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개 비용(4) >
남자를 배척하는 얼빠였던 고이케 유리코와 김창훈 상무가 잘 됐을 거라는 건 굳이 그 날 저녁 두 남녀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남녀가 당일 만나서 애프터 신청을 했다고 해서 당장 결혼하는 것이 아니기에 두 남녀의 반응이 좋았다고 해서 크게 기분이 좋거나 하지는 않았다·
결론이 나려면 적어도 석달은 지나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둘이 선을 본지 사흘 만에 고이케 유리코가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김창훈 씨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고작 사흘 데이트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얼빠에다가 올해 결혼운이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래서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던가?
결혼을 결심했다고 보고하러 사흘 만에 온 고이케 유리코는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대놓고 웃음을 짓거나 들뜨지 않고 평소 그 우아한 자태 그대로였지만 딱 하나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긴장감이 많이 풀어진 게 느껴졌다·
“서로 사는 곳이 다르고 알아가야 할 것이 많아요·”
“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맞아요· 급한 게 맞아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의심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고 별다를 것 없는 사소한 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지금 이 느낌이 너무 좋아요·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요· 믿을 수 있는 남자라고 하셨죠? 믿을 수 있는 남자니까 그 이상은 계속 만나가면서 알아갈게요·”
지금까지 남자를 피해오다가 서른 넘어서야 인연을 만나니 그 급한 마음이야 이해가 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국에 들어올까 해요·”
“한국에요?”
“김창훈 상무는 제가 옆에 있어주길 원할 것 같아요· 겉으로 표현은 못하고 있지만···”
“그래서 온다는 건가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번의 일이 있었어요· 사기도 당할 뻔했고 납치도 당했었어요· 전부 돈을 노린 야쿠자들의 행동이었어요· 미남계도 있었어요· 절 유혹하려는 남자 중에 연예인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아찔해요·”
“···”
“할아버지보다 날 더 잘 아는 당신은··· 저에게 굉장히 낯설고 신기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못 믿지만 당신은 믿음이 가요· 평소였다면 믿지 못했을 그 사람도 믿음직해 보이구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내 고질병이 또 도질 것 같아요· 혹
시 내 재산을 빼앗기 위해 모의하고 있지는 않을까 의심하고 불안해하겠죠· 차라리 옆에서 지켜보면서 마음을 안정시킬까 해요·”
“좋은 생각입니다· 한국 속담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아무리 일본과 한국이 비행기로 2시간 이면 오갈 수 있지만 옆에서 계속 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겠죠· 그럼 어디서 지낼 겁니까?”
고이케 유리코가 호텔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곳 마음에 들어요· 당신 회사 소유의 호텔이기도 하고·”
“좋은 선택입니다·”
HS관광 소유의 5성급 호텔에서 장기간 투숙하겠다는데 싫을 수가 없다·
하루 숙박료만 수백만 원 짜리 고급 객실에 최소 석 달 이상 머무를 텐데 이 정도면 엄청난 고객이 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을 무렵이면 MICE(meeting:기업회의 incentives:포상관광 convention:컨벤션 exhibition:전시)로 인한 호텔수요 때문에 숙박률이 상당히 높다고는 해도 비교적 저렴한 객실이 이용된다·
이처럼 하루 수백만 원 이상의 초고가 객실은 시즌에 상관없이 무조건 하늘처럼 받들어야 하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보니 더 마음에 드네요·”
“언제부터 묵을 생각이십니까?”
“한국에 장기간 머무르려면 일본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예요·”
“호텔 직원들에게 말해서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라고 하죠·”
“올 때 선물을 가져오도록 할게요· 부족함 느끼지 않도록·”
“아니 뭐 그거야 알아서 하시고··· 어쨌든 이왕 시켜드린 거 뺨이나 안 맞으면 족합니다· 신영금융에 이대로 계속 보탬 주시면 감사하구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진 표는 계속 이형준 대표를 향하고 있을 거예요·”
“그거 듣기 좋네요·”
영훈은 환하게 웃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이형준 대표 아버지를 생각하면 방금 그녀의 선언은 크게 힘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
우명그룹의 김태현 회장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큰아들인 김도훈 사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설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건 아니시죠?”
최영훈 상무와 이야기를 할 때는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돌아와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김 회장이었다·
거래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 보단 그 거래로 인해 요동치게 될 후계자 문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 김태현 회장은 결국 큰아들에게 HS그룹의 제안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 안에 숨겨진 자식들의 후계 문제는 쏙 빼고 오로지 회사 간의 거래 내용만 이야기했다·
아무리 자신이 그룹 총수라고 해도 우명솔라 사장인 도훈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진행한다는 건 큰아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고 그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싫으냐?”
“그거야···”
당연히 싫다고 대답하려던 도훈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는 HS그룹의 도움이 없이는 인도에서 추가 신공항 건설 수주를 못 받는다는 전제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룹 전체로 보면 분명 손해일 거라고 생각했다·
태국 원자력 발전소 계획안이야 이미 수 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이고 그게 될 거라는 확신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수주를 따온다 한들 크게 이익이 남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지금까지 국내 건설업체들이 해외의 수조 수천억에 달하는 무수한 공사를 따내면서도 돈을 못 번 이유가 뭔가?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막상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가수주로 인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 때문에 손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대로 인도에 남아 설사 추가 신공항 건설 수주를 받는다고 해도 그건 우명건설의 실적이지 우명솔라의 실적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외부에 보이는 건 실적이고 이대로 시간이 지나다가 태국 태양광 발전사업을 놓친다면 결국 그 책임은 우명솔라 사장인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통수에 걸린 격이었다·
제안을 거절하자니 태양광 사업 포기로 인한 외부의 비난이 신경쓰였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자니 결국 사장단 회의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동생을 띄워주는 격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명솔라는 지금 당장 돌파구가 필요해· 공장가동률은 떨어지고 태양광 전지판 가격은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다· 그룹에서 미래를 위해 계속 지원해주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고 어느 정도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그룹 임원들도 너를 인정해주게 돼· 네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 나도 알겠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내놓아야 나도 이걸 드랍할 명분이 생긴다·”
김태현 회장으로서는 둘째 아들이 주목받는 상황 자체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가문과 왕조가 후계를 잘못 세웠다가 망한 걸 봐왔기에 이미 도훈이를 마음에 정해두고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지원해줬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 장성한 아들들이 한창 일을 해가는 이때 갑자기 둘째 아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도훈이 흔들리고 있으니 어쩌면 큰아들 만큼이나 HS그룹의 제안이 마뜩치 않은 것인데···
명분이 필요했다·
HS그룹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는 다른 비책이 나와야 거절할 수 있을 테니까·
“···”
안타깝게도 큰아들은 침묵한 채 결정을 오롯이 아버지에게 떠넘겼다·
김태현 회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다·”
명분은 없지만 명분이 없어도 해야만 할 때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거절···”
거절하겠다고 말하려 할 때 ‘똑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렀다·
“김창훈 상무가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김태현 회장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해·”
어차피 HS그룹의 제안을 거부하려고 마음먹었기에 이왕 결정했으면 둘 다 자리에 있을 때 말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그였다·
잠시 후 창훈이 들어오자 도훈이 인상을 긁었다·
“넌 뭐하고 다니는 거야?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듣고 다녔는지 알기나 해?”
“응? 무슨 제안?”
“HS 그 양아치 새끼들이 우리더러 인도에서 발 빼라고 했다며? 너 모르고 있었어?”
“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걸 알면서 가만히 있었어?”
창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자력 발전소 가져오기로 했잖아· 게다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인도 정부에 누가 더 로비 잘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라는 거야? 형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HS그룹이 잡고 있는 인도 총리야· 인도 총리를 꽉 잡고 있는데 로비를 뭘 어떻게 해?”
“그럼 그 총리를 우리가 틀어잡아야지!”
“그렇게 잘 할 수 있으면 태국 태양광 사업도 HS그룹 없이 할 수 있겠네? 오케이· 인도에서 철수하지 않아도 되고 좋네·”
“그만해· 여기가 집이냐? 싸우려면 집에서 싸워·”
보다 못한 김태현 회장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을 죽일 듯 노려보는 도훈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능력이 없어서 저렇게 당하는 게 아니다·
도훈이 아니라 그 누가 우명솔라 사장이라고 해도 지금 상황은 타개하기 힘들 것이고 갑자기 태국 사업을 들고 온 최영훈이라는 놈만 아니었으면 둘째도 저렇게 기세등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 죄송해요·”
“그런데 왜 온 거야?”
“태국 쪽 에너지부 담당자랑 협의 일정 잡아 왔습니다·”
김태현 회장과 도훈의 표정이 일제히 찌푸려졌다·
“너무 급한 거 아니야?”
“급하다구요?”
느릿느릿 일하기로 소문난 동남아 국가들과 거래를 하면 일처리 속도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 일처리가 빨리 되는 걸 가지고 불편한 내색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창훈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태현 회장은 자신의 실책을 인식하곤 표정을 바로하며 물었다·
“너무 성급한게 아니냐는 거지· 저쪽 수작에 말려들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해야 하는 거다· 저들이 모듈 단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섣불리 달려들면 언론에 물어뜯기기 딱 좋아·”
“모듈 가격은 대략 들었습니다·”
“들었다고?”
“네· 우리 쪽 이익을 최소 15% 잡아주겠다고 하는데 일단 만나서 20%까지는 올려보려고 합니다·”
김태현 회장은 갈수록 곤란함을 느꼈다·
점점 더 굳어지는 도훈의 표정과 실질적인 그룹의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상충되어 갈피를 못내리고 있는데 창훈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아 그리고 아버지 저 결혼할지도 몰라요·”
“결혼? 갑자기?”
“네·”
“여자는? 만나는 여자도 없었잖아? 네 엄마가 그렇게 여자 소개시켜준다고 했을 때도 싫다고 하더니 설마 몰래 만나고 있었던 거냐?”
“만난지는 얼마 안 됐어요·”
“얼마 안 만났는데 결혼하겠다고?”
“짧게 만났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라서요·”
동생이 꼴보기 싫었던 도훈이 툭 내뱉었다·
“야 여기 회사야· 사적인 이야기는 집에서 해야지·”
“그렇긴 한데··· 한국 사람이 아니고 일적으로도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서·”
“일적으로 관련이 있다니?”
아버지가 묻자 창훈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물론 속으로는 아버지가 얼마나 놀랄지 기대하고 있었다·
“일본 로얄메이저 아시죠? 거기 대표인 고이케 유리코예요· 나이는 저보다 세 살 많긴 한데 말도 잘 통하고···”
김태현 회장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가 젊었던 시절 많은 사업가들이 일본 돈으로 사업을 일으켰기에 로얄메이저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죽은 로얄메이저의 전 회장은 그와도 몇 번이나 만난 적 있었고 당시에도 만나면 그가 먼저 고개 숙여 인사했을 만큼 그 영향력은 대단했었다·
그런 가문의 여자 그것도 회사 대표를 꼬셔왔다고?
“그 여자가 너랑 결혼을 한다고 해?”
“잠깐 일본 들어가서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결혼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허락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당연하고 말고다·
괜히 마음이 급해진 김태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물었다·
“언제 들어온다고 해?”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어떻게 만났어?”
창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최영훈 상무가 소개시켜줬습니다·”
그제야 김태현 회장은 당시 최영훈 상무가 굳이 강압적으로 창훈을 밀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둘째를 밀어주게 될 거라고 확신했을 테니까·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사장단 회의 소집해라·”
“네? 아버지···”
당황하는 도훈에게 김태현 회장이 말했다·
“크게 봐라· 지금은 크게 생각할 때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도훈은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언가 크게 뒤틀리고 있다는 건 알았다·
< 중개 비용(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