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개 비용(2) >
인도의 신공항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중이며 전체 사업으로 보면 아직도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초기에 진출했으니 인도 정부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데다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른 영역으로도 진출이 가능한 상황에서 발을 빼라니···
그 이야기를 인도 정부 관계자가 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고작 서른 중반밖에 안 된 어린놈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김태현 회장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인도 신공항 사업이 진행되면서 인도 정부와 여러차례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HS건설이 그 가운데에서 무리 없이 처리해 오는 걸 지켜보면서 인도 사업에서 HS그룹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느꼈던 그였다·
“마음에 안 드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국 정부와 협의해보시면 알 겁니다· 우명솔라가 크게 불만을 가질 정도로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인도 정부에서 추가 부지 발표에 대해서 말이 없는 상태니 언제 추가 발주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
“우명건설은 향후 3년 정도 먹거리 걱정은 할 필요 없는 상황 아닙니까? 이럴 때 어려운 우명솔라 도와준다 생각하면 크게 손해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헛소리를 제법 논리적인 척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구만·”
영훈은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말하면서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꼭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뭐가 말인가?”
“인도 정부에서 추가 신공항 사업지를 발표한다고 해도 우리의 도움 없이는 우명건설 혼자 신공항 수주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우명건설이 인도에서 물러나면서 우명솔라가 태국에 진출한다면 상당히 보기 좋은 모습 아닐까 합니다·”
김태현 회장은 다시 스스로 막걸리를 잔에 가득 부은 다음 한껏 들이켰다·
마치 막걸리로 분풀이를 하려는 듯한 모양새라 영훈은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이도 많은 양반 화나게 해서 몸 상하게 하면 괜히 미안해질 것 같아서였다·
“많이 드시면 제가 걱정스럽습니다·”
“내가 자네 걱정할까봐 내 마음대로 못 마셔야겠나?”
“···”
“끝인가?”
“네?”
“할 이야기 다 했냐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더 원하는 것도 없고?”
“네·”
“난 아직 다 끝나지 않았네· 자 그럼 우리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무슨 꿍꿍이로 창훈이에게 접근한 건가?”
영훈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쏘아보는 걸 보니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
“말씀드렸던 이유 그대롭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파트너란 것이 꼭 서로에게 윈윈이 되도록 하는 파트너는 아니었지· 윈윈처럼 보이지만 내가 더 이득이 되는 걸 모르는 파트너· 배경이 조금 부족하든 지능이 조금 떨어지든 그런 파트너가 나에게는 가장 좋은 파트너였다네· 우리 창훈이는 어떤가? 자
네가 구워 먹기 딱 좋은 정돈가?”
어지간한 사람이면 위축돼서 마주보지도 못할 정도로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도리어 영훈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회장님께는 그런 파트너가 좋은 파트너였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하하하!”
“일리가 있어?”
“네 일리가 있군요· 그런데 조금 착각을 하신 게 김창훈 상무라고 더 어리석고 김도훈 사장이라고 더 영리해보이지 않습니다· 저에게는요·”
이번에도 장남의 능력을 하찮게 본다·
당연히 김태현 회장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
“우리 도훈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아니 더 솔직해지자면··· 아닙니다· 여기서 그만하죠·”
“이왕 말을 꺼냈으니 끝까지 하지?”
“아닙니다· 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회장님께서 어떤 의심을 하고 계시는지 알겠지만 저에게는 그다지···”
여기서 입을 싹 닫아버렸지만 그 뒷말이 무엇인지 짐작못할 그가 아니었다·
김씨 형제 뿐만 아니라 설사 김태현 회장 당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는 말·
차마 그 이야기는 못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꺼낸 것이나 다름 없었고 저렇게 말을 하다 마는 게 더 열받게 만들었다·
“그럼 창훈이를 선택한 진짜 이유가 뭔가?”
“아직도 제 이야기를 다 믿지 못하시는군요? 으음··· 회장님 야구 좋아하십니까?”
“종종 본다네·”
“야구는 확률의 스포츠라고 하죠? 그 중에서 좋은 투수의 첫 번째 요건을 바로 기복 없이 꾸준히 퀄리티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를 유지해주는 선수일 겁니다· 야구에서는 그걸 보고 계산이 서는 선수라고 하더군요· 계산이 선다 함은 오늘 팀이 승리한다는 걸 예상범위에 넣을 수 있고
몇 명의 중간계투와 마무리가 소모될지 예상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 김창훈 상무는 계산이 서는 상대입니다· 적당히 욕심 부릴 줄 알고 필요한 걸 가져가기에 저로서도 계산을 세우기 편합니다· 그런데 김도훈 사장은 다릅니다· 분수를 모르는 자는 계산을 할 수 없거든요·”
김태현 회장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놈은 자신을 조금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어쩜 눈치도 보지 않고 막 뱉어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저 단어가 나올 때마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었건만 저놈은 그런 것 따위는 아예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기분 나빠했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제는 인상을 긁어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것임을 알기에 치솟는 화를 꾹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계산이 선다는 것 자체가 우리 창훈이를 얕보기 때문이 아닌가?”
“제구력 좋은 투수가 계산이 설까요? 150을 던져대면서도 가끔 언제 빈볼성 투구를 던져도 이상하지 않은 투수가 계산이 설까요? 얕보기 때문이 아니라 똑똑하기 때문에 계산이 서는 겁니다· 도리어 멍청하고 앞뒤 분간을 못하면 계산이 안 서는 것이죠·”
“···”
할 말이 없어진 김태현 회장은 막걸리로 속을 달래고 나서 말했다·
“태국 태양광 발전 사업 하나로 인도에서 발을 뺄 수는 없네· 인도와 태국은 비교할 수 없는 시장이고 향후 발전 가능성도 월등히 차이가 나·”
“말씀드렸듯이 저희 도움 없이 추가 수주는 어려우실 텐데요?”
“솔직히 그 말을 다 믿기 힘들지만 그게 설령 사실이라고 쳐도 자네들 역시 우리 도움이 없이는 힘들거야·”
“그런가요?”
“어차피 우리가 못 먹는 거 다 같이 못 먹게 망치는 건 우리 전문이거든·”
영훈은 고개를 모로 꼬면서 피식 웃었다·
“진심 아니시죠? 회장님이야 말로 빙빙 돌리지 마시고 본론을 꺼내 보세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하시면 되지 왜 협박을 하려고 드십니까?”
김태현 회장은 답답했다·
왜 얼음이 동동 띄워진 막걸리를 마셔도 속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안 그래도 을의 입장인 상황이라 협상을 진행하기가 어려운데 어린 놈이 조금도 말려들지 않고 있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 위치라면 조금 자만하고 생각 없이 휘둘리기 쉬울 것인데 마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이 느껴졌던 거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커다란 대접에 막걸리를 한가득 부어 놓고는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그걸로는 부족해·”
“그래서요?”
“태국에서 더 많은 사업을 진행한다고 들었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혹시 원자력 발전소 쪽에 경험 있으십니까?”
김태현 회장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네· 있고 말고· UAE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 수출 1호기를 누가 만들었는지 아나? 바로 우리네·”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다·
“아··· 그렇군요· 이번 인도 신공항 프로젝트처럼 태국 원자력 발전소 건설 수주에 우명건설과 컨소시엄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명건설을 도훈이가 받는다고 해도 이 협약에는 지장이 없는 거겠지?”
“그럼요· 이건 김도훈 사장이 아니라 회장님과 맺은 협약 아닙니까?”
“알겠네·”
김태현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걸리를 하도 마셔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취해서 헛소리를 하거나 몸이 휘청일 만한데 그는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오늘 잘 마셨습니다·”
“마시긴 개뿔··· 몇 모금 해놓고는··· 어디 가서 술 마셨다는 소리랑 말게·”
그렇게 한소리 뱉은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
“어이구 죽겠네···”
차에 올라탄 김태현 회장은 머리를 붙잡았다·
어린 놈 앞에서 약해 보이기 싫어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걸었더니 이제서야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낀 그였다·
“집으로 모실까요?”
수행기사 옆 조수석에 앉은 비서실장이 물었다·
그렇게 하자고 말하려던 김태현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어린놈과의 협상은 결코 쉽지 않았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차라리 창훈이에게 지분을 몰아주지 않을 시 우명과의 거래를 끊겠다는 식으로 나왔다면 결정하기 편했을 거다·
창훈이가 HS그룹과 비밀스러운 협약을 맺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단호하게 잘라낼 것인데 그 어린놈은 창훈이 후계를 이었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말하면서도 전혀 강압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도훈에게 지분을 몰아주면 나중에 우명에 크게 손해가 될 거라는 식으로 말하면서도 그것조차 크게 티를 내지 않았다·
“논현동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논현동은 그가 마음이 심란하거나 외로울 때 찾는 바였다·
바의 주인은 그의 애인이었고 그 바도 그가 마련해준 거였다·
오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어떻게 됐습니까?”
김창훈 상무는 자신의 아버지와 영훈이 만난 직후 을지로의 한 낙지집에서 영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훈은 자리에 앉자마자 마침 잘 익어가는 매콤한 낙지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아주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시더라구요·”
창훈이 어두운 표정으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아버지가 그래요· 워낙 보수적이기도 하시고 예전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장남 대신에 다른 아이를 세자로 앉힌다던 말씀을 하셨거든요· 솔직히 제가 형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도 아니었고···”
“뭐 그렇긴 하죠·”
영훈의 맞장구에 잠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창훈이 허겁지겁 낙지를 집어 먹는 영훈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이대로 끝인 겁니까?”
영훈은 오물오물 낙지를 씹다가 말했다·
“솔직히 좀 실망스럽습니다·”
“네?”
“현진중공업 인수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죠?”
“그건··· 인수협상 거의 마무리된 거 아시지 않습니까? 막판에 LNG선 수주 받으면서 주가가 올라 애먹긴 했는데 거의 마무리가 됐습니다·”
“말은 마무리가 됐다고 하지만 아직 도장이 찍힌 건 아니잖아요· 이럴 바에는 그냥 우리가 인수를 하는 게···”
“무진이 해주조선해양 인수할 때도 EU에서 쉽게 승인해주지 않았는데 해주가 군산조선소까지 먹은 상황에서 현진중공업 인수를 쉽게 승인해주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흐음···”
창훈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다가 술을 따라주고는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랑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적당히 잘 협의하기로 했습니다·”
“적당히라면?”
“우명은 인도에서 발을 뺀다· 그리고 태국 원자력 발전소 사업에서 손을 잡기로 한다·”
“예쓰!”
창훈은 짝 박수를 치곤 얼른 주변을 돌아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다시금 확인하곤 희희낙락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태국의 태양광 사업을 계속하기로 한 것은 그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 째로 원자력 발전소 수출을 진행하게 된다는 건 그룹 내에서 우명건설의 입지를 더욱 크게 다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감사는요·”
“후우··· 진짜 영훈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우명그룹의 회장이 된다는 건 정말 대한민국에도 비극이고 사회 정의에도 맞지 않는 일이거든요· 감사합니다·”
“···”
영훈은 굳이 어째서 사회 정의까지 나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창훈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소주잔을 털어 넣은 뒤 다시 허리를 곧추 세우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글쎄요·”
“그러지 마시고··· 아버지가 형을 계속 밀어주려고 하신다지만 그래도 저에게 고개를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렇게 형을 이기고 싶습니까?”
“그 새끼는 말이에요 절대 회장이 되면 안 될 새끼입니다· 사이코패스 아시죠? 사이코패스가 하층민일 때는 사람 몇 명을 죽이겠지만 그런 새끼가 회장이 되면 수십만이 고통받게 됩니다·”
“흐음··· 그런데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에요· 아버님이야 원래 그렇게 살아오셨을 테니 마음이 쉽게 돌아서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러니까요·”
“그럼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바뀌게 만드는 건 어떨까요?”
“네?”
“이를테면 아주 대단한 배경을 가진 며느리라든가···”
창훈은 눈을 번쩍 떴다·
“결혼이요?”
< 중개 비용(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