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평한 기회(2) >
강대성 실장은 별안간 자신을 찾는 오성병원장의 은밀한 전화에 많이 당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성병원장이 은밀히 자신을 찾는 이유가 가족의 건강 문제가 아니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나는 장소도 병원이 아닌 서초동의 조용한 술집이었다·
길을 가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치킨집이라 병원장이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외네요· 병원장님 스타일이 의외로 소박하신가 봐요?”
장명규 병원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도 여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손님이 없는 것 같아서 이곳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아··· 그럼 오늘 이 집 치킨 맛은 보장 못 하는 거네요?”
“아쉽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치킨이야 뭐 그 집이 그 집이지· 할 이야기가 뭐예요?”
겉으로는 가벼운 투로 물었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혹시나 병원장이 만나자는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으음····”
장 병원장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이 답답했지만 대성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잠시 마음을 다잡은 병원장이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라고 해야 할까?
대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얼마나 안 좋으신데요?”
“연골육종이라고 쉽게 말해 뼈암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척추 쪽에 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조직 검사를 한 결과 진단이 확정되었습니다·”
“어느 정도나 진행된 건데요? 당신들 실력이면 아무리 암이라고 해도 치료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도 이렇게 빨리 진행됐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허리가 많이 아프셨을 텐데····”
“아니 아버지가 허리 안 좋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진행이 많이 됐고 위치도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아····”
대성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형은요? 알아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직감적으로 지금 이 사태가 자신에게 엄청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생각이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요?”
“부회장님은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럼 알려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도 형에게 먼저 알린 것도 아니고 저에게 먼저 알리는 이유가 있습니까?”
장명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각오하고 왔음에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부회장의 지시에 의해 억지로 거짓말을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그가 했던 배신이 더욱 어리석고 아프게 느껴진 것이다·
“강 실장님 오성병원의 원래 이름을 아십니까?”
“오래전에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네요·”
“오성병원의 원래 이름은 만민의원이었습니다· 병원은 크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 유학까지 다녀왔던 아버지의 명망이 높아서 환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의원 규모가 작고 돈이 없어 외국에서 좋은 장비를 들여오지 못해 정밀한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무척 안타까
워하셨습니다· 그러다 지금 병원에 누워 계시는 회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은 적 있습니다·”
“회장님은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셨고 아버지에게 병원 경영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회장님이 나중에 다른 말을 할까 걱정하셨지만 이후 정말 경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으시자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암이라는 걸 들은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자꾸 이런저런 잡설을 늘어놓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욱하는 마음에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병원장의 심각한 표정에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서요?”
“환자를 많이 돌보는 게 소원이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원하는 대로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많이 돌보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요· 오성병원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고 무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아버지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 생
각한 나머지 중요한 걸 잊어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잘 키운 오성병원이 결국 남의 것이라는 걸 말이에요·”
대성이 흠칫 놀랐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이었으니까·
“·······”
“물론 오성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 오성병원이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 될 수 없었으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제 잘 키웠으니 수고했다고 입 싹 닫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론은요?”
“강만성 사장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오성그룹에 무슨 일이 닥쳐서 혹시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작은 도련님을 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오성병원을 달라?”
“네· 이렇게 말하면 꼭 내 손에 없는 걸 달라고 하는 것 같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성병원은 오성만의 것이라고 하기엔 우리 부자가 그동안 공들여 온 노력이 너무 큽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본래 오성병원의 절반은 우리 부자의 것이 맞겠지요·”
대성은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린 게 아닌 것과 현실은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해야 합니까?”
대성의 이번 대답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소문에 형에게 기가 죽어 살았다고 들었으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할 건 당연했다·
“그렇게 하세요·”
“내가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고 싶으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순간 대성이 움찔했다·
“·······”
“내가 실장님을 찾아왔을 때 어떤 마음으로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해 보고 안 되면 포기할 가벼운 마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내 남은 인생 모두를 건 겁니다 실장님에게요·”
“왜 형이 아닌 저입니까?”
“이미 다 가졌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전부 자기 것이나 다름없는데 나와 거래할 이유가 있을까요?”
대성은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앞에 놓인 맥주를 들이켰다·
알싸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늦으면 곤란합니다·”
“내일까지 연락드리죠·”
“기다리겠습니다·”
대성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그가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던 장명규 병원장은 전화를 걸었다·
“네 말씀하셨던 대로 전했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그는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씨발··· 이제 다 끝인가?”
그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그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
대성은 병원장을 만나고 한참 동안 거리를 배회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사이에 쉴 새 없이 몰아친 충격을 추스르고 최선의 방책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결국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종로로 향했다·
혼자서는 최선의 답을 찾기 어려웠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으니까·
종로에서 그의 회사가 소유한 호텔을 잡고 저녁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드디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성이 문을 열고 반겼다·
영훈은 안으로 들어와 슬쩍 안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룸서비스라도 시키지 그랬어요?”
“그럴 정신이 없어서요·”
“저녁 먹을 정신도 없이 기다렸다···· 꽤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나는 저녁 먹었으니까 일단 식사라도 시키세요·”
“됐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
영훈은 침대에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뭡니까? 갑자기 약속도 없이?”
“방금 병원장을 만나고 왔어요·”
“병원장이요?”
“오성병원 병원장이요·”
“아··· 오성병원···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했어요 연골육종· 위치도 안 좋고 치료 시기도 놓쳐서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대성은 이 말을 하면서 영훈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크게 놀라거나 아니면 기회라고 여겨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은 예상과 아주 달랐다·
“그래요? 그래서요?”
한 치도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저 마음의 동요를 내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별다를 것 없는 이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오히려 대성이 당황했다·
“그래서라뇨? 아버지가 암이라니까요?”
“암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서 걱정이 됐다면 내가 아니라 강재식 부회장님을 찾아갔겠죠? 그렇다면 아버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날 찾아왔다는 건데 난 그걸 물어보는 겁니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
“·······”
대성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예전부터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마치 자신을 부처님 손바닥 위에 놓인 손오공처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간단한 이치일 수 있겠지만 이 짧은 순간에 그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소름 돋는 일이었다·
영훈은 벙찐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웃기네요?”
“뭐가요?”
“시기가 참 공교롭지 않아요? 하필 두 아들 사이에서 왕자의 난이 벌어질 이 타이밍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니····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상황일까요? 아니면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진 상황일까요?”
“그거야····”
“우선 그 병원장이 뭐라고 말했는지부터 들어봅시다·”
대성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일단 저에게 먼저 와서 이야기해 줬대요· 목적은 오성병원· 그걸 주면 형과 싸울 때 날 지지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어느 정도는··· 말을 가볍게 하지 않고 신망도 있는 사람이에요·”
“음··· 그래서 진짜 묻고 싶은 게 뭡니까?”
“내가 궁금한 것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착 가라앉은 대성의 눈빛·
단단히 결심한 상태임을 알았다·
영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병원장의 말이 사실이라고 판단했으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
그냥 그와 거래하고 입 싹 닫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혹시나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 찾아온 것이다·
영훈은 강재식 부회장의 손을 잡고 난 뒤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건강을 조심하라는 말의 절반은 문자 그대로 그의 건강을 뜻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영훈이 봤을 때 그는 단명할 상이 아니었다·
천수를 누릴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 한창나이에 병으로 급사할 상은 아니었다·
영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요 강대성 씨· 내가 사업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돈밖에 모르는 냉혈한은 아닙니다· 내가 비록 당신과 손을 잡긴 했지만 인륜을 저버리면서까지 일을 성사시키라고는 말하지 못하겠군요·”
“날 비난하는 겁니까?”
“비난이 아니라 충고하는 겁니다· 머리는 굴려야 할 때 굴리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는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라 자식으로의 도리를 다하는 게 맞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순순히 인정할 정도로 순수한 마음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효심을 다하기에는 걸려 있는 게 너무 많은 상황입니다· 아마 아버지가 나라고 해도 저처럼 고민했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리고 강재식 부회장님도 아마 그걸 아실 겁니다· 자신이라고 해도 그렇게 선택하리라는 거·”
“네?”
“그가 당신들 자식을 모르겠어요?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럴 때 더 달라붙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더 달라붙으라니·”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아니에요· 더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자식들 중에서도 더 예쁜 자식이 있어요· 얼굴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얼굴이 잘생기고 예쁘면 벽을 허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진 배경과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상대방을 향한 경계심을
허물고 고정관념을 허물기 때문에 얼굴이 중요한 겁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해요? 이런 상황일수록 아버지에게 예쁜 아들이 되세요·”
“아니 그게 무슨····”
조언을 받으러 온 대성이지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냉혹한 자일수록 자신을 향한 사랑에 더 집착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잔머리는 당신 형한테나 쓰세요· 당신 머리 위에 있을 사람이 당신 아버지입니다·”
영훈은 혀를 쯧쯧 차면서 얼른 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 공평한 기회(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