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평한 기회(5) >
병원에서 그 난리를 친 오성그룹 총수 일가는 병원에 엄청난 후폭풍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세 대의 차에 세 쌍의 부부로 흩어진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아버님 분위기가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 알아요?”
여진을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움직이는 차 안에서 그녀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도 아까 강재식 부회장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음을 느낀 것이다·
“별거 아니야·”
만성은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알아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뿐더러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피곤하기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라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솔직하게 말해 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만성이 짜증을 냈지만 여진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오성그룹 일가에 시집온 지 벌써 7년째인 그녀는 시부모님의 말투와 눈빛만 봐도 어떤 기분이신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한 그녀였다·
아까의 그 냉랭한 기운이 그녀의 가슴을 얼마나 섬뜩하게 만들었는지 남편은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요·”
“거 참!”
만성이 소리를 지르자 그녀가 남편의 팔을 잡고 쏘아붙였다·
“착각하지 말아요· 난 당신 아내고 시아버님이 후계를 누구로 선택하려는지 알아야 할 자격이 있어요· 내가 당신 액세서리나 하려고 결혼한 줄 알아요?”
“·······”
“얼마 전부터 항상 당신에게 주눅 들고 눈치 보던 도련님이 달라진 거 알죠? 동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시집와서 쇼핑 말고는 낙이 없어 보이던 동서가 어느 순간부터 백화점을 가지 않아요·”
“백화점을 안 간다고?”
이건 만성도 의외였다·
새롬은 결혼하기 전부터 쇼핑 중독이라고 알고 있었을 만큼 유명했던 여자였으니까·
“쇼핑은 지겹다면서 온갖 사교 모임에 다 참석하고 있어요· 저번 주에는 오성경제연구소 직원 아내들 불러 모아다가 전시회 구경하고··· 아주 가관이 아니었다고요·”
“무슨 소리야? 오성경제연구소가 대학 연구실도 아니고 직원이 몇 명인데?”
“들어 보니까 한 열 명 정도 됐대요· 누가 왔는지는 나도 모르고· 걔가 그런 애예요? 자기 혼자 놀기 바쁜 애가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겠어요?”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한가득했던 만성은 더욱 가슴이 조여 오는 걸 느꼈다·
“부부가 아주 쌍으로 미쳤네·”
“뭔가 있어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 봐요·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고 아버님이 저렇게 냉랭하게 변한 이유가 뭔지·”
만성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민하다가 운전석을 향해 말했다·
“저 앞에 세워· 그리고 본사로 택시 타고 가· 내가 운전할 테니까·”
“네·”
중요한 대화를 해야 하니 운전을 그만하라는 말에 수행기사는 길가에 차를 대고 운전석에서 내렸고 만성은 바로 뒷좌석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바꿔 탔다·
수행기사가 꾸벅 인사하는 사이에 차가 슝 출발했고 천천히 고개를 든 기사는 대번에 욕설을 내뱉었다·
“시벌 놈이··· 인정머리 하나 없는 새끼· 남들은 택시비 5만 원 턱턱 주는데 저놈은 지갑에서 현금 꺼내는 걸 본 적이 없네· 시벌 놈····”
택시 탄 비용은 이후 영수증 처리로 돌려받을 수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따로 챙겨 주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수행기사는 한바탕 욕설을 내뱉고는 터덜터덜 택시를 타러 걸음을 옮겼다·
*
[(단독) 태국 태양광 발전 프로젝트에 우명솔라 진출하나?]
별다를 것 없는 기사 한 줄이었지만 우명그룹 내에서 가지는 파급력은 굉장했다·
처음 홍보팀에서는 해당 기사를 보고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
기사가 뜨고 우명솔라에서 부인하는 그 몇 시간 동안 주가는 10% 넘게 급등락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가짜 뉴스로 인한 것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단독 기사를 쓴 기자가 우명솔라의 부인을 정면 반박하는 기사를 내며 시장을 혼돈에 몰아넣었다·
“태국의 새로운 에너지 장관인 쁘린 수파랏은 어제 오후 태양광 사업자 선정을 위한 회의에서 한국의 우명솔라와 중국의 신화전력을 언급했다· 총 사업 규모가 2백억 밧(한화 7천5백억 원)에 이르는 대규모 사업에 우명솔라가 선정된다면 고난의 행군을 걷고 있던 한국 태양광 사업자들
에게 가뭄의 단비가 될 전망이다· 또한 쁘린 수파랏 장관은 늦어도 내년 3월 차이아품을 시작으로 착공에 들어갈 것이며 사업자 선정은 이달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이거 기자가 뭣도 모르고 씨불일 수 있는 내용이야?”
김태현 회장의 물음에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 기자 하나 때문에 사장단 회의가 소집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기사 내용이 그저 코웃음 치며 넘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김태현 회장은 첫째 아들이자 우명솔라 사장인 도훈에게 물었다·
“너 아무것도 몰라?”
“아무래도 기자가 착각을 하거나 주가 급등을 위한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직원들 중 누구도 태국 고위층하고 접촉한 일도 없었고 태국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총사업비가 7천억이나 되는데?”
“태국은 부패가 심하고 왕가의 입김이 강력합니다· 협상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될 게 뻔하고 태국에서 태양광 사업을 하겠다는 말을 꺼낸 지 벌써 6년도 넘게 흘렀지만 눈에 띄는 진척은 없었습니다· 아마 이번 발표 역시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김태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태현 회장은 다시금 손에 든 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김도훈 사장은 그 마음이 이해 간다는 듯 말했다·
“미련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기사는 태국 쪽에서 의도적으로 뿌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국에서?”
“네· 신화전력과 협상 중인 태국이 가격을 낮추기 위해 우리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으음··· 그럴 수 있겠군·”
회장이 일리가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자신의 의견에 더욱 확신을 얻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화전력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론을 움직인 상황에서 우리가 따라서 움직인다면 태국의 얕은 수작에 놀아난 모양이 될 겁니다· 이럴 때는 가만히 기사 내용을 부인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 역시 김도훈 사장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며 추켜세웠다·
“그런가? 그럼 이 기자가 돈을 먹었다는 건데··· 혜성일보가 우리를 물로 보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일확천금이 걸리면 은행 직원들도 돈 사고를 치지 않습니까·”
“으흠····”
이 기사 하나로 사장단 회의까지 소집한 마당에 이렇게 허무하게 회의가 끝나 버리면 회장의 체면 역시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회의를 마무리해야 함에도 괜히 뭔가 놓치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와중 문이 열리고 김창훈 상무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회의에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주택영업본부장인 김창훈 상무가 갑자기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도훈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김창훈 상무는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사장단 회의인 거 몰라요?”
“네 알고 있습니다만 회의 내용이 태국 태양광 사업 때문이라면 제가 있어야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어서 이렇게 들어오게 됐습니다·”
“네가 뭐라고?”
존댓말을 해야 함에도 너무 어이가 없던 도훈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도훈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김태현 회장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가 있어야지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네· 이 사업 스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국에서 몇 명 안 되고 그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저라서요·”
뭔가 어깨에 뽕이 과하게 찬 언사였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앉아·”
“네·”
창훈은 자신만만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HS물산 최영훈 상무와 기조실 직원을 만나 해당 사업 진행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기사가 근거가 있는 기사라는 거야?”
“네· 일단 먼저 이 사업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창훈은 슬그머니 일어나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큼큼··· 먼저 태국 태양광 사업에 관한 논의는 꽤 오래전에 HS물산에서 제의해 온 사업입니다·”
“거기가 왜?”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HS그룹이 얼마 전에 태국 가스전 사업을 취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미 개발된 곳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태국의 고위 관리들과 상당히 긴밀한 접촉을 해 온 관계로 HS그룹은 가스전에서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사업을 계속 진
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스전 손에 쥔 게 고작 몇 달 전이잖아? 그럼 가스전을 쥐기 전부터 그랬다는 거야?”
“네· HS그룹은 가스전 사업자 발표가 있기 전부터 이미 사업자 선정에서 우위를 확실히 점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김태현 회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간이 큰 건가? 공개 입찰에서 금액을 더 크게 적어 내도 그렇게 확신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일을 그런 식으로 한다고?”
“저도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사업자 발표에서 HS물산과 한국석유공사 컨소시엄으로 결정 난 걸 볼 때 그 확신에 근거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추가적인 사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태양광 사업이었습니다· 태국의 오랜 염원 사업이기도 했고 사업 규모도 꽤 컸으니까요· 그리고 HS건설은 태양광 사업을 추가적인 태국 진출의 교두보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두보?”
“네· 태양광 사업을 비롯해서 수력 원자력 발전으로 이어지는 태국 에너지 핵심 사업을 HS건설에서 도맡아서 할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다? 다 먹겠다고?”
“네·”
김태현 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계속해·”
“그러다가 인도 신공항 사업을 추진하면서 만난 최영훈 상무가 우명솔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태양광 사업에 진출하기 적당할 것 같다고 말했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우명솔라의 도움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네· 태국 에너지 사업부와 대략적인 협의가 됐고 이후 실무진들의 협의가 남은 상황입니다· 큰 부분에서 결정된 사항이라서 서로 간에 적당히 양보하면 문제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HS는 뭘 먹고?”
“HS건설에서 태양광 사업 전반에 관한 PM(Project Management)을 담당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지들이 벌인 판에 조연으로 끼워 주겠다는 말이네?”
태양광 사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모듈을 공급하는 것이기에 조연으로 끼워 준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김태현 회장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맞습니다·”
“넌 그런데도 웃음이 나오냐?”
김태현 회장이 툭 내뱉자 창훈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우리가 아니라 남이 만들어 준 기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명솔라가 흑자 전환을 할 수 있는 큰 기회니까요·”
우명솔라에게 있어 재고를 소진시키고 공장 가동률을 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은 틀림없었다·
“일단 알겠어· 다들 나가봐· 김창훈 상무는 따라 올라오고·”
김태현 회장은 기사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 좋은 소식을 들었음에도 오히려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크게 기분이 상했음이 분명했다·
착 가라앉은 회의실의 분위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고 회의실에는 두 형제만이 남아 있었다·
“너 뭐 하냐? 내가 시발 개 좆으로 보이냐? 네가 우명솔라 사장이야?”
“회사가 어려우면 뭐라도 해야지· 난 아버지가 불러서 이만 가 볼게·”
창훈은 분노로 부들거리는 형을 지나쳤다·
회장실로 올라가니 여전히 침통한 표정을 한 김태현 회장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네·”
“네 형이 뭐라고 하드냐?”
“네? 아니요 별말 없었습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창훈을 바라보던 그가 상석에 앉고는 말했다·
“최영훈이가 설계했다고?”
“네·”
“그 녀석한테 만나자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창훈아·”
“네?”
“오성그룹 이야기 들었지?”
창훈은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네·”
“너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냐?”
“·······”
순간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창훈을 보고 그가 가만히 노려보았다·
“난 그렇게 되길 원치 않는다· 자고로 분수를 모르는 놈은 초가삼간을 태우는 법이다·”
창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 공평한 기회(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