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평한 기회(1) >
글로벌사업지원팀 최일곤 사장은 감사실에서 아무 문제 없이 나온 직후 곧바로 전략실로 올라갔다·
강대성 실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문제를 처리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감사실에서 풀려났다는 안도감보다는 궁금증이 더 컸다·
그런데 막상 강대성 실장은 생각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진짜 해결했단 말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강 실장이 해결한 게 아니었어?”
“네· 제가 나서기도 전에 다은이가 절 찾아와서 자기가 해결할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다은이가?”
“저도 설마 했는데 뭐라고 했길래 형이 거기에 넘어갔는지····”
최일곤 사장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은이한테 오성유통을 주기로 했었지?”
“네·”
“줄 방법은 생각해 놨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나서 지분 정리를 할 때 오성유통을 분리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지분 일부를 다은이한테 넘기는 거로 진행하려고요·”
“진짜 넘길 생각이었다고?”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최 사장은 웃는 것도 인상을 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대답했다·
“너희 집 사람 중에서 가족 중 누구에게 회사를 주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제가 착하거나 신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다은이 시아버지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거짓말로 넘겨요?”
“막말로 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넘길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들면 되는 거니까·”
대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
“아니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저를 도와주기도 했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분리해서 넘겨 주고 싶어요·”
“좋아· 강만성 사장이 왜 날 풀어 줬는지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넌 일단 이번 대선을 준비하도록 해· 선거 캠프에서 알아서 준비한다고 하지만 유리할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게 선거거든· 혹시 야당에서 뭔가 터뜨리려고 준비할 수 있으니까 전략실 움직여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여당 선거 캠프 쪽에 알려야 해·”
“알겠어요·”
“다은이 결혼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어?”
“일단 분위기는 잡아 놔서 지금 당장 이야기를 꺼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기는 해요·”
이미 온 매스컴을 통해 다은과 승모의 사랑 이야기를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어 놓았다·
정치인과 재벌가의 만남으로 언론이 한순간만 돌아서면 온 국민이 욕을 해 댈 테지만 이렇듯 포장을 잘 해 놓으니 오히려 두 남녀의 사랑만 더 애틋하게 보일 뿐이었다·
둘의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드라마로 만들어도 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다은 같은 경우는 어지간한 여자 연예인들보다 더 관심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 마지못해 결혼 허락을 내린다면 오히려 축복해 주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 네가 주도해서 천보윤 의원 측에 연락해 날 잡자고·”
“아버지 허락이 있어야 하잖아요?”
“얘기하면서 부회장님께 말씀드리면 된다· 부회장님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아시니 오히려 네가 치고 나가는 걸 칭찬하실 거다·”
“알겠어요· 그럼 천 의원 쪽에 만나자고 하면서 아버지 찾아뵐게요·”
최일곤 사장은 일어나는 대성을 향해 경고했다·
“자신감 있게 일을 추진하는 건 좋지만 부회장님의 표정을 항상 잘 살펴야 한다· 한 가지 지시를 내려도 그 안에 몇 가지의 의도를 심어 두시는 분이 네 아버지야·”
“명심할게요·”
대성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벅차면서도 두려웠다·
어쩌면 형이 자신의 생각만큼 잘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박살 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던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살얼음판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
근래 들어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강재식 부회장은 건강 검진을 마치고 담당 주치의이자 오성병원장인 장명규 원장과 마주 앉았다·
“어때?”
“검사상으로는 이상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기름진 걸 줄이시고 매일 가벼운 운동을····”
장명규 병원장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강재식 부회장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였더라··· 우리 아버지가 사업 말고 갑자기 병원을 짓겠다고 하면서 자네 부친을 찾아갔던 일을 기억하나?”
“그럼요· 기억합니다·”
“그때 나와 자네가 동석했었지· 완고한 자네 부친께서는 대기업이 병원을 인수하면 서민들이 아닌 부자들만을 위한 병원이 될 거라고 반대했었네·”
“그러셨지요·”
“그런 부친을 닮았는지 자네는 어쩌면 부친보다 우리 아버지의 제안을 더욱 거부했었던 게 기억나· 우리 직원들을 보며 삿대질하던 모습이 어찌나 배짱 있게 보였는지····”
“하하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때 그대들 부자를 설득하는 데 무려 석 달이 걸렸었어· 우리가 그 옛날 배 한 척 수주한다고 선주에게 매달려서 계약을 받는 데 두 달이 걸렸던 걸 생각하면 자네 부친과 자네를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잘 알 거라 생각하네·”
“솔직히 당시에도 회장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멀쩡히 사업 잘 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병원을 인수해서 키워 보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저와 아버지의 신념에 위배되는 짓을 시킬까 봐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당시 전 회장님이 제 영혼을 사러 온 악마나 다름없다
고 생각했었습니다·”
“흐흐흐··· 그래 당시 자네 눈빛이 꼭 그랬지· 그런데 지나고 보니 많이 달라졌지?”
장명규 병원장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생각 밖이었습니다· 병원 일에 크게 개입하지도 않으셨고 이익이 크게 남지 않음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으니까요· 그 덕분에 우리 오성병원이 대한민국 최고 병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현재 암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오성병원을 자랑스러워하셨네·”
“그런데 회장님이 병원을 인수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으셨던 겁니까? 사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거든요·”
“모른다고? 훗 지금껏 그것도 짐작하지 못했나?”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대한민국 의료계를 한 손에 꽉 잡고 있으니 결국 대한민국 최고 권력가와 재력가가 전부 오성병원의 신세를 지게 될 테고 그게 인맥이고 힘이 될 거라는 것· 그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하던데 전····”
“자네는 다르다고 생각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돈을 지원하셨으니까요·”
강재식 부회장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남들은 권력이니 인맥이니 하는 이유로 병원을 운영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이유는 아니었네·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할머니가 되시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폐렴이었네· 당시에 가난했었던 아버지는 할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내신 게 가슴에 한으로
남으셨던 거야· 그래서 자신이 의학 지식은 없지만 가진 재산으로 좋은 병원을 만들고자 하셨던 거네·”
“그런 이유가 있으셨군요· 그런데 회장님도 저렇게 쓰러져 계시니····”
“안타깝지·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가끔 섬뜩하게 다가온다네·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으니 건강 한 가지는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장명규 병원장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웃는다·
“회장님은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기름진 식사를 줄이시고····”
“운동을 하라고?”
“네 맞습니다·”
그는 피식 비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말했다·
“아까 하던 말을 마저 이어 가자면 난 자네들 부자 더 정확하게는 자네를 참 좋게 봤어·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삿대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네· 그때 자네 모습은 ‘진짜 의원이란 저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네·”
“과찬이십니다·”
장명규 병원장이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강재식 부회장이 서릿발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나를 배신했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쩌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몰라·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네 건강 조심하라고· 그때는 그 말이 다른 의미인 줄 알았었네·”
“·······”
그는 강재식 부회장의 이야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그 말이 맞을 거야· 그가 뭘 알았겠어·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걸렸단 말이지· 요즘 들어 가슴이 답답한 것도 신경이 쓰였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다른 병원을 찾았네·”
“도대체 왜 그런····”
“난 가슴에 문제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정밀 검사를 진행하자고 하더군·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골육종이라는 거야· 허허··· 연골육종이었다니···· 허리야 항상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병에 걸려 있을 줄은 몰랐네· 그나마 초기라서 다행이라고 하더군·”
“·······”
“곧바로 자네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의 계좌를 뒤졌어· 그런데 돈이 안 나오는 거야· 부동산도 움직인 흔적이 없고··· 왜 날 배신했나? 내가 그게 궁금해서 잠이 안 오지 뭔가?”
부들부들 떨던 병원장은 벼락같이 자리에서 물러서서 세차게 무릎을 찧었다·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사과를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네· 이유를 듣고 싶은 게지·”
급기야 병원장은 눈물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만····”
강재식 부회장은 뒷골이 당기는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병원장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자 점차 울음이 잦아들었고 강재식 부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를 말해·”
장명규 병원장은 여기서 살아날 구멍은 오로지 모든 진실을 말하고 부회장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처음 부회장님의 영상을 확인하고 나서 저 역시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조직 검사를 진행하려고 첫째 도련님에게 말씀드렸는데 첫째 도련님이····”
“만성이가?”
“그게····”
“사람 애태우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 봐· 만성이가 뭐라고 했나?”
“오성병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거였구만· 하긴 수십 수백억 손에 쥐어 봐야 결국 월급쟁이 이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거였나? 아니지··· 그게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했었군· 애초부터 오성병원을 자기 거라고 생각했었던 거야· 그렇지?”
병원장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세우고 아들이 물려받았으니 이 병원이 자기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러다 만성이 놈이 내가 죽으면 오성병원을 준다고 하니까 결국 날 배신한 거구만· 그래 그 정도면 배신할 만하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 한번 머리를 바닥에 찧는 그를 보며 강재식 부회장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죽어·”
“부회장님····”
“죽어·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날 배신하려고 했나?”
“·······”
“죽게· 죽으면 내 자네 식솔들은 살길을 열어 주겠네·”
“크흑····”
그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꼴을 묵묵히 지켜보던 강재식 부회장이 말했다·
“한 가지 내 부탁을 들어주면 지금 병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봐주겠네·”
“네?”
“어떤가?”
삶과 죽음이 오가는 지금에 와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겠습니다· 어떤 부탁이신지···?”
“대성이한테 내 병에 대해 말을 흘리게·”
“예?”
“초기가 아니라 아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됐다고 흘리게·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말이야·”
“왜 그런 말을···?”
강재식 부회장의 눈빛에 광기가 이글거렸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진짜 내 새끼가 누구인지 이참에 그걸 알아볼 참이라네 흐흐흐····”
강재식 부회장의 광기 어린 웃음에 병원장은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조아렸다·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감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 공평한 기회(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