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1) >
청주에 위치한 우명솔라 본사 사옥·
초조한 표정의 김도훈 사장에게 비서실장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 하야트 호텔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눌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버지 오후 스케줄 있지?”
“네· 양주 골프장에서 HS 송은채 회장과 골프 약속이 있습니다·”
“시발··· HS가 문제였어· 창훈이 이 놈이 최영훈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새끼랑 어울릴 때부터 상황이 이상해졌다고··· 그 인간들은?”
비서실장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이케 유리코가 개인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건달 새끼들이 뭘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 어려운 일이니까 맡겼지 쉬운 일이면 시발 동네 양아치들 아무나 붙잡고 시켰을 거 아니야?”
“조용히 처리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내국인도 아니고 외국 거물이니 더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시발···”
도훈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성공했으면 한국에 대한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나가서 파혼도 가능했을 것인데 깡패 새끼들이 저렇게 간이 작을 줄이야···
“어떻게 할까요?”
“고이케 유리코와 조용히 약속을 잡아·”
“네? 김창훈 상무가 계속 곁에 있지 않을까요?”
“공항에 마중나가고 호텔에서 점심까지 먹었으면 됐지 종일 놀겠어? 아마 잠깐 회사로 들어갈 거야· 잘 지켜보다가 따로 연락해서 좀 만나자고 해·”
“김창훈 상무에게 알리지 않을까요?”
김도훈 사장은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년이 갑자기 한국에 와서 창훈이랑 결혼한다고 결정한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야? 그년이 창훈이 그 새끼를 보고 한눈에 반한 게 아니고서야 당장 결혼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사장님 말씀처럼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그년이 창훈이 그 새끼한테 붙은 이유가 뭐겠어? 나 젖히고 그룹 홀랑 처먹겠다는 거 아니야?”
“그럼···?”
고개가 뻐근한지 한번 목을 돌린 그가 말했다·
“적당히 먹여주고 빠지게 해야지· 분명 거절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나가고 김도훈 사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피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잠시 잠을 청해야 할 것 같다·
*
[대기업 불법 승계는 정의와 공정을 위반하는 것]
청와대 민정수석의 발언이 나간 이후 검찰이 오성그룹을 수사할 거라는 이야기가 대성의 귀에 들어왔다·
근거 없는 찌라시는 알아서 걸러졌을 것이기에 그의 귀에 들어왔다는 건 앞으로 그렇게 진행될 거라는 말이었다·
생각보다 강력한 강만성 사장의 반격에 그룹 임직원들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강만성 사장도 강대성 실장도 안 된다면 임직원들은 이제 각자도생을 걱정해야 했다·
강재식 부회장이 암을 극복하고 훌훌 털고 일어난다면 10년 정도는 걱정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하면 그룹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올 것이고 누구에게는 사직의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임직원들은 걱정과 기대를 둘 다 안고 있겠지만 대성은 아니었다·
승계가 물거품이 되면 그에게 남는 건 몇 푼 안 되는 주식이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그 몇 푼 안 되는 주식도 수천억 원에 달하겠지만 오성전자를 한손에 움켜쥘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수천억 원은 고작이라고 부를 정도로 작았다·
“도와주세요·”
그렇기에 대성은 다시 한 번 영훈을 찾아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항상 미소를 잃지 않던 영훈의 표정은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강만성 사장이 정치인을 움직여서 지금 진행되는 승계작업을 중단시켰다죠?”
“형이 그냥 이대로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강하게 밀어붙일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 눈치를 전혀 보지 않으니··· 아버지 손에 닿지 않은 정치인들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정치인을 움직였을까요?”
“민구상 대표를 움직였습니다·”
“네? 민구상 대표를요? 어떻게 아신 건지···?”
“얼마 전에 찾아왔었거든요·”
“민 대표가요?”
“네·”
영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강만성 사장으로부터 일종의 거래를 제안받았다고 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요·”
대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치인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하면···?”
“돈이죠·”
“아··· 돈이요? 설마···?”
“당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조성한 비자금 통장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성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걸 당신에게 이야기한 겁니까?”
“친하거든요·”
“네?”
이해하기 어려운 걸 떠나서 황당하기까지 한 대답·
대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어보자 영훈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저에게 의견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처럼요· 자세한 이유까지 이야기해줘야 하는 건 아니죠?”
“아 네· 그렇긴 합니다·”
“어쨌거나 민구상 대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을 이행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중입니다· 아마 이걸 뒤집기는 힘들 겁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해당될 만큼 거액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대성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회사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 로비를 위해 은밀한(?) 돈을 움직여본 적도 있었지만 여당의 당 대표를 돈으로 움직일 만큼의 스케일은 경험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알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
비협조적인 영훈의 태도에 대성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우리 회사에서 나온 돈입니다· 저와 같은 팀인 줄 알았는데 제가 착각한 건가요?”
“착각한 건 아닙니다만 방금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듯이 나와 민 대표와의 관계도 중요하니까요· 게다가··· 그렇게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민구상 대표가 비록 욕심이 많다고는 하지만 뭐가 우선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승계작업이 중단됐다고는 하지만 그걸 계속 막을 생각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자기 힘으로는 힘들다는 것도 알 테구요· 지금 정치권이나 검찰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강재식 부
회장의 전화 한 통이면 이 기세가 끝까지 이어지겠습니까?”
“당장 아버지가 오늘 오전에 청와대 비서실장과 통화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요·”
“그거야 강재식 부회장이 아직 오성병원에 누워있으니까요· 솔직히 정권에선 불법승계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인데 그걸 요청하는 사람이 아무리 강재식 부회장이라고 한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면 일단 지켜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닙니까? 특히 돈과 권력이 하늘에 닿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더 그가 가진 재물이 눈에 들어오겠죠·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대성은 남의 속을 뒤집는 말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영훈에게 화를 내려다가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그럼 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 아닙니까?”
“그만큼 강력한 한방이긴 했죠·”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군요· 그렇게 되면 우리와 HS그룹과의 관계는 이어질 수 없다는 것 모르십니까?”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 본질을 말씀드린 겁니다· 강만성 사장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을 던졌어요· 당 대표를 움직일 만큼 거액을 말이죠· 그걸 단순히 말 몇 마디로 막으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아버지가 암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보십니까?”
“아니요· 부회장님은 암에 무기력하게 가실 분이 아닙니다·”
“그럼 믿으세요· 아버지는 곧 병을 이기실 테고 청와대는 병마를 이긴 강재식 부회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어미 잃은 아기 호랑이를 상대할 때야 호기롭게 덤비겠지만 어미가 다시 살아오면 한낱 늑대 무리는 겁을 먹고 도망칠 수밖에 없죠·”
최영훈 상무의 말에 설득되어 가던 대성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빠트렸음을 깨달았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오게 되면요?”
영훈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성전자는 당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겠죠·”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형은요? 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성디지털을 비롯한 몇 개의 계열사는 어쩔 수 없이 강만성 사장에게 넘겨줘야 할 겁니다· 당신이 싫다고 하더라도 강재식 부회장님이 병마를 버텨낼 시간 동안 강만성 사장을 달래려면 그 수밖에 없을 테구요· 그를 달래지 못하면 일은 더욱 커질 테고 그렇게 되면 부회장님이 다시 돌
아와도 당신 먹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가 될 겁니다·”
대성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민에 잠겼다·
결국 그룹의 한 쪽을 내줘야 한다는 것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안 돼요· 오성그룹을 쪼갠다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성디지털과 오성전자는 협업 관계예요· 형이 오성디지털을 가지게 되면 오성전자의 매출과 이익률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될 겁니다·”
“···”
“받아들일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실장님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보이네요·”
강대성 실장은 허리를 뒤로 젖혔다·
“의외네요· 당신을 만나고 처음으로 어렵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스럽기까지 합니다·”
“저라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아니네요· 의욕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이 문제에 대해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요· 난 제갈공명이 아닙니다· 나에게 내 능력 이상을 바라면 안 돼요· 미안하지만 오늘 내가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영훈은 그렇게 망연자실한 대성을 두고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대성은 그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발··· 결국 돈이라 이거지?”
대성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탄 대성은 회사가 아닌 오성병원으로 움직였다·
VVIP 병동으로 오는 내내 수만 가지 생각을 하던 그는 막상 아버지를 만나자 머뭇거렸다·
“왜 그러고 있어? 지분 문제 때문이냐?”
“네·”
“오늘 저녁에 정책실장이 여기에 오기로 했다·”
대성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요?”
“그래· 말들이 많겠지만 곧 정리될 게야·”
아버지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지만 대성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그동안 쌓아온 인연과 현실로 자신감을 표했지만 최영훈 상무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심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쉽게 끝나지 않을 수 있어요·”
“지금 검찰총장이 누구라고 생각해? 다 내 돈으로 공부해서 그 자리까지 오른 놈이다· 그 밑에 있는 놈들도 명절마다 떡값 꼬박꼬박 받던 놈들이야·”
“그러니까 오히려 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아픈 걸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이대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 같이 군침을 흘리며 아버지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강재식 부회장은 새삼스럽다는 듯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렇게 말하더냐?”
“최영훈 상무가 그렇게 말했어요· 청와대 정책실장이고 비서실장이고 아버지 앞에서는 굽신거리면서 뭐든지 다 해줄 것처럼 말하겠지만 실제 행동은 다를 거예요·”
“시간을 끌 거다? 흥! 웃긴 소리· 누가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려고 해? 내가 살아 돌아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감수하려고?”
“결국 모든 일의 주동자는 형이잖아요· 그리고 정치인들은 여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고 검찰은 정치인들 눈치를 안 볼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대성은 말을 줄였지만 강재식 부회장은 아들의 뒷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결국 이후에 책임을 묻기도 애매하다는 말·
강재식 부회장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
이 모든 게 경영권이 안정되기 전에 자신이 암에 걸린 게 밝혀진 탓이다·
이미 승계가 완료된 후였다면 감히 버러지 같은 것들이 저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래서? 최영훈이가 뭐라고 해?”
“형에게 적당히 계열사 몇 개를 쥐어주면 일이 마무리될 거라고 했어요· 민구상 대표가 적당히 정리할 거라고···”
“그 인간이 한 거였어? 민구상이가? 뭐 때문에?”
“형이 비자금 통장을 건넨 것 같아요· 거부할 수 없는 금액을 제안 받았다고···”
“그 돈을···”
강재식 부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돈이 아까워서는 둘째치고 만성이 설마 그걸 포기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최영훈이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최영훈과 민 대표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된 연유인지 알려주기는 하는데 그 이상은 선을 긋고 있어요·”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듯한 목소리·
강재식 부회장은 바로 알아들었다·
“최영훈이에게 연락해라· 이곳으로 오라고·”
“네·”
그제야 대성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 저주(1) > 끝