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평한 기회(3) >
영훈의 충고에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린 대성은 급히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 모든 게 아버지의 계략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영훈의 충고를 받고 보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병원장의 어설픈 고백이 자신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후우···”
집앞에 도착한 대성은 문 앞에 서서 배우가 된 것처럼 감정을 잡았다·
기왕 할 거라고 마음 먹었으니 어설프게 할 순 없다·
어설프게 연기한다고 속아넘어갈 아버지도 아니었다·
진심을 담아야 하고 한 점 사심도 들켜서는 안 된다·
최영훈 상무가 말한 것처럼 어설픈 잔머리로 수를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아버지를 걱정하는 예쁜 아들이 되어야 했다·
어릴 때의 기억까지 떠올리며 최대한 감정을 잡은 그는 힘차게 대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아버지!”
대성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목청을 높여 강재성 부회장을 찾았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급하고 컸는지 온 집안 사람들이 놀라 달려나올 정도였다·
“왜? 뭔데 그러니?”
“아버지는요?”
잔뜩 감정을 잡고 올라와서일까?
대성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고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어릴 때도 눈물을 잘 보인 적이 없는 아들인데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자 엄마인 재숙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 그래? 엄마한테 말해 봐·”
“아버지 어디 있어요?”
“아버지 서재에 계시지·”
이 소란에 서재에 있던 강재식 부회장도 모습을 보였다·
유일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형인 강만성 사장·
대성은 거의 대성통곡을 하듯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겼다·
“허엉··· 아버지···”
“뭐야 왜 그래?”
평소 간단한 농담 한 마디 주고받지 않는 부자 간이었기에 강재식 부회장마저 당황했다·
“아버지 아프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이게 뭐예요·”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걸 느끼면서 강재식 부회장은 신선한 충격을 경험했다·
무슨 일로 이러는지 알 것 같은데 둘째가 이렇게 반응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다니? 네 아버지가 어디가 아픈데?”
아버지가 아프다며 대성통곡을 하니 재숙이 대경실색하며 달려들었다·
“그게···”
“빨리 말해 봐!”
“아버지가 글쎄 연골육종이래요· 뼈암이래요·”
“아이고···”
“어머님!”
재숙은 가슴을 부여잡았고 둘째 며느리인 새롬이 황급히 달려와 부축했다·
이 때부터 다은을 시작으로 어떻게 알게 됐냐 암은 얼마나 진행된 거냐 이걸 누가 또 알고 있냐 등등 수많은 질문이 대성과 강재식 부회장에게 쏟아졌다·
강재식 부회장은 그 많은 질문들을 받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실에 자리한 소파 상석에 앉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대성의 울음이 그치길 기다리는 것이다·
가족들은 일단 대성을 소파에 앉히고 냉수를 먹이며 울음을 진정시켰고 큰며느리는 만성에게 집안에 난리가 났음을 문자로 알렸다·
서럽게 울어대던 대성은 10여 분이 흐르자 조금 진정됐는지 벌게진 눈으로 말했다·
“방금 오성병원장에게 듣고 왔어요· 연골육종이고 경과가 오래돼서 힘들 것 같다고···”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재숙은 충격적인 아들의 말에 머리를 부여잡고 딸의 품에 안겼다·
다은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아빠 진짜예요? 오빠 말이 진짜예요?”
강재식 부회장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둘째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가족들이 답답해함에도 그는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 놈들은 그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손도 못 쓰고 있었다니?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드느냔 말이야! 그놈들 그 월급받고 하는 게 뭐니! 병원장한테 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달려오라고 해! 당장!”
재숙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녀가 이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대성은 다시금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스스로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정도까지 잘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내일 다시 찾아가서 한바탕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어요·”
“뭘 내일 찾아가? 당장 오라고 해·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되는 거니? 암이 그렇게 진행됐는데 어떻게 그걸 이제서야 알 수가 있어? 왜 이렇게 늦었다니?”
“···”
그거야 대성이 알 리가 없다·
병원장의 말이 진짜인 건지 아직도 백프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설프게 이러저러한 이유를 나열하기보단 그저 표정연기에 집중한 대성이었다·
답답한 재숙은 가슴을 탕탕 때리다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큰 며느리에게 화살을 돌렸다·
“만성이는 뭐 한다고 늦니?”
여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
“회의중인지 아직 연락을 안 받고 있어서요· 바로 전화해볼게요·”
문자나 카톡을 보내도 답장이 없어서 답답해하던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인 건지 이 중요한 상황에 만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묵묵부답인 상황에 여진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이자 재숙은 또 가슴을 탕탕 때렸다·
“어이구··· 너 말해봐라· 둘째는 이제 알았다고 하는데 만성이는 전혀 몰랐던 거니?”
여진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말도 안 돼요 어머님· 미리 알았다면 이이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당장 병원을 뒤집어 엎거나 대한민국 최고 의사를 데리고 와서 아버님 앞에 앉혀 놨을 거예요·”
이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강재식 부회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소란 떨 거 없다·”
“아빠!”
“병원장에게 책임을 묻는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미 생각해둔 것도 있고· 그리고 이미 최고의 의료진을 구성하라고 알려두기도 했다·”
재숙이 남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래요?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요?”
“내가 평소에 허리가 안 좋았잖아· 난 자세가 안 좋고 계속 앉아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척추에 암 덩어리가 생긴 거였어·”
“고칠 수 있는 거래요?”
“병원장이 대성이한테 엄살을 떤 게야· 초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 못 고치는 건 아니니까 이제 그만 소란 떨어·”
“암이라는데 소란을 안 떨게 생겼어요!”
재숙이 빽 소리를 지르곤 이내 환자 앞에서 할 짓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바로 사과한다·
“미안해요 내가 화가 나서··· 일단 내일 당장 나랑 병원에 같이 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뭘 알아서 해욧!”
이번만큼은 강재식 부회장도 움찔했다·
남편이 중병에 걸렸다는데 병원도 같이 못가게 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도 그걸 알기에 아내를 강하게 말릴 수 없었다·
“크흠···”
“하여튼 내일 아침에 오성병원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너희도 내일 준비해라·”
“네·”
지금이 어느 상황이라고 그 말을 거역할까·
그때 문이 열리며 만성이 들어왔다·
여진이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왜 이제 왔어요?”
“뭔데?”
“내가 보낸 거 못 봤어요?”
“어? 내가 무음으로 해놔서··· 무슨 일인데?”
만성은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듯 껄렁이며 들어오다가 온 가족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넌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들어오니?”
어머니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만성은 뭔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곧바로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한 그는 아버지가 암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급히 달려와 앉았다·
“아버지 이게 정말이에요?”
“···”
“아니 이게··· 아버지 어떡해요? 일단 제가 내일 병원 가서 다시 진찰해보자고 할게요· 의료진이 문제면 제가 싹 갈아버릴게요·”
강재식 부회장은 만성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누가 봐도 잔뜩 걱정하는 아들의 얼굴이었지만 하필 방금전 둘째의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난 다음이었다·
게다가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입꼬리가 움찔움찔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됐다· 이미 네 엄마랑 내일 아침에 병원에 다시 가기로 했다·”
장명규 병원장에게 진실을 들은 그로서는 걱정하는 척하는 큰아들의 모습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뺨을 후려갈기고 이실직고하라고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게 내려려 둔다는 것·
아버지 입장에서 그 사실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그룹이 동네 문방구도 아니고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재벌인데 그 재벌 총수가 자식 교육 못시킨 아버지라고 전국에 광고를 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아마 이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 뻔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고칠게요·”
“이제 그만 됐으니 들어가봐라·”
큰아들의 가증스러운 연기를 더이상 보고있을 수 없던 강재식 부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그만 하라니까!”
버럭 소리를 질러 가족을 모두 얼어붙게 만든 그는 차가운 눈동자로 좌중을 쓸어 보고는 말했다·
“이 정도로 안 죽는다· 호들갑 그만 떨고 내일 병원 갈 준비나 해·”
“네·”
그렇게 말하고 들어가자 재숙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이고···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질러 소리를··· 그러게 내가 그렇게 건강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어쩜 그렇게 다들 말을 안 듣니? 시아버님도 그렇고 네들 아빠도 그렇고 내가 부자 병수발하게 생겼다· 너네는 어쩔거야? 니들도 나 병수발 시킬거야?”
“아니에요 어머니·”
대성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지만 어머니가 충분히 속상할 만하다고 이해했다·
“너네 건강관리 잘해· 엄만 강씨 집안 삼대 병수발 못한다· 그러다 내가 죽어·”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금방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큰아들이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재숙은 지금 두 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암이 장난이니? 그것도 병원장이 어렵다고 직접 말했다는데?”
“병원장이 직접 말했다구요?”
만성은 일이 단순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래· 하여튼 내일 전부 병원 갈 거니까 그렇게들 알아라·”
재숙은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만성은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병원장이 아빠가 힘들거라고 말했다고?”
“응 연골육종이라는 뼈암이래· 척추에 생겼는데 시기가 너무 늦어서 힘들 것 같다고 작은 오빠에게 말했대·”
만성은 뒷골이 당기는 느낌에 대성을 돌아보았다·
동생의 담담하게 마주보는 눈빛에 만성은 일의 내막이 가볍지 않다고 확신했다·
“병원장이 그렇게 말했다고?”
“왜? 내 말이 안 믿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발가락이라도 빨 듯이 충성을 맹세하던 병원장이었다·
그런데 고작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고 동생에게로 말을 갈아탄단 말인가?
만성은 혼란스러웠다·
병원장을 만나야 했다·
그에게 무슨일이 벌어진 건지 들어야만 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만성이 일어나자 여진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디 가게요?”
“가볼 데가 있어·”
만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다 대성이 벌게진 눈으로 터덜터덜 지하로 내려가는 걸 보자 급히 따라갔다·
동생이 진열장에서 양주 하나를 꺼내 뚜껑을 따는 걸 보면서 만성이 물었다·
“병원장이 너한테 뭐라고 그랬냐?”
“아까 들었잖아·”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해보라고· 뭐라고 했는데?”
대성은 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로 그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아버지가 아프시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게 끝이야?”
“끝인데?”
“흥! 개소리하고 있네· 그게 끝이라고?”
“왜?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고 했을까봐?”
만성은 살기어린 눈빛으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기세에도 대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감히 형의 눈빛을 보고 이렇게 태연할 수 없겠지만 이미 아버지 앞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간 큰 짓을 했던 대성이었다·
지금도 손이 달달 떨리고 가슴이 쿵쾅대는 걸 진정시키기 위해 병째 나발을 불고 있으니 형의 살벌한 눈빛이고 뭐고 대성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 알았어·”
“늦지 않게 와· 내일 아버지 모시고 병원 가는 거 잊지 말고· 형이 아버지 옆에 있어야 든든하게 생각되지 않겠어?”
만성은 동생을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장남이 있어야지·”
대성은 술병 주둥이를 입에 문 채 형과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 공평한 기회(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