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개 비용(5) >
우명그룹 전 계열사는 모두 서울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명솔라만 해도 본사는 청주에 있으니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다고 당장 모두 모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태현 회장이 지시를 내린 지 3시간 정도가 흐른 후에야 사장단 회의가 소집될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가장 피가 마른 사람은 바로 도훈이었다·
김태현 회장은 사장단 회의 소집을 지시한 뒤 두 아들을 회장실에서 내보내고는 아예 회사를 나왔다·
“갑자기 어쩐 일로····”
김태현 회장이 급히 움직여서 만난 사람은 최영훈이었다·
일하는 중이었지만 급히 만나자고 청한 사람이 우명그룹 회장이었기에 영훈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를 회사 소유 호텔로 불렀다·
호텔에서 만난 김태현 회장은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지도 않고 급히 물었다·
“이게 모두 자네가 계획한 일인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이케 유리코· 자네가 소개해 줬다며? 뭐 하자는 수작인가? 고이케 유리코와 손잡고 우리 우명을 노릴 생각이야?”
역시 쉬운 사람이 아니다·
김창훈 상무는 고이케 유리코라는 말에 그저 헤벌쭉했지만 김태현 회장은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요?”
김태현 회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진심인가? 아니면 그냥 떠보는 건가?”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
“아마 진심이었겠죠? 이해합니다· 걱정되시는 거· 일단 앉으세요·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됐네·”
“제가 어떻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회장님이 안심할 수는 없으실 겁니다· 아니라고 한들 믿지 못하실 거고 그렇다고 한들····”
김태현 회장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지만 그렇다고 치솟는 화를 분출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영훈이 하던 말을 이었다·
“둘째 아들의 결혼을 말리실 것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
“회장님은 저를 만나실 때마다 항상 저를 떠보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제 기분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닙니다·”
“내가 자네 기분까지 생각해 줘야 하는지는 몰랐군·”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니 우리 이렇게 하죠· 의미 없는 떠보기는 그만하고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
“그렇게 하면 굳이 저에게 고이케 유리코와 손을 잡고 우명그룹을 차지하려고 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물어보면 되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또는 도와달라· 어떤 게 좋을 것 같습니까?”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하는 영훈을 보며 김태현 회장은 흥분했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음을 느꼈다·
그리고 확실하게 느꼈다·
최영훈은 윽박질러서 통할 상대가 아니며 지금 자신은 윽박을 지를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는 것을·
“내가 오해를 했군· 미안하게 됐네·”
그제야 영훈이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회장님이 사과라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크게 놀라겠습니다·”
“내 위치가 어떻게 됐든 실수를 했으면 사과를 하는 게 맞지·”
숙이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그가 희미하게 미소까지 짓는다·
“역시 존경받는 어르신들은 다르군요·”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네· 옛말에 상팔하팔이라고 위로 여덟 살 아래로 여덟 살은 친구를 먹었다고 하던가? 같은 뜻을 지닌 사람과는 나이를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하하 그렇다고 제가 회장님과 친구 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친구겠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이다·
영훈은 그만 놀리고 말을 받았다·
“고이케 유리코와 제가 얼마나 가까운지 궁금하신 거겠죠?”
“맞네·”
“흐음··· 가깝기는 합니다· 예전에 괜찮은 남자가 생기면 소개해 주기로 했었고 실제로 괜찮은 남자가 있다고 말하니 일주일도 안 돼서 한국으로 날아와 선 자리에 앉았으니까요·”
“무슨 사이길래?”
“무슨 사이냐고 궁금해하실 법한데 이게 웃기게도 그녀와 저는 이제 겨우 두 번 만난 사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두 번째 만남은 그녀가 선보러 서울에 왔을 때였죠·”
“그럼 처음 만나서 남자를 소개해 주기로 했고 그녀는 그걸 믿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날아왔다고?”
김태현 회장은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 사이끼리 미팅 주선해 주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 있는 그것도 로얄메이저 대표에게 선 자리를 주선해 주는 것도 웃긴데 고작 한번 만난 사이인데 그걸 덥석 물고 날아왔다니····
로얄메이저가 가진 자산은 못해도 우명그룹 전체와 맞먹을 정도인데 그런 회사의 대표가 뭐가 부족해서 남자를 만나러 한국까지 온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영훈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또 의심을 하면 아예 상대도 안 해 줄 것임을 알기에 김태현 회장은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오는 물음을 가까스로 삼켜야 했다·
“회장님이 믿으실지 아닐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는 중이니까요· 전 의미 없는 싸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명그룹과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고 앞으로 두 회사가 힘을 합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중요한 상황에 잡스러운 이유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네·”
우명그룹의 후계자 문제가 고작 잡스러운 이유로 취급되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영훈의 말에 수긍한 그였다·
“김창훈 상무에게 고이케 유리코 씨를 소개해 준 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명그룹 때문이 아니라 고이케 유리코 씨 때문이었습니다· 고이케 유리코 씨에게 좋은 남자를 소개해 줘야 하는 상황 때문에 결정한 거죠· 그러니 우명그룹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저로서는 조
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별생각이 없었거든요·”
한마디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회사 상속 문제를 가지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달려온 김태현 회장으로서는 한편으로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황당한 답변이었다·
“그렇군· 역시 내가 오해한 거였어· 미안했네·”
“솔직하게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고이케 유리코는 진짜 김창훈 상무가 마음에 든 것 같았고 둘이 결혼까지 이어질지는 저 역시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구만··· 허··· 창훈이가 로얄메이저 대표와 결혼을 하게 될 거라니····”
“며느리가 시아버지보다 돈이 많을 수 있겠군요·”
“이제 집에서도 며느리 눈치 보면서 살아야겠군·”
“그래도 좋으시죠?”
“당연하지· 그깟 눈치 좀 보면 어때?”
“그럼 지금 하고 있는 공사를 끝으로 인도에서 발을 빼신다고 알고 있으면 되겠군요·”
김태현 회장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네·”
“좋습니다· 그럼 안심하고 건설 쪽 사람들에게 해당 내용을 알려 줘도 되겠네요·”
“실례가 많았네· 그만 일어나도록 하지·”
김태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영훈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응?”
“아까도 말했듯이 고이케 유리코 씨를 김창훈 상무에게 소개해 줄 때 별생각이 없었던 게 맞습니다만 이제는 아니게 됐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남녀 둘이 만나서 연애하고 헤어지는 거야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두 가문이 합치는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마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시지요?”
순간 김태현 회장은 눈만 껌뻑이며 영훈을 바라보았다·
영훈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무슨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일종의 복비··· 같은 걸 달라는 건가?”
“부동산 중개를 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보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녀 둘을 중매해 줬다고 이렇게 대놓고 뭘 요구하는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네· 좋은 혼처를 소개해 줬으니 당연히 뭐라도 선물해 줄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 자네가 요구하는 건 그런 게 아니지?”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듣기론 요새 재벌 중매쟁이들은 한 건 성사시켜 주고 꽤 많은 돈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저를 그 정도로 보지는 않으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차라리 중매쟁이가 고이케 유리코를 중매해 주고 뭘 달라고 하면 수억 정도는 시원하게 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요구하는 사람이 HS그룹의 최고 실권자인데 돈 수억 주고 입 닦는 건 도리어 상대방을 화나게 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김태현 회장이다·
“보아하니 정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본래 그렇게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었나?”
“기업과 기업 간을 연결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니 회장님도 감히 이 의심스러운 혼인을 깨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고이케 유리코 씨를 며느리로 받는 건 로얄메이저라는 거대 자본을 아군으로 흡수하는 것일 테니까요·”
“·······”
“이걸 공짜로 먹겠다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데····”
영훈은 김태현 회장의 머리를 흘깃 바라보다 급히 입을 닫았다·
그냥 한 말인데 하필 김태현 회장의 한쪽으로 넘겨 덮은 머리 한가운데의 듬성듬성한 모발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그를 보며 영훈이 헛기침을 했다·
“큼큼··· 어쨌든 제가 우명그룹 후견인도 아니고 김창훈 상무의 백부도 아닌데 이런 혼처를 소개해 주고 모른 척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창훈이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나?”
말은 저렇게 해도 그 숨은 뜻은 창훈이를 후계자로 밀고 싶어 하지 않았냐는 뜻이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김창훈 상무를 좋은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 우명그룹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회장님의 장남 사랑이 끔찍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굳이 안 될 걸 가지고 애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잘 알겠네· 자네에게 줄 선물은 내 잘 생각해서 알려 주도록 하지·”
“기대하겠습니다·”
끝까지 얄밉게 말하는 영훈을 보며 김태현 회장은 씁쓰레한 미소를 남기고 호텔을 나갔다·
*
오성전자 강대성 전략실장은 급히 부회장실로 향했다·
아직 그룹 내부에서 극비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재식 부회장의 병환 소식이 사장단 사이에 은밀하게 흐르고 있는 와중이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언제고 인사 폭풍이 불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부회장실에서 호출이 오니 강대성 실장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야 했다·
“부르셨어요?”
부회장실에서 쓸쓸히 창밖을 바라보던 강재식 부회장은 대성을 힐끔 보더니 손짓했다·
“거기 앉아라·”
“네·”
“하는 일은?”
“3년 내에 AI 부문에서····”
“아니 그거야 부사장에게 들으면 되고 네가 하는 일 말이다·”
“천보윤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무리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나타날 변수도 꼼꼼히 체크하고 있지만 지지율 격차가 현저히 차이 나고 무엇보다 야권에는 그걸 뒤집을 만한 경쟁력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결국 최영훈이 말대로 되어 가고 있어·”
“네·”
“좋겠구나· 그런 최영훈이 네 편이라서 말이야·”
“편이라기보다는····”
“됐다· 능력 있는 사람을 옆에 두는 것 역시 능력이다· 경영자는 능력 있는 사람을 잘 살펴서 적절한 자리에 앉혀 놓는 것 그게 중요해·”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천천히 걸어와 상석에 앉고는 말을 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초기라고 하지만 암은 암이다·
일을 병행하면서 고치려는 게 욕심이라는 건 강재식 부회장도 알고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편히 쉬면서 한 번에 싹 나으셔야죠·”
“네 생각은 어떠냐?”
“네? 어떤 생각 말씀이세요?”
“내가 자리를 비우면 어찌해야 할 것 같냐는 말이다·”
“부품부문장인 조용석 사장 대행 체제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용석이는 일에는 밝지만 정치가 약하고 결정적일 때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 내가 도와줘서 일에만 집중하게 하지 않으면 생각지 못한 곳에서 실수를 하지· 2인자에는 적합하지만 내 자리를 잠시 이끌기에는 불안해·”
“그럼···?”
“최일곤이 어떠냐?”
대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최일곤 사장을 강대성의 사람으로 붙여 준 게 아버지이니 노골적으로 밀어주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대성을 보고 그가 말했다·
“나쁘지 않다는 게로구나· 알았다·”
“아버지··· 형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강재식 부회장은 그렇게 알라는 듯 대성의 손등을 쓸어 주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으로는 쓸쓸해 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애정을 보여 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대성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 뭔지 모를 감정을 안고 부회장실을 나온 대성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 중개 비용(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