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욕의 결과(3) >
오성병원에서 그 난리를 친 만성은 수행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차 뒷자리에서 양주 한 병을 속칭 병나발 불 듯 마시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최 과장·”
최영재 과장·
지금까지 3년 동안 강만성을 모셨던 수행기사로 그 어렵다는 만성의 비위를 잘 맞춘 것으로 회사 내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수행기사는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수행할 인물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모든 동선을 같이 하기에 무척 중요한 직책이다·
이동하며 통화하거나 중요한 내용을 의논할 때도 어쩔 수 없이 같이 들어야 하기에 입이 무겁고 눈치가 빨라야 하며 특히 성질이 더러운 사람을 모실 때는 참을성도 많아야 했다·
최영재 과장은 그 모든 사항에서 합격점을 받을 만큼 일을 잘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연봉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네 사장님·”
“요즘 회사 분위기 어때?”
“뒤숭숭합니다·”
“내가 쫓겨날 거라고?”
“···”
“흥! 시발··· 웃기고들 있네· 병신새끼들··· 내일 아침에 직원들 불러서 짐 옮기라고 해· 일단 논현동으로 보내놓고·”
“알겠습니다·”
“오늘 들어가야 해?”
당연히 집에 들어가야 하는 걸 굳이 물어본다·
여기서 들어가야 한다고 할 수 없었던 최 과장이 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퇴근하지 말고 집 앞에 잠깐 대기하고 있어· 어디 갈 데가 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표정 풀어· 하루 잠 안 자면 죽어?”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야근하면 추가 수당 나오잖아·”
“그럼요· 더 좋습니다·”
그렇게 수행기사를 윽박지른 만성은 바로 전화를 걸어 누군가에게 만나자고 하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아무말 없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던 만성은 집에 도착하자 반쯤 남은 술병을 대충 길바닥에 던져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여보!”
한밤중에 동네방네 소리를 질러 자는 사람을 깨운 그는 깜짝놀라 뛰쳐나온 여진에게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말했다·
“짐 싸·”
“네? 무슨 말이에요?”
“짐 싸라고· 나갈 거니까 짐 싸! 당장!”
아무리 술을 퍼마셨다고 하지만 할 말 못할 말을 구분 못하는 남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여진은 일단 방으로 들어가 옷부터 입고 개인 금고에 놓인 중요한 서류만 챙겼다·
수천 수억짜리 명품 가방과 쥬얼리 따위는 나중에 챙길 수 있는 거지만 금고에 있는 이 서류들은 수천억이 넘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너 뭐 하는 거니?”
자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온 재숙에게 만성이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말했다·
“뭐 하는 거긴요? 어머니가 아들을 버리셨으니 이제 나가 살려고 합니다·”
“내가 널 버렸니?”
“아니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절 버린 거고 저도 이제 제 살길 찾아서 갑니다·”
“어딜 나간다는 거야? 너 집에서 나가면 아버지가 그냥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아직 술이 덜 깬 만성은 어머니를 원망의 눈초리로 보다가 쏘아붙였다·
“애초에 이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내가 가끔 이런 생각 한 거 알아요? 내가 어머니 아들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돈 좋지· 여자 좋고··· 그런데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거예요·”
“뭐라고?”
“어머니 아들이 아니었으면 조금 부족하게 살긴 했겠지· 더러운 시궁창 같은 삶을 살기는 싫어·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 때문에 행복했던 적은 있어도 어머니 때문에 행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했다고!”
재숙은 충격을 받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뒤늦게 달려 나온 둘째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부축했고 다은이 놀라서 엄마에게 달려갔지만 만성은 코웃음을 치며 계속 소리를 높였다·
“시발··· 그럼 돈이라도 많이 주던가· 돈이라도 많이 줬으면 내가 이러지라도 않지· 돈도 안 주고 사랑도 못 줄 거면 자식은 왜 키우는 거야· 짜증나게···”
너무 충격적인 탓일까?
재숙은 물론이고 다은이나 둘째 며느리인 새롬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이 벌게져서 흥분하는 큰오빠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두려운 탓도 있었다·
여진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하고 남편을 말리지도 못한 채 황급히 짐을 챙겨 남편의 옆에 섰다·
만성은 충격에 빠져 눈빛이 흐리멍텅해진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잘 먹고 갑니다· 만수무강하시든지 말든지··· 가자·”
만성은 뛰는 가슴을 부여잡은 아내를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차에 올랐다·
“처가로 가·”
“알겠습니다·”
차에 올라타자 여진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황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아버지가 알았어·”
“뭘요?”
“당신이 다은이 결혼 파투 낸 거· 아버지께서 다 아셨다고·”
여진은 입을 가리고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본래 아버지의 마음이 돌아선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병을 알면서도 숨긴 것 때문이지만 만성은 그걸 밝힐 생각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처가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여진의 잘못이 더 크게 부각돼야 하니까·
“그럼 도련님한테···”
“대성이 그 새끼한테 다 물려주신대·”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깨끗하게 갈라서야지· 장인어른 회사에 블루온 인수 양보하라고 해·”
“네?”
“당신 때문에 지금 오성그룹 후계자 자리가 날아갔어· 절반 뚝 잘라 나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내가 가져 나올 수 있는 거라고 해봤자 몇 개 안 된다고· 그럼 그거라도 양보해야 할 거 아니야?”
“···”
“그리고 담보 가치 부족할 수 있으니까 당신 앞으로 돼있는 명동 건물이랑 저축은행 지분 팔 생각해·”
“그것까지 팔면 난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그럼? 누군 손에 뭐가 남아? 내가 오성 뚝 잘라 나오면 아버지가 ‘너 가져라’ 하면서 쉽게 내준대?”
“그렇게 생각하면 뭘 내줘도 아버님이 내주시겠어요?”
“내주실 거야· 아까 금고에 있던 거 다 챙겼지?”
“네 다 챙겼어요·”
“거기에···”
만성은 수행기사를 슬쩍 봤다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가능해· 그런데 그렇다고 그냥 맨입으로 달라고 하면 주겠냐고· 뭐라도 내놓고 달라고 해야 아버지도 못 이기는 척 내주지· 그것도 부족하면 처가에서 힘 좀 써줘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알겠어요·”
여진은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일단 수긍했다·
처가 앞에 도착했는데도 내리지 않는 남편을 보고 여진이 물었다·
“당신은요?”
“난 만날 사람이 있어·”
“그럼 오늘 안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저기 들어가서 자길 원해?”
만성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냐는 표정으로 묻자 여진은 자신을 자책했다·
“미안해요· 그럼 호텔에서 주무실 거예요?”
“당연하지·”
“근데 이렇게 되면 우리 애들은요?”
“어차피 유학자금 내 돈에서 나가는 거야· 애들은 그냥 둬· 알리지도 말고·”
“알겠어요·”
여진은 오늘 밤이 무척 길어지게 될 것을 예감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부모님과 나눠야 할 말이 많으니까·
만성은 창문을 열고 차를 출발시켰다·
새벽 2시가 넘었고 양주를 한 병 넘게 마신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곤해지기는커녕 정신이 또렸해져왔다·
잠시 차를 타고 이동한 그는 서초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된 사간에서 1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확인했을 때 누군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음을 확인한 만성이 문을 열어주자 밖에 서 있던 남자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차에 올랐다·
“오랜만입니다·”
차에 올라탄 남자에게 만성이 인사를 건넸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놀랍게도 여당인 자유행복당의 당 대표인 민구상 의원이었다·
그는 이 시간에 자신을 불러낸 것에 불쾌감을 드러낼 만도 하건만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급하게 의원님을 만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늦은 시간임에도 연락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일을 하다 보면 새벽에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네·”
민구상 대표의 묘한 표정에 만성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제 사정 알고 계시죠?”
“글쎄?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만성은 민 대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털어놓았다·
지금은 누구와 말씨름을 하면서 기싸움을 할 여유가 없으니까·
“제가 오성에서 나가게 생겼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말로는 놀라는 척하지만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서 역시 알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네· 그래서 의원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
“힘이 왜 없습니까? 여당의 당 대표신데요·”
“정치인이 경영인 상속 문제에 자꾸 끼어들면 보기가 좋지 않지·”
“능력도 없는 재벌 3 4세가 상속세도 쥐꼬리만큼 내면서 경영승계를 하는 상황입니다·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이보다 좋은 소스가 있을까요?”
민 대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되물었다·
“내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성은 민 대표가 아버지 편에 서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냥 설득해서는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관리해오던 비자금 통장이 있다는 거 아실 겁니다·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가 넘는 그 통장은 사실상 아버지와 아버지의 최측근이 아니면 통장이 몇 개인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구요·”
“···”
“하지만 아들인데다가 얼마 전에는 오성그룹의 후계자라는 이야기까지 듣던 저였고 오성디지털의 사장인 제가 비자금 통장 몇 개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제가 가진 통장 중의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민구상 대표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먹혔음을 확신한 만성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4천억이 들어 있고 비밀번호만 알면 인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애초에 누가 찾아도 상관없을 통장이니까요· 흔적 역시 남지 않습니다· 이걸 잡아내려면 애초에 비자금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해야 하고 그럼 걸려들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민 대표의 울대가 출렁 움직인다·
4천억이라는 눈먼 돈을 꿀꺽할 수 있는 기회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설마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합니다·”
아버지에게 있어 민구상 대표는 잘 길들인 양이나 다름없다는 걸 만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오성그룹에게서 몇 개의 기업을 빼와 계열사 분리를 하려고 합니다·”
“딴 살림을 차리겠다?”
“네·”
“그러니까 경영승계 과정을 물고 늘어지면서 자네에게 시간을 벌어달라는 거지?”
“시간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절 건드릴 수 없게 압박해주세요· 검찰을 움직이시든 여론을 움직이시든 그룹이 쪼개질 수 있도록 여론을 조성해주시면 됩니다·”
“···”
어렵지만 4천억이라는 돈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부탁이기도 했다·
어느 누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자네를 믿을 수 있나?”
“통장은 먼저 드리겠습니다· 단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면 비밀번호를 알려드리죠· 통장과 비밀번호 이 두 가지가 없으면 돈을 인출할 수 없으니 저로서도 알려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통장이 대표님께 건너간 이상 제 돈이 아니니까요·”
“4천억이면 자네도 무척 쏠쏠하게 쓸 수 있을 텐데?”
“한국에서 인출할 수 없습니다· 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한국을 뜨는 순간 제가 가진 모든 걸 아버지가 빼앗아 갈 겁니다·”
“그렇군···”
만성은 아까 여진이 집에서 가지고 나온 가방을 열어 뒤적이다가 통장 하나를 꺼내 민구상 대표에게 건넸다·
“이겁니다· 두바이에 위치한 TSA Bank인데 신분을 묻지 않을 겁니다· 다만 그렇게 인출한 돈은 스위스 은행에 넣어야 할 겁니다·”
“난 바보가 아닐세·”
“죄송합니다· 걱정이 돼서요·”
민구상 대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단 알겠네· 자네 제의를 받아들이지· 하지만 내 생각대로 안 될 수 있네· 그럼 이걸 돌려주도록 하지·”
“대표님이 마음 먹고 움직이시는데 이 정도도 어렵다는 말입니까?”
“누가 내 발목에 전자발찌를 채워 뒀거든·”
만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버지는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지· 그랬다면 이 통장을 받기도 전에 거절했을 거네·”
“그럼 누굽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고 하여튼 내일 내로 연락을 주겠네· 그런데 강재식 부회장은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인데··· 가능하겠나?”
만성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절 믿지 말고 돈을 믿으세요 4천억· 그거 가지고 싶으면 개처럼 뛰어야 할 겁니다·”
< 탐욕의 결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