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격(4) >
저녁 6시 오성병원 VVIP 병동·
강재식 부회장이 머물고 있는 초특급 1호실에는 십수 명의 사람들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오성그룹 각 계열사 사장급 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라 넓은 병실임에도 넓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본 강재식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김대승 사장·”
“네·”
오성바이오케미컬의 김대승 사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구레나룻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땀을 보건대 무척 긴장하고 있을 것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중공업에 처음 입사했을 때 김대승 사장이 입사 동기였지?”
“네 맞습니다·”
“그때가 언제냐··· 참 오래됐어· 그땐 우리 오성이 이 정도로 세계적인 기업이 될지 몰랐는데 말이야· 다들 알아? 내가 입사해서 사장 아들이라고 일도 건성건성 하면서 건방 떨고 다닐 때 여기 김대승 사장이 동기로서 날 한번 혼쭐을 낸 적이 있었어·”
“혼쭐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김대승 사장이 벌게진 얼굴로 손을 흔들었지만 강재식 부회장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사장 아들이지만 그렇다고 정신줄 놓고 세월만 흐른다고 이 회사가 네 것이 되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건방 떨지 말고 일부터 열심히 하라는 말이었는데 그때 그 충고가 참 도움이 됐어· 그 충고가 없었으면 아마 한동안 여자나 쫓아다니다가 이 회사는 형님한테 뺏기고 지금쯤 저
~기 요양병원을 전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닙니다·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아니야· 내가 어디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내가 그때는 고맙다는 말을 못 했지만 지금은 해야겠어· 그때 참 고마웠네·”
김대승 사장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푸들푸들 떨리는 볼과 축축한 등허리는 지금 강재식 부회장이 무엇을 하려는지 예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래서 내 자네한테 무척 실망했다네·”
역시나 김대승 사장은 올 것이 왔다는 듯 눈을 감았다·
“·······”
“만성이를 도와주는 것도 좋은데 내 사돈을 걸고 넘어지면 안 됐지· 그건 선을 넘는 거였어·”
강만성 사장과의 만남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그 아이디어조차 자신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에게까지 흘러간 것이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회사를 위한 신념이었다면 내 인정할 수 있어· 회사가 발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면 사돈이 노리고 있는 회사라고 해도 우리가 가져야지· 그런데 그런 목적이 아니었잖아? 대성이를 전략실에서 내쫓기 위함이었다는 소리에 내가 꽤 충격을 받았다네·”
김대승 사장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자신을 노리는 것임과 동시에 강만성 사장을 대놓고 저격하는 행태였다·
처음 강만성 사장을 거론할 때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몰랐지만 강재식 부회장의 연속된 질책에서 강만성 사장에 대한 부회장의 판단에 이질감을 느꼈던 거다·
그렇다면 살아날 구멍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냥감이 자신이 아닌 게 맞다면 과녁에서 조금 비켜서면 될 일이라고 판단한 그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강만성 사장이 원하는 걸 말씀드리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오직 회사만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정치적인 발언을 했으니 분명 제 실수입니다·”
“만성이가 원하는 걸 말했다···· 만성이가 뭘 어떻게 원했는데?”
뻔히 큰아들이 어떠한 상황인지 알고 있고 방금 전에도 만성을 도와주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으면서도 다시 묻는다·
김대승 사장은 이 대목에서 확신했다·
강재식 부회장의 큰아들에 대한 스탠스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걸·
“아무래도 작은 도련님인 강대성 실장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강재식 부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더 강한 걸 원하는 거다·
“강대성 실장을 내쫓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라도 괜찮다는 마음이셨습니다·”
“아무래도 자기 자리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게다가 그렇게 하면 강대성 실장의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사람을 심으면서 오성전자에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허허··· 대성이만 쫓으면 됐지 왜 세력을 키워?”
“그래야 언제고····”
김대승 사장의 말이 끊어졌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상상을 벗어난 폭탄 발언에 이 자리에 모인 계열사 사장들은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못했다·
“음··· 그런가? 만성이가 그랬어?”
“제 판단으로는 그랬습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쯧쯧쯧··· 그러게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와서 물었어야지· 진즉 찾아와서 답을 구했어야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김대승 사장에게서 시선을 떼고 사장단을 향해 말했다·
“내가 참 가슴이 아파· 오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궈 놓았지만 자식 농사만큼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그게 또 내 이야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자네들도 집에 가서 자식들한테 신경 쓰라고· 내 꼴 나지 말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계열사 사장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강재식 부회장은 고개를 흔들고는 김대승 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친구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마음이 급해서 헛소리를 했어· 그러니까 방금 전의 말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알겠습니다·”
“내가 말이야 여기 누워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자식새끼들 때문에 영 머리가 복잡해· 아 글쎄 우리 다은이 결혼시키는데도 어찌 그리 말이 많아? 어이 조 사장·”
강재식 부회장의 가장 최측근인 조남혁 사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부회장님·”
“우리 다은이 결혼이 목전인데 누가 장난치는 거야? 알아봤어?”
“그것이····”
“이것 봐· 요즘 내 마음에 쏙 들게 일하는 놈들이 없어· 뭘 물어보면 헛소리나 하고 그게 아니면 제대로 된 해답을 못 내놔· 이러니 내가 마음 편히 여기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겠어?”
“·······”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감을 못 잡아? 야당 놈들이지? 그렇지? 내가 가서 여의도를 한번 뒤집어 놔야 하는 거지?”
조남혁 사장은 입술을 깨물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실은····”
“실은?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내가 암이 아니라 속 뒤집혀서 죽는 걸 보고 싶은 게야!”
“그게··· 첫째 며느님 쪽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의 얼굴이 싹 굳어 버린다·
2연타·
마치 짜놓은 듯한 그림에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여진이가 했다고?”
“며느님의 동생이 가진 엔터 회사와 가까운 기자가 이 사건 중심에 있습니다·”
“기자가 기삿거리가 생기면 펜부터 움직이는 게 뭐 이상해?”
“처음 기사화했던 언론사는 인터넷 신문사여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게 함정이었습니다· 찬찬히 재검토하니 해당 신문사는 가명으로도 기사를 올릴 수 있었고 그 기사를 해당 기자가 받아썼습니다· 일부러 누군가 올린 기사를 받아쓴 것처럼 해 놓은 거지만 혼자서 두 개의 기
사를 쓴 겁니다· 사건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며느리가 왜 그런 짓을 해?”
“아무래도 다은 양과 강대성 실장 둘이 손을 잡았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엎으려고 했던 게 아닌가····”
“그렇다고 결혼을 엎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안 그래도 흘러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숨죽이고 있는데 버럭 소리까지 지르니 몇몇 사장은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감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조 사장이 뭐가 죄송해? 이제 어쩔 거야? 다은이 결혼 망칠 거야? 이대로 내 딸 개망신 시킬 거야?”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다은 양의 남편 될 천승모 군이 사진을 조작한 건지 다은 양과 예전에 연애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올리고 해당 루머는 모조리 거짓이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론이 다시 뒤집히긴 했지만 또다시 반박 글이····”
“또 올라와?”
“···죄송합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해하다가 말했다·
“해결 방도는?”
“기자를 특정하고 쫓고 있습니다· 반박 글이 방금 전에 올라왔지만 우리가 쫓는 걸 알자 바로 삭제했는데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박 글 때문에 승모가 곤란해지지 않겠어?”
“그 반박 글도 승모 군의 증거를 완벽하게 뒤집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몇 가지 추가 의혹을 부풀려서 말한 수준인데 삭제됐기 때문에 그 반박 글의 신빙성도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대로 정리되면 다은 양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될 일은 없을 겁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눈을 감았다·
“내가 자식새끼를 잘못 키웠어· 잘못 키운 거야····”
“·······”
“다들 어떻게 생각해? 윤 사장 고 사장은 어떻게 생각해? 김재진이 당신 생각은 어때?”
차례대로 중공업 상사 생명 순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대승 사장과 같이 강만성 사장 측근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름이 호명된 사장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강만성 사장이 실수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강만성 사장의 욕심이 그 정도일 줄은····”
다들 한마디씩 하는데 어느 하나 강만성 사장에게 호의 어린 말이 없었다·
“조 사장 생각은?”
조남혁 사장은 이미 사장단이 소집될 당시 첫째아들을 특정하고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서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현재 회장님도 쓰러지셔서 장기간 와병 중이신 상황에 부회장님까지 암을 진단받으셨습니다· 당연히 치료가 될 줄 알고 있지만 만에 하나의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거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씁쓸하구만·”
“죄송합니다·”
“아니야 맞는 말이야· 계속해·”
“이런 상황에서 만약 부회장님까지 건강에 문제가 생기신다면 그룹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외국계 자본이 우리 오성이 흔들린 틈을 노린다면 몇몇 계열사가 넘어갈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긴 하지·”
“이럴 때 강만성 사장의 가볍고 어리석은 행동을 보면 그룹의 미래를 맡기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차라리 전 강만성 사장이 아닌 강대성 실장에게 지분을 넘겨 후계 경영권을 공고히 하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상황을 대비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성이한테? 너무 이르지 않을까? 그리고 대성이 놈이 싹수가 있어?”
이미 손도 잡고 뽀뽀까지 한 마당이다·
여기서 딴소리를 한다는 건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닌 거였다·
“부회장님을 쏙 빼닮아서 카리스마가 대단합니다·”
“강대성 실장의 순발력과 대범함은 확실히 보통 아닙니다·”
“지금껏 강대성 실장이 흔한 사고 한번 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능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성 역시 탁월해서 그를 좋아하는 젊은 직원들이 상당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강대성 실장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강재식 부회장은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칭찬만 하니까 다 거짓말 같구만· 뭐 어쨌든 다들 대성이가 내 다음으로 따를 만하다는 거지?”
“맞습니다·”
“음··· 좋아· 김대승 사장?”
“네?”
“통장 내놓고 사표 써·”
강재식 부회장이 말하는 통장·
그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통장으로 그걸 맡겼다는 것 자체가 신뢰한다는 표식이었다·
겨우 한고비 넘긴 줄 알았던 김대승 사장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부회장님····”
“지금까지 고생했어· 그런데 대성이 목에 칼을 겨눴던 자네를 어떻게 그냥 둬?”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알아· 하지만 만약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통장 내놓고 사표 써· 대신 작은 업체 하나 차리면 먹고살 수 있게 거래해 줄 테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김대승 사장이 눈물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강재식 부회장은 그의 울음이 보기 싫다는 듯 조남혁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분 이동 계획 다시 짜야 해?”
“이미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준비한 계획이 있습니다· 설계한 대로 마무리되면 강대성 실장이 향후 있을지 모를 부회장님 부재 상황에서 경영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내일까지 차질 없이 주식 다 옮겨·”
“알겠습니다·”
할 이야기가 끝난 강재식 부회장은 후련하고도 씁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인 사장단을 바라보았다·
< 반격(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