살나는 소리에 비서진들이 화들짝 놀라서 들어왔지만 만성의 살벌한 눈빛에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치울··· 까요?”
“나가·”
“네·”
비서진들이 나가자 한참을 씩씩거리며 화를 삮힌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난데 최일곤이 내보내·”
만성은 일단 저 미친년이 입을 놀리기 전에 사태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급한 불부터 끄고 난 다음에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기로 말이다·
*
을지로 리츠 칼튼 호텔의 프레지던트 스위트 룸·
넓고 화려한 곳에 자유행복당 민구상 당 대표와 마주앉은 영훈은 그제 천보윤 의원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도수연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영훈은 천 의원의 입에서 도수연의 이름이 나온 이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 끝난 이야기였고 앞으로 도수연 문제가 나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계속 임복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신 겁니까?”
천보윤 의원은 순간 당황했다·
“그건 아니야·”
“민구상 대표랑 싸우고 싶으신 게 아니죠?”
“솔직히 그렇네· 당 대표와 싸워서 어떻게 대선을 준비하겠어?”
“만약 제 의견이 다르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래야겠지· 품에 날아온 새를 쫓아내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누가 내 곁에 오려고 하겠나?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네·”
“저러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걸 몰라서 내 속이 답답해 터져버릴 것 같아· 왜 저렇게 도수연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그럼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자네가?”
“네· 민 대표를 만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고맙지· 잘 좀 부탁하네·”
영훈의 상념이 불쾌했던지 민 대표가 인상을 찡그리며 툭 내뱉었다·
“사람 불러놓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아 죄송합니다· 알아보니 사모님과의 결혼 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으셨더군요?”
“그건 어찌 알았나?”
“사업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신경 안 쓰면 되겠습니까? 나랏일 하시느라 집에 신경쓰기 힘드셨을 테고 사모님께서도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크흠··· 정치인 아내들이야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원하시는 객실 말씀해주시면 그날 원하시는 모든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여당의 당대표급 정치인이라고 하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부를 원없이 누리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민구상 대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고맙기는 하네만 사업가의 선의를 무작정 받을 수 없는 게 정치인이라네·”
“믿으실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전 민구상 대표님께 원하는 게 없답니다·”
“응? 원하는 게 없다고? 그럼 나를 왜 보자고 했나? 천보윤 의원이 자네가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네· 전 대표님을 도와드리고 싶어서 뵙고자 했던 것이지 대표님께 도움을 받고자 만나자고 청한 건 아닙니다·”
민구상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보게 난 말장난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네·”
“전에 대표님과 만났을 때 대표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당시 민구상 대표가 각종 잡설을 털어놓으며 부탁했던 게 신하은 판사를 검찰 수사에 포함시켜 달라는 거였고 영훈은 거절했었다·
“각자의 입장이 있던 거였으니 이해하네·”
“그래도 당시 제가 부탁을 거절해서 많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그거야 뭐···”
“그래서 민 대표님을 도와드리고자 만난 겁니다·”
“그래 날 어떻게 도와주려고 하는가?”
턱을 치켜들며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자세다·
“일단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대표님은 이번 대선 경선에서 안타깝게 떨어지셨으니 이번 대선은 포기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지금 놀리나?”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어가자면 다음 대선을 노리실 수밖에 없는데 다음 대선에 관심이 있긴 하신 겁니까?”
그의 얼굴이 마치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방금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었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쭙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죠· 도수연 의원을 잡고 계시면 다음 대선이 보장되는데 어째서 도수연 의원을 내치려는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천보윤이가 그것 때문에 자네를 불렀구만! 도수연이가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감싸고 도는 거지?”
“별거 없습니다· 대통령을 만들어줄 인재거든요· 일종의 부적이라고 할까요?”
그는 코웃음을 쳤다·
“흥! 부적? 자넨 그딴 걸 지금 이유라고 드는 건가?”
“왜요? 부적이라는 단어가 걸리십니까?”
“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야· 자유행복당 당 대표· 그런 허무맹랑한 이유를 가지고 감히 날 설득하려고 하는가?”
“그런가요? 그럼 민 대표님은 화옥신녀에게 뭘 들었기에 도수연을 내치려고 하시는 겁니까?”
순간 화들짝 놀란 그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영훈을 귀신 보듯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임복희가 도수연 의원을 쳐내라고 했습니까?”
“···”
“그랬군요· 으음··· 그 여자 말 믿지 마세요·”
영훈은 그게 뭐 별거냐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응하자 민구상 대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의사로 치면 돌팔이나 다름없습니다· 사기꾼이에요·”
“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화옥신녀는 또 누구고?”
“저한테까지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화옥신녀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지금 전화해볼까요?”
영훈이 전화기를 들자 그가 급히 영훈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너무 놀랐는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까요· 제 앞에서 거짓말할 필요 없으시다니까··· 뭐 그럼 이유는 알았고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민구상 대표는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영훈에게서 풍기는 이상한 기세는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 그러게·”
“대표님은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원하는 거라니?”
“대통령을 원하시는 게 맞는 겁니까?”
“정치인 치고 대선을 노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오성그룹과 가까운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대통령이 되기 위한 후원자?”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펄쩍 뛰었겠지만 방금 전의 약점을 잡힌 것도 있고 이상하게 영훈 앞에서는 숨쉬듯 자연스러웠던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크흠··· 그거야 뭐···”
“이렇게 해서는 의원님은 대통령 안 됩니다·”
“뭐라고?”
“오성그룹에서 의원님을 대통령 안 만들어준다구요·”
“그 그럼 자네는 만들어줄 수 있단 말인가?”
“저도 안 됩니다· 저라고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럼 무슨 근거로 오성이 안 된다는 건가?”
“이제 오성은 틀렸거든요· 힘이 분산될 겁니다· 예전의 오성이 아니게 될 거예요·”
“형제 간의 내분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그럼 난 어찌 하라는 말인가?”
“계속 대통령을 꿈꾸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의원님의 꿈이자 모든 정치인들이 바라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 같으면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물러서서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보이겠죠· 오성의 내분이 보일 것이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보일 겁니다·”
민구상 대표는 그제야 영훈의 의도를 이해했다·
“자고로 싸움은 숫자가 기본이지·”
“그렇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이듯 이럴 때 움직여준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겁니다·”
“난 기억에만 오래 남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네·”
“그렇군요· 어디서 들었는데 강만성 사장은 기억력도 나쁘고 배포도 좁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둘째는 좋은 청년이라구요·”
“그렇군· 그런데 내가 자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영훈은 피식 웃었다·
“제가 아까 한 말을 잊어버리셨습니까? 전 대표님을 도와드리려고 온 겁니다· 도움을 거절한 사람에게 또다시 손을 내밀 정도로 전 아량이 넓은 사람은 아닙니다·”
괜히 한번 자존심을 부려봤던 민구상 대표는 서릿발 내리는 영훈의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자네 말을 기억해두지·”
< 고양이와 쥐(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