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욕의 결과(2) >
집으로 돌아온 영훈은 옆에서 잠든 연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현실이 맞는지 떠올리고는 했지만 오늘은 정말 이 행복을 자신이 누려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훈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거실로 나와 평소에 잘 즐기지도 않던 와인 한병을 땄다·
와인의 맛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와인의 향이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와인잔을 들고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선 영훈은 날짜를 가만히 살폈다·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언제 태어나게 될지 계산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게 맞는 것인지 떠올렸다·
“어렵네···”
어려웠다·
자신의 사주를 잊으려고 했던 이유·
주어진 운명에 매어 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기가 태어난다고 하니 그런 생각은 잊어버리고 가장 좋은 날짜와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이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연희가 걸어나왔다·
“뭐해? 그거 와인이야? 뭐야··· 혼자서 와인 즐기려고 그런 거야? 나 술 못 마신다고 이러기 있어?”
“당신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야·”
연희가 옆에 착 달라붙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좋은 사주에 맞춰 태어나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
“왜? 난 좋을 것 같은데?”
“난··· 모르겠어·”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행운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
그걸 알게 됐을 때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영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가 자신이 바라는 삶대로 살지 않을 때 그걸 그냥 두고 볼 수 있을지 물이 위험한 사주라면 과연 수영장에라도 마음 편히 보낼 수 있을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다가 사고라도 당한다면 그때 그 후회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모든 게 혼란스러운 영훈의 뺨을 연희가 톡톡 두들겼다·
“응?”
“우리 그냥 최선을 다해 살자· 오빠 말대로 모든 걸 다 아는 게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 되잖아·”
“내가 최선의 날짜와 시간을 정해줬으면 해?”
“아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래· 대신 우리 아이가 뭘 잘하는지 어떤 걸 피해야 하는지 정도만 알면서··· 응?”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그렇게 해보리라 다짐한 영훈이었다·
*
늦은 시각 오성 병원 VVIP 병동·
“사장님?”
강재식 부회장이 머물고 있는 병실 입구에 서 있던 경호원과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다가온 강만성 사장의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 직원들이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나와·”
“오늘 돌아가시고 내일 오시죠· 부회장님 방금 잠드셨습니다·”
“아버지랑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까 비켜·”
“죄송합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죠·”
입구를 막는 직원은 강재식 부회장을 오랫동안 모신 경호팀장이었다·
아무리 강만성 사장이 부회장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경호팀장은 그 권위에 위축되지 않았다·
문제는 오늘 강만성 사장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짝!
경호팀장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인 만성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어디 내 앞을 막고 있어? 너 해고야· 사표 쓰고 꺼져·”
“죄송합니다· 내일 오시죠· 그리고 사표는 내일 오전에 부회장님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이런 버러지 새끼가···”
다시 한번 경호팀장의 뺨을 후려친 만성이 경호팀장을 밀치며 지나가려고 했지만 경호팀장은 단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은 채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힘으로 밀고 가려고 해도 밀리지 않자 급기야 경호 팀장의 복부를 주먹으로 후려쳐댔다·
마치 복근 훈련을 하는 복싱선수처럼 묵묵히 그 폭력을 당하면서도 경호팀장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게 오성 후계자가 가진 권력이었다·
몇 번 하다가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 폭력이 계속되고 처음에는 여유롭게 맞아주던 경호팀장의 얼굴도 까맣게 죽어갔다·
이러다 사고라도 생기는 게 아닌가 다들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뭐 하는 짓이야?”
피곤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강재식 부회장·
짜증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는 뒷짐을 진 채 배를 얻어맞고 있던 경호팀장을 슬쩍 보고는 술에 쩔은 아들에게 한마디 했다·
“어리석은 놈·”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만성은 그 짧은 한마디에 어린 경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일까?
만성은 지금도 그게 미친 듯이 궁금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저를 막고 있어서···”
“내일 다시 와·”
강재식 부회장이 문을 닫을 때 만성이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버지!”
손이 찍혔기에 그 아픔이 대단하련만 만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애걸했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저랑 이야기 좀 하자구요·”
“···”
처절한 큰아들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게 강재식 부회장은 더 미움이 커졌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아들이었는데···
오성이라는 이 거대하고 위대한 그룹을 물려주기에 조금도 아깝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토록 미워졌는지 강재식 부회장은 스스로도 신기했다·
어쩌면 더 사랑했기에 자신을 향한 배신감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들어와·”
강재식 부회장은 귀찮은 걸 무릅쓴다는 얼굴로 문을 열어둔 채 병실 안에 비치된 소파로 가 앉았다·
만성은 자신을 가로막았던 경호실장을 노려보다가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너 내일 사직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진단서랑 같이·”
그렇게 자신의 분을 풀고는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번 숨을 고르고 취한 정신을 애써 가다듬은 그는 옷을 바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폴폴 풍기는 술 냄새에 강재식 부회장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만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용기를 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시간에 찾아와? 너 내가 치료 중인 거 모르냐?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거냐?”
“아버지가 건강하시기를 세상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 접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래?”
강재식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만성은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만성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나가려고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지분이동 명령하신 거··· 대성이한테 그룹 물려주려고 하신 거예요?”
“그래·”
“왜요?”
“다은이 일 너희가 한 짓이라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만성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다은이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오성유통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지가 뭘 안다고··· 아버지 다은이가 경영에 대해 뭘 알아요? 명품이나 사고 자랑이나 해댈 줄 알지·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유통시장이 어려워졌다고 지금 상황이 그렇게 안 좋기만 한 상황입니까? 이럴 때 혁신을
주도하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는 시장 상황입니다· 대학 졸업도 못 한 뭣도 모르는 여자애가 오성유통을 맞는다는 건 회사를 죽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요구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거절하면 될 일이고 거절로 부족하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했어야지· 아무리 그렇다고 동생 결혼을 망치려고 해?”
“다은이랑 대성이랑 손잡고 저를 노렸어요·”
“노렸으면? 너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더냐?”
“아버지···”
“결혼을 망치려고 했으면 천보윤 의원을 설득하든지 아니면 대통령을 사돈으로 두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니? 결혼을 깨려고 동생을 전 국민 앞에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도 모자라 유력한 대선 후보의 얼굴에 똥칠을 하려고 해? 저러고 나서 대통령에 당선이라도
되면? 그때 오성그룹의 총수가 만약 너라면? 천보윤 의원이 우리 오성을 어떻게 볼 것 같으냐?”
“그 그건···”
“어리석어도 어찌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어? 이런데도 내가 널 믿고 그룹을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냐? 고작 동생 결혼을 망친 것의 파장조차 생각하지 못하면서 그룹의 앞날을 어떻게 볼 수 있어?”
“너무 급작스러워서 그랬어요· 대성이랑 다은이가 절 너무 조여오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 거예요· 마음이 급하면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럴 수 있지· 그게 사람이니까·”
“그러니까요·”
“하지만 오성그룹의 총수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만성은 이대로 아버지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거냐?”
“전 대성이를 아버지를 대신할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강재식 부회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런 멍청한 놈! 능력이 없으면 받아들일 줄 알든가 그렇지 못하면 앞서갈 생각을 해야지· 능력도 없는 놈이 욕심만 부릴 줄 알면 그룹이 망하는 거 몰라?”
“저 능력 있어요· 제가 오성디지털 맡고 나서 매년 매출을 30% 이상 신장시켰어요·”
“그게 어디 전부 네가 잘나서 된 일이냐? 이전 사장이 추진하던 사업이었고 오성전자와 같이 일으킨 매출이었지·”
“그럼 대성이는요! 대성이는 뭘 보여줬는데요? 어디 말해보세요· 대성이가 어디 얼마나 잘났기에 절 젖히고 그룹의 총수가 될 자질을 보였는지요·”
강재식 부회장은 흥분해서 벌떡 일어난 만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앤 날 속이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넌 날 속였지· 알고 있었지 않니? 내가 아프다는 거· 네가 병원장과 짜고 날 속이려고 했던 걸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냐?”
만성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표정이 굳어지고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이걸 알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강재식 부회장은 그런 아들을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비가 암에 걸린 걸 알면서도 조용히 악화되도록 기다린 너· 반대로 아비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집으로 달려와 병원에 가서 치료하자는 대성이· 그게 너희 둘의 차이다· 내가 대성이를 밀어주지 않을 이유가 있니?”
만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만성이 말했다·
“그럼 능력은 증명하지 못한 거네요·”
“뭐라고?”
“네 대성이의 효심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능력을 증명하지는 못한 거네요· 전 오성디지털 사장이고 오성개발 오성테크놀로지 오성바이오 오성증권의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움직이는 지분만으로 오성전자를 경영하기에는 문제없겠지만 이것들은 힘들겠죠·”
강재식 부회장은 아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손가락을 아들을 향해 가리키며 부르르 떨었다·
“너··· 너···”
“제가 가진 지분 내놓으라고 하지 마세요· 강제로 빼앗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가진 비자금 내역 저도 일부분 가지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절 강제로 오성에서 내쫓으려고 하면 저도 그냥 죽지는 않을 거예요·”
“이런 미친놈!”
강재식 부회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흥분한 부회장의 목소리가 밖에까지 울려 퍼지자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실장이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만성은 그런 경호실장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대성이한테 지분 다 몰아주고 나면 나중에 제가 가진 지분 조용히 뺏으려고 하셨죠? 그렇게는 힘들 겁니다· 저 이렇게는 안 물러나요·”
“너···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수십 수백조가 걸린 일인데 물러나는 게 어리석은 일 아니에요? 그럴 줄 알고 지분이동도 저 모르게 한 거고 나중에 저 모르게 제 지분도 빼돌리려고 하신 거 아니셨어요?”
“···”
“시발··· 좆 같은 상황이긴 한데 절 쫓아내려고 마음먹으셨으니 어쩔 수 없어요· 몸조리 잘 하세요· 그만 갈게요·”
그렇게 밖으로 걸어나가려던 만성은 경호실장의 뺨을 다시 한번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전심전력을 다했는지 경호실장의 입에서 주르륵 피가 쏟아졌다·
“시벌놈이 자꾸 길을 막고 있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 묻은 손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의 옷에 쓱쓱 닦고는 병원을 벗어났다·
< 탐욕의 결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